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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는 기손(驥孫), 자는 중운(仲雲)이요, 호는 매헌(梅軒)이니,
시조는 가락국 수로왕이라. 중조의 휘는 관이니 고려조정에 판도판서의 벼슬을 하셨고, 고조는 돈웅공 휘 항, 증조는 의흥현감 휘 서이다. 조고(祖考)는 지평을 지낸 모암 공 휘 극일이여, 아버지는 증 참판공 휘 맹, 어머니는 貞夫人 용인이씨니 참의 양의 따님이라.
단종3년(서기 1455년) 11월11에 생하였으니, 일찍이 어머니 꿈에 용마삼필의 이조(異兆)로 아들을 출생함에 마변(馬邊)을 따서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이라 지었는데,
첫째는 동창이니 직제학으로 연천군의 봉작을 받으시고, 셋째는 탁영이요 시호는 문민이며, 公은 둘째이다.
성종임자(서기 1492년)에 세상을 뜨시니 용인고을 동쪽 이십리 계곡의 언덕에 장사하고, 판서 이봉이 묘에 사적을 기록하고 아우 탁영께서 명을 지어 가로되, 황갑(黃甲) 제일병 급제요 청춘 38 부생(浮生)이라 하고 또 긍을 지어 제사하니 제문에 이르기를 내나이 형보다 하홉살이 늦어서 형은 이미 배워 통달하였으되 나는 일찍 어리석은 아이라 형은 일띳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나와 그 마음이 일찍이 옛사람과 같으며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 늙은 것을 생각하여 세월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항상 나의 게으른 것을 깨우친지라 시절 음식을 반드시 몸소 장만하여 나누우되, 어버이 잡수신 후에 비로소 그 음식을 잡수시고 무릇 좌우 응대함에 낯 빛을 온화하게 하며 어김이 없게 하니 나도 그렇게 형에게 배움을 다하여 조금 어버이 섬긴법을 알게됨이 마땅히 이와 같은지라 경자년(서기 1480)에 같이 예조복시(禮曺覆試)에 불합격하셔서 드디어 어버이를 받들기 위하여 영남재를 넘어 뜻으로써 뜻을 기르고 산방에서 공부함이 오히려 문견이 적을까 걱정하여 책을 지고 점필재 문하를 찾아 선생에게 배운 두달 반에 드디어 향방을 알고 가는 곳 마다 서로 강론에 시례(侍禮)를 참고하여 증거를 대며 당시 학문을 닦을제 나의 몸에 옷이 넌넉하지 못하면 형이 항상 옷을 벗어 나를 덮어 준 지라 내가 처음 취처(娶妻)하여 충청도사로 있을 때 나의 실인이 있음을 기뻐하여 어머니에게 어진밭(良田)과 아름다운 종으로써 나 주기를 청하고 형은 스스로 척박한 밭과 어리석은 종을 취한지라 임인년(서기 1482년) 겨울에 나와 독실하게 공부를 같이하여 과거장중에 제일 장원으로 뽑힌지라 나는 나의 합격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형의 합격을 기뻐하며 하루아침에 빛나는 소리가 대궐에까지 이른지라 백의를 인견(引見)하여 손으로 어갱(御羹)을 받으시며 형과함께 갑과에 장원을 하심에 온 나라에서 부러워 하니 공경재생인들 뉘가 영화라 하지 아니하겠는가 ? 형의 몸이 조금 편찬함에 성종대왕께서 근심하사 밤중에 의원을 보내어 병을 물어시고 약을 더 쓰셨다. 얼마 안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삼년을 애통하며 애통함이 너무 과하여 피골이 상접하며 삼년상을 마치고 벼슬을 세 번 옮긴지라 그 해 병오년(서기 1486년)에 나도 역시 벼슬길에 오르니 형제삼인을 세상사람이 삼주(三珠)로 비유하였다. 이조좌랑은 세상이 청선의 벼슬이라 이르니, 이는 가히써 이력을 대략보도다.
배 흥해최씨는 직제학 형(泂)의 따님이라 마침내 아들이 없으니 삼종질 대영(大榮)을 취하여 뒤를 이었다.
그 후손이 용인계신 분묘에 정성을 다하여 수호하였으며 십세손 재철에 이르러 더욱 그 국내에 도장함을 막고 수호에 더욱 힘을 다하였다. 국토개발에 묶여 사세시급키로 갑인년(서기 1974년) 3월 22일에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요동 계좌언덕에 옮긴 것은 그 후손의 세거지인 곳에 안장함이라 吏曺左郞 梅軒公墓碣銘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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