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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齋의 學問과 아름다운 삶
- 자연사랑에서 얻은 호기심으로 창의성과 창조성의 배양 -
도 명 기 명예교수(자연과학대학 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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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마을에서 태어난 몸은 와룡산(299.6m)정기를 받아,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전자 속에서 사물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그 의문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에서 창의성과 창조성을 배양하여, 사회현실과 학문연구에 참가하였을 때, 주어진 일에 대한 아름다운 성과를 얻게 되었던 동기에 대하여 적어보게 되었다.
- 본문 -
초등학교(1945~1950)시절에는 공부하는 방법과 인간관계에 필요한 ‘사랑과 진실성’의 아름다움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선생님에게 참 교육을 받았던 같다.
태어난 환경은 와룡산(299.6m)밑 다랑이 농촌마을로, 12대조 낙음공(諱都慶兪1597~1637) 선조를 배향한 병암서원이 있어, 낙음공파(洛陰公派) 후손들 70여호가 오손도손 살아온 山水 아름다운 고을로 자리 매김하였음을 실감하며 자라 왔고, 어릴 때 천자문을 읽는 아름다운 서당을 가끔 떠 올리면서, 함께 하였던 초등학교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자연 사랑을 함께 하면서, 어릴 때 습관은 병암골에서 졸졸 흐르는 옹달샘의 상선약수(上善若水)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였으니, 초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 오면서, 소학에 나오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올바로 실천하며 사람다운 인성교육을 올바르게 체험하였던 같다.
당시의 사회 환경은 일제강점기의 악랄한 환경이라 식단문화에서, 먹 걸이는 사람다운 대우를 받을 수 없었으며,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여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의 힘으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였으니, 중국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국민들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는 이념대립으로, 좌우(左右)분열이 심화되어 사회 혼란을 가져왔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으로 1946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0일 폭동사건을 일으켜 많은 선량한 국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고, 계속하여 이념대립은 치열하였으나,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되어 초대 이승만대통령으로 통치하게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나라의 혼란은 가중되어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중국의 사주를 받아 북한군의 침입으로 6.25사변을 당하여, UN군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1953년까지 치열한 전쟁 속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상태로 현재까지 지속된 상태로 있게 되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하였을 때, 학교교육에서는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자라온 환경이 어릴 때 서당문화에서 선현들의 말씀에 배워야 한다는 올바른 인성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사회적 위치에서 보람된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부모님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게 되었다.
중학교(1951~1954)진학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떨어지고, 더욱 힘을 길러 6.25사변 중에 대륜중학교를 다니게 된 행운을 얻게 되어, 고향 서촌에서 대봉동 대백프라자 근처까지 장거리(왕복 30km)통학하게 되었던 일로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사고력을 길렀던 사실’은 마음속의 사물의 호기심을 더욱 알차게 살려오며, 인내와 용기를 바탕으로 한 창의성과 창조성을 더욱 배양하게 되었다.
‘호기심과 창의성’을 함축하게 되었던 경험은 교육자인 동시에, 교수로 자리 매김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던 결과로 생각하며, 부모님에게 받은 정신적 도움과 함께 하였으니, 제자들이나, 자식들에게 항상 큰 교훈으로 남겨두게 되었다.
고등학교(1954~1957)시절에는 중학교시절 장거리통학에서 체험한 사고(思考)의 건전성과 인내력(忍耐力)은 학문의 길로 매진함에 있어서, ‘호기심과 창의성’에 더욱 알찬 창조력을 가슴에 심어오게 되었고 이러한 성과로 주어진 모든 일에 긍정으로 살아왔더니, 어려운 일도 당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어, 선생님들에게 찬사와 사랑을 받아가며 공부하였던 일 들이 하나씩 축적되어 왔던 같았다.
그러한 경험을 더욱 숙성시키기 위해 같은 울타리의 대륜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집안 조카들과 함께 자치를 중동과 대봉동근처에서 3년 동안 함께 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50사단이 들어와 농토는 징발되어, 가정살림에는 큰 변화를 일으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나, 학업과정의 마지막 마라톤 결승점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마음 다짐 속에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렸더니,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2학년 때는 우열반(2학년 5반)에서 독일어 담당이신 담임 선생님을 잘 만나 성적의 향상을 올리게 되었으며, 3학년 때는 6,25사변 중에 월남하신 담 임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대학진학에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고, 김일성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신분이라, 6.25사변 전까지는 북한의 과학기술 발달이 상당하였던 수준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가며 공부할 수 있기도 하였다.
