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계 문화유산 조선왕조 융릉, 건릉 이야기입니다.
융릉과 건릉은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에 있습니다.
융릉은 조선 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 홍씨의 합장릉이고,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합장릉입니다.
주차장은 버스전용 주차장과 공용주차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국어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10시, 14시에 해설이 있습니다.
융릉의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고 수라간은 없습니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이고, 또 한 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입니다.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정조의 명으로 특별히 격을 높여 조성하여 면석은 인조의 장릉형태를 따라 모란을, 인석에는 연꽃을 조각한 것이 독특합니다.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 게 특이합니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뒤지에 갇힌 사도세자가 답답하지 않게 정자각이 가리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봉분의 축이 동쪽으로 치우쳐 수복방의 위치가 능상의 남쪽 조망을 가로막을 우려가 제기되어, 정조가 수복방을 수라간과 같은 서편에 나란히 세우도록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복구되어 있는 것은 수라간이 아니고 수복방입니다.
홍살문의 왼쪽에는 여의주 모양을 한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가 있는데, 이곳의 형국이 등천하지 못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세로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융릉의 역사
수은묘 à 영우 à 융릉
묘, 원, 릉의 명칭을 모두 가진 유일한 능입니다.
1762년에 장조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이라 하였습니다. 1789년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이라 하였습니다. 1815년에 헌경황후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고,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습니다.
장조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세 때인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와의 불화로 병을 얻었고, 노론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등 문제가 거듭된 끝에 1762년 왕세자의 신분에서 폐위되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조는 아들의 왕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칭호를 올렸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었다가 곧이어 다시 황제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조라 하였습니다.
장조를 생각하면 한없이 애닯고 가슴 저밉니다.
누구 하나 사도세자 편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계모도 부인도 처가 식구들도~
한결같이 노론파여서 개혁적 소론파에 가깝던 세자를 전부다 적으로 여겼습니다.
사도세자는 광증이 심했는데 이는 영조의 일관성 없는 변덕과 심하게 강압적인 교육, 노론파인 계비 정순왕후와 처가의 모함이 정신병을 심화시켰습니다.
더군다나 정조를 죄인의 자식으로 둘 수 없다고, 영조의 맏아들로 정빈 이씨 소생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버렸습니다.
사도세자를 2번이나 죽인 냉혹한 처사였습니다.
헌경황후 홍씨는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 왕세자빈에 책봉되었습니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에 봉해졌고,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혜경궁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회고록인 『한중록』을 직접 쓰기도 하였습니다.
1815년 창경궁에서 81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가 곧이어 황후로 추존되었습니다.
다.
우리가 한중록의 저자로, 비련의 여인으로 알고 있지만, 여기 한중록의 한은 한자로 원통할 한이 아니고 한가한 뜻의 한입니다.
총 4편인데 1편은 회갑해에 쓰였고, 3편은 손자인 순조 때에 한가한 날에 쓴 책으로 주로 친정을 옹호하는 내용입니다.
소론이었던 남편의 참혹한 죽음보다도 노론이었던 친정의 명예회복을 손자가 해 주길 바라고 썼다고 합니다.
「한중록」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집니다.
또 한 명의 여인,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영조에게 직접 자식을 죽일 것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마음의 부담을 덜고 자식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세자를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안위와 세손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겠지 만,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까?
사도세자의 3년 상 마지막 제를 지내고 며칠 만에 죽었습니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합장릉입니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습니다.
현륭원의 제도를 전례로 삼아 정자각 서편 앞쪽에 수라간과 수복방을 나란히 위치시켰으나 현재 수복방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봉분의 축은 융릉과 마찬가지로 동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연지인 천년지(千年池)는 융릉의 곤신지가 원형인 것과 달리 일반적인 방지원도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으나 관람할 수 있는 길은 막혀 있습니다.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장조의 현륭원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으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건릉 불길론이 있었고, 1821년에 효의황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 천장이 결정되어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면서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정조는 추존 장조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습니다. 1759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762년에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였습니다. 1775년 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라 먼저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으며, 1800년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인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조는 애주가 이셨는데 영조시대 가혹한 금주령에서 애주가 임금님이 왕위에 올랐으니 술꾼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 붓 담는 필통에 술을 가득 담아 신하들에게 먹였는데 술이 약한 신하들이 고역을 치른 적도 많았고, 상스러운 말씀도 직설적으로 잘 하신 인간적인 임금이셨다고 합니다.
효의황후 김씨는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영조 38)에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었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 김씨와 헌경황후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를 올렸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속에 지통으로 남아 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하였고, 1820년에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고 합니다.
1821년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효의황후는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덕망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찌 속마음까지 편했을까?
왕실 대를 잇지 못하는 중압감에 심지어 상상임신까지 했다고 실록에 전합니다. 대를 잇는다고 정식 간택 후궁도 여러 명~심지어 정조등극에 일등공신인 홍국영이 자기여동생 원빈이 죽자, 효의왕후가 죽였다고 의심해서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다 실패한 사건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