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본 자료는 2023년 8월 21일 나주시에서 주최한 한국-프랑스 외교사 재조명 국제포럼에서 당시 (1851년) 나주목사 겸 남평현감이신 휘 정현(諱正鉉 32世, 동부승지공파)의 행적에 대하여 제1발제자인 피에르 엠마뉘엘 후 파리 7대학 교수의 발표문을 발제자의 허락을 얻어 연재하는 내용입니다.
비금도의 고래와 샴페인: 한국과 프랑스의 또 다른 첫 만남 (최종회)
드디어 샴페인과 조선의 술
몽티니 영사가 비금도에 도착한 5월1일에 현감 이정현과 수군우후 최홍현, 그리고 하급관료 여러 명을 만났다. 후자들은 이국인 앞에서 스스로를 '상관(上官)'이라고 지칭했다. 맥도날드의 신문기사에 의하면 이정현은 그날 몽티니 영사 일행에게 만찬을 마련해 주었다
초가집 앞 열린 마당에서 우리를 위해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우리의 가난한 제주 장군[즉 목사 이현공]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음식이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요리 중의 하나는 품질이 좋은 송아지 고기를 잘게 썰어 맛있는 식초에 찍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하인들이 우리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외부인들의 출입을 단속했고, 마을의 여자들은 낯선 사람들을 보기 위해 옆 제방 뒤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국인 중 한 명이 쳐다보면 여자들은 오리처럼 제방 아래로 머리를 내렸습니다. 그들의 외모는 결코 위험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1)
그러나 몽티니 영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5월1일에 '선원의 구조'와 이정현의 문정만 있었을 뿐이다. 몽티니가 이정현에게 그 다음날 점심에 나르발호의 표착지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시 말해 육지가 아니라 몽티니가 타고 온 로차에서 재회했다. 몽티니는 다음과 같이 그 만남과 점심 만찬을 묘사한다
“섬의 우두머리[즉 이정현]와 네 명의 다른 고관들[즉 최홍현과 만호(萬戶) 두세 명], 그리고 많은 비서 녹사(錄事)나 향리]들과 하인들이 세 발의 대포로 경례를 받은 후 승선했습니다. 제가 로차 뒤쪽에 설치된 텐트에서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시간 동안 저는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여러 종류의 와인, 샴페인 그리고 독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조선 사람처럼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들은 와인, 특히 증류주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습니다. 상관(上官)들은 스스로 취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하인들에게도 술을 주었습니다.2)
만찬을 마친 후, 몽티니가 이정현, 최홍현, 그리고 만호들을 선실(船室)로 데려가 포경선원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만찬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동안 승선한 나머지 조선 사람들은 로차에 있던 50여 명의 선원을 대접했다. 즉 각자 음식이 차려진 작은 테이블(소반) 앞에 앉았고, 그 사이로 조선 사람들이 '항아리'(cruche, 즉 옹기병)에 든 술을 잔에 따라주었다. 몽티니 영사가 그 몇 시간 동안을 '그림 같은 만찬' (repas pittoresque)으로 기록하고, 조선 사람들의 정(情)을 마침내 인정했다.
상기의 기록을 보면 몽티니 영사가 상하이를 떠났을 때 로차에 수십병의 고급술이 실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에서 머물 때도 이현공 목사에게 '유리병 16개(琉璃甁十六箇)'를 선물로 주었다..'술병'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술이 분명했다. 몽티니 영사가 술을 실은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류는 외교 예절에서 불가결한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몽티니 영사가 조선 사람을 접할 때 술자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우리한테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술을 가져다 주니까 서로 말이 통하며 일이 잘 풀렸다'는 수 많은 기록이 있다. 비금도에서 현지 관료들은 몽티니 영사가 조선과 통상 요구를 하거나 선교를 하러 온 게 아니고,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 더 쉽게 대화하게 되었을 것이다. 몽티니 영사가 가져온 프랑스 술병은 보존되지 않았다.