대학진학에서는 담임 선생님의 진학지도를 받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호기심과 책임감’에 맞는 나의 성격과 취미에 맞는 전공이라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대학교수이면서 과학자로 살아오게 된 인생의 초석을 다짐하게 되었다.
대학교(1957~1961)때는 고등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에게 받았던 사랑으로 화학에 관심을 갖고, 6.25사변 중에 폐허된 사회 환경 속에 먹고 살기에는 힘든 상항이었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남아야 되겠다는 집념 속에 열심히 노력하고, 주어진 일에 긍정으로 노력하였더니, ‘호기심에서 창의성 사고’는 더욱 힘차게 살아남아, 여러 가지 학문적 성과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북대학교가 전국대학 중에 상위권에 있어 가정형편상 서울까지 진학할 수 는 없는 상태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에 진학하여 화학을 전공하였으니, 공장에 취직 할 수도 있었으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같았다.
대학 재학 중에는 실험을 통한 과학기술에 호기심이 많아, 2학년 때 대학 홍보차원에 따라 과학관에서 물을 정화하는 실험을 하게 되어, 호기심은 더욱 알차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과학실험 활동이 과학자로 생활할 수 있는 초석으로 작용하였기도 하였다.
군 생활(1961.8~1962.11월) 전 1961년 1월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3월에 대학을 졸업하여. 부산에서 교사발령 받아 지내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무조건 군 미필자는 군에 가야 하는 제도에 따라, 강원도 양구에서 포병으로 근무하였던 생활이 삶의 방식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군 생활이란 민첩한 행동이 필요하니, 훈련이 많아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고향 와룡산에서 소치는 목동생활과 학교 다닐 때 장거리통학에서 경험한 지구력과 인내심, 그리고 걸으면서 사고력 함양에 얻은 지식은 군 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교사생활(1963~1969)은 군에 제대한 후에, 대륜중고등하교로 자리를 옮겨 후배들에게 부끄럽지도 않고, 제자들에게 스승다운 교사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집념 하에 노력하였던 그 진의를 알게 되었던지, ‘호기심과 창의성’은 더욱 알차게 숨을 쉬어 하는 일마다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대륜중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모교인지라 학생들에게 부끄러운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아래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생활하고, 진학반 지도에서도 최선을 다하였으며, 특히 특별활동 시간에 가졌던 모형항공기 및 드론 실험은 호기심에서 우러난 창조력 사고를 활성화시켜, 학생들과 함께 활동하였던 경험은 삶의 여러 가치에 큰 보람을 갖기도 하였다.
후배학생들에게 무엇인가 보람된 흔적을 남겨두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모교에서 6년 동안 학생으로 있다가, 교사로서 6년간을 근무하게 된 행운을 함께 얻었으니, 선배의 발자취가 부끄럽지 않는 행동으로 남겨두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학문과 연구에 관심이 더욱 많아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대학원을 진학하여 졸업하게 되었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고사를 가슴에 담아 생활하였더니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학으로 옮겨 생활하게 된 영광스러운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대학교수(1969~2003)시절에는 교수다운 교수가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 다짐과 연구력을 더욱 향상시켜야 하겠다는 신념 속에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내외적으로 경제적이나 심적으로 도와주는 분이 많아 감사함을 항상 버릴 수가 없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학교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경제적 여건상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는 연구용 기계나, 시약은 고등학교보다도 못한 형편이라 가정형편은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집사람(蘭史 尹志好女史)의 너그러운 배려 하에 용기를 내어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장학금이 문제였기에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일본 문부성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1972년 4월에 일본 비행기(JAL)에 몸을 실고 김포공항에서 하네다공항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동경에서 일본 생활에 필요한 예비 교육을 동경 유학생회관에서 1주일 받고, 일본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마쯔시마(松島)관광지가 있는 미야기겐(宮城縣) 센다이시(仙臺市) 동북대학(제3帝國大學)에서 1972년 4월에서 1974년 9월까지 연구 활동을 수행하여 어려운 고지를 점령하고,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는 영광의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때의 마음에는 1945년 4월 1일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일본이란 어떠한 나라였기에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말 구루마의 말이 저렇게 살이 쪄 번들번들한가 생각하면서 옛 말씀에 범을 잡으려면 범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고사를 생각하며, 일본에 유학을 왔으니 일본 사람에게 인정을 못 받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에 