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원명 | 위치 | 최초 | 주요인물 | |
| 소수서원 | 경북 영주시 순흥면 | 통일신라 | 고려 안향, 주세붕, 이황, | |
| 남계서원 | 경남 함양군 수동면 | 조선 | 정여창 | |
| 옥산서원 | 경북 경주시 안강읍 | 조선 | 이언적 | |
| 도산서원 | 경북 안동시 도산면 | 조선 | 이황(퇴계) | |
| 필암서원 | 전남 장성군 필암면 | | | |
| 도동서원 |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 조선 | 김굉필 | |
| 병산서원 | 경북 안동시 풍천면 | 조선 | 류성룡 | |
| 무성서원 | 전북 정읍시 칠보면 | 고려,조선 | 정극인 | |
| 돈암서원 | 충남 논산시 연산면 | | 김장생 | |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 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
남계서원
1552년 지방 유림이 문묘에도 배향된 정여창(鄭汝昌)의 학덕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566년 남계(濫溪)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이 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603년 나촌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본래의 장소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3. 관람
옥산서원
1571년(선조 4) 경주부윤 이제민이 부임한 후 향인들이 공의로 이언적의 학문과 행의를 기리기 위한 서원 건립을 청원하였다. 이에 이언적이 유식하며 수학했던 화개산 아래의 현재 위치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1572년(선조 5) 2월부터 8월까지 경주부윤 이제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사우와 강당, 동 · 서재 등 40여 칸의 건물을 지었다.
1573년(선조 6) 2월에 서악서원(西岳書院) 별묘(別廟)에 있던 위패를 옮겨와 봉안하고, 12월에 경상감사 김계휘의 청원으로 ‘옥산(玉山)’으로 사액(賜額) 되었다. 사액판은 이듬해인 1574년(선조 7) 2월에 내려졌다. 건립 이래로 총 5번의 치제(致祭)와 8번의 서적 하사(下賜)가 있었다. 이러한 국왕의 관심 아래 서원훼철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치되었다.
도산서원
고향으로 내려간 퇴계 이황이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세운 도산서당으로 시작했으며 그의 사후인 1574년(선조 7년) 제자들과 유림(선비들의 집단)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당 뒤편에 사당을 추가로 세웠다. 1575년에는 석봉 한호의 글씨로 된 현판을 사액받았다.
엄밀히 구분하면 이황이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사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서당 영역의 건물로는 도산서당, 농운정사, 역락서재, 하고직사 같은 건물이 있으며 서당 뒤쪽의 진도문을 기점으로는 서원의 영역이다. 서원에는 강당 시설인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 전교당(典敎堂)과 박약재, 홍의재 등이 있고 제향을 위한 시설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인 상덕사(尙德祠), 기타 부속 건물들이 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있었던 서원 철폐령 때에도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25년 도산서원 양반 출신의 땅주인이 소작료를 내지 않은 소작농에게 태형을 때리는 폭력범죄이자 사적제재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다음에 안동 시민과 권오설 등 사회주의 관련 인사들 중심으로 전국적인 도산서원 철폐운동이 일어났다.
1969년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해체 복원하였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에서 이의 비판점 몇 개를 지적했다.
1980년 공자의 77대손이자 마지막 연성공이었던 쿵더청 박사가 방문하여 추로지향(鄒魯之鄕)[3]이라는 휘호를 남겼으며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한 바가 있다.
필암서원
사적 제 242호. 하서 김인후(金麟厚)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1624년(인조 4) 복원되었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며, ‘도동(道東)’의 의미는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5대 서원으로 꼽힌다. 2019년에 ‘한국의 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전국 최초로 담장이 보물로 지정된 곳으로 400년 된 은행나무와 서원 옆을 흐르는 낙동강의 풍경은 옛 선비정신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豐岳書堂)에서 비롯되었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선생의 위판은 1620년(광해 12) 합향하는 과정에서 여강서원(주향 퇴계 이황)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에 다시 병산에 복향하였다. 당시 서애 선생의 위판을 여강서원과 병산서원에 봉안하는 문제를 두고 “일읍양원병향(一邑兩院竝享)”과 “일읍봉안(一邑奉安)”등 의견이 있었으나 주자의 예에 따라 한 고을 두 서원에 병향해도 무방하다 하여 두 서원에 병향하게 되었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이다. (출처 : 병산서원 홈페이지)
무성서원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고, 고려 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 · 송세림(宋世琳) · 정언충(鄭彦忠) · 김약묵(金若默)과 1675년(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강학 기반을 배경으로 건립된 서원이다. 황강 김계휘가 건립한 정회당과 김장생이 건립한 양성당에서 수학한 김장생의 제자들이 후에 스승을 추모하며 기리기 위하여 돈암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원 내에는 사당인 숭례사와 강당인 응도당, 정회당과 양성당, 산앙루, 장판각 등 다수의 건축물과 돈암서원의 연혁을 밝힌 원정비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그중 응도당은 고대의 가옥제도를 전범으로 하여 지은 건축물로 유명하다.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개최된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돈암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서원 9개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하였다. 당시 한국의 서원은 조선후기 교육 및 사회적 활동으로 널리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증거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았고, 각각의 서원마다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관리계획 등도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