반면에 몽티니 영사는 비금도에서 선물로 받은 갈색 옹기 주병(酒甁) 3개를 본국으로 가져갔다. 몽티니는 그 술병들을 1856년에 세브르 국립 도자기 박물관에 기증했다. 본인은 2015년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관련 전시회에서 우연히 옹기주병 2개를 발견했다. 그리고 금년 7월11일, 목포대 사학과 정재현 교수와 함께 박물관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나머지 한 병을 더 발견했다.
나가는 말: 나르발호의 역사적 의미
과연 비금도에서의 첫 만남이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르발호 사건은 프랑스와 조선이 수교를 맺기도 전, 한 서양 외교관이 조선 땅에 처음으로 방문했던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이전에도 조선 땅에 들어간 프랑스인은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비밀리에 입국했었고, 프랑스 해군장교도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 적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는 몽티니 영사가 처음이다. 특히 몽티니 영사가 전라도 현지 관료를 만남으로써 공식적으로 양국의 관료가 만나게 된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을 주로 선교사 박해 아니면 병인양요 같은 갈등이나 충돌로 생각한다. 그래서 한불 관계의 첫 만남이 갈등으로 시작됐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사실은 비금도 포경선의 표류사건을 통해 한불 관계의 시작은 갈등보다는 인도주의적인 만남이었고, 음식과 술이 있는 문화교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르발호 사건이 전쟁이나 박해 같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화합의 자리로 끝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비금도에서 '우호적 만남'과 '화려한 송별파티'가 있었지만 그 시야는 사실 한계가 있다. 프랑스 사람이든 조선 사람이든 19세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우월감과 타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다.
조선 사람에 대한 불신을 가진 몽티니가 여러 번 현지 관료들은 협박했다. 또한 몽티니가 상하이에 돌아가 도처에 '조선에 간 영웅'그리고 '조선을 개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으로 자신을 묘사했다.
게다가 몽티니는 1851년 이후, 당시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와 외무장관에게 해마다 프랑스와 조선이 수교를 맺어야 한다고 보고서를 보냈다. 프랑스 포경선원과 선교사들의 안전을 위해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철종(1849~1863) 때 천주교 탄압이 완화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선교사의 박해는 더 이상 조선 개항의 필요성을 뒷받침할 핑계가 될 수 없었다. 대신 나르발호 사건으로 조선 개항의 새로운 경제적·책략적 원인이 생긴 셈이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조선의 천연 자원과 물적 자원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통상 요구를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 하에 한반도 연안의 고래는 조선 왕국 개항의 유일한 경제적 이유가 되었다. 또한 포 김선원의 안전과 물자 공급을 위해 한반도에 다수 기차 항구가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조선 왕국 개항의 책략적 원인이 되었다.
만약 한반도 서해에 기착 항구가 생긴다면 청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에 더 쉽게 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고 동해에 기착 항구가 있다면 프랑스 해군과 대적한 러시아의 남하 진출을 견제할 수 있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조선과 수교협상을 해야 한다는 몽티니 영사의 요구를 계속 무시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나 외무부 장관에게 한반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일본, 그리고 베트남의 개항이었다. <끝>
1) "An entertainment was soon spread out for us in the open yard in front of the cottage, and was served up in a much more inviting way than that of our poor Quelpart General. One favourite dish was veal of excellent quality, cut into small slices and eaten with vinegar, which was also good. Numerous servants kept the crowd back, SO as not to inconvenience us, and the women of the village took up positions behind the neighbouring dykes, so as to command a view of the strangers, but did any one of the latter look round, then down went their heads out of sight like ducks. Their personal appearance however as far as we could perceive seemed by no means dangerous.“
2) “Le Chef principal de l'île et quatre autres mandarins supérieurs, avec une foule de secrétaires d'officiers et de domestiques, vinrent à bord, après les avoir fait saluer de trois coups de canon, je les reçus sous une tente dressée à l'arrière de la Lorcha. Là pendant plusieurs heures, je les fis manger et s'abreuver de différentes sortes devins, de champagne et de liqueurs fortes; il est rare de voir des hommes boire comme les Coréens ; ils sont passionnés pour les vins et surtout les spiritueux; nos sangouans non contents de prendre pour eux-mémes, donnaient encore à leurs domestiques."
출처: 용인이씨종보 제154호 2025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