최선을 다하여, 실험과 연구에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어릴 때 경험한 인내 속에 호기심을 살려가며,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신념을 가슴에 담아 묵묵히 앞만 보고 노력하였더니, 지도교수의 알찬 지도와 타 교수의 학력시험에 통과하여, 2년 6개월 만에 理學博士學位를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고향에서는 외국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되었고, 정교수도 처음이라 학문의 길에 들어섰으니, 故事에 나오는 서자여사부주야불사(逝者如斯夫晝夜不舍)라는 의미를 깊히 인식하고 열심히 달려오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힘을 받아 계속하여, 공동연구 및 강의로 다시 1979년 4월~1980년 1월까지 나고야대학 화학과에 객원교수로 대학원 학생을 지도하였으며, 그리고 1988년 4월~1989년 1월까지는 동경공업대학 자원화학연구소에서도 초빙교수로 대학원 학생을 지도하였고, 연구한 내용은 미국 화학회지에 투고되기도 하였던 영광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꿈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행복한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그러한 알찬 열매의 성과로, 미국 와싱톤대학 화학과에 교환교수로 1개월 공동연구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움에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중국 난징대학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움에 공동대표로 활동을 하여, 논문을 발표하였고, 또한 일본 북해도대학 화학과에 교환교수로 1개월 파견되기도 하여, ‘지구촌은 넓고 할일이 많다’고 하였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고록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만이 좋아하는 학문연구의 활동에 열심히 달려오다 보니, 가족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부모님으로 부터 받은 유전자인 호기심을 살려, 창의성과 창조성에 대한 활성화’로, 교사로서, 또는 외국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아 교수로서 30여년 간 과학세계에서 몸 담아 행복한 생활은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입국’이란 슬로건에 함께 동참하였던 결과라 항상 감사하게 살아오게 되었다.
여기에 관련하여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창의성’은 일의 사명감에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사실로, 1923년 5월 27일 독일에서 출생하여. 1923~1943년 동안에는 독일에서 생활하였고, 그 후 1943년 이후로는 미국에서 생활하며, 미 국무장관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미국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20223년 5월 27일로 100세를 맞아,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가 25일 워싱턴포스트에 아버지의 건강 비결을 공개하였기에 관심 있는 뉴스라, 역시 헨리 키신저가 여전히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유지할 수 있는 원인은 아들이 설명하기에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curiosity)과 사명감(sence of mission), 그리고 열정을 꼽았다는 뉴스에 공감하기도 하였다.
2003년 2월에 정년퇴직을 하고 난 후, 과학자다운 생활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남겨두었다고 생각되었지만, 사람다운 도덕심을 갖추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되어 경전(經典)과 경서(經書)에 매력을 느껴 대구향교에서 유학에 심취하여 공부하였던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중심으로 한 “과학자의 유학사랑”이란 자서전을 엮기도 하였다.
과학자로 50여년 활동하다가, 좀 더 사람다움의 삶에 소홀한 점이 없었나 반성하며, 퇴직 후에는 유학에 관심을 가져 經書를 읽으면서, 그동안 자신의 삶에서 반성을 하여야 될 일이 많음을 느끼면서, 사람다움에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마음으로 남은여생을 살아가리라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생활사를 적어보면서, 나는 교사로서, 또는 교수로서 연구 활동을 올바르게 하게 된 동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입국이란 슬로건 아래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길은 ‘과학기술’이라는 정책아래 같은 배를 타고 달려왔다고 생각된다. 특히 마지막으로 論語에 나오는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라는 고사는 그 의미하는 바가 수천 번 새겨가며 읽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리라 생각하고, 또한 맹자진심상편(孟子盡心上篇)에 나오는 孟子曰 君子有三樂이란 단락에서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에 왕 노릇 함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다(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고 하였고, 첫 번째 즐거움(一樂也)은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사건이 없는 것(父母俱存)·(兄弟無故)이라 하였고, 두 번째 즐거움(二樂也))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 인간에 부끄럽지 않은 것(仰不傀於天· 俯不怍於人)이라 하였으며, 세 번째 즐거움(三樂也)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而敎育之)이라는 고사를 생각하며, 두 번째 즐거움에는 스스로 반성할 점이 많다고 생각하며, 세 번째 즐거움에서도 영재를 받아 어느 정도 영재교육은 하였다고 생각되지만 부족한 점에서 많은 후회를 하기도 하였다. (202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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