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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천황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존재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그것이 존재다. 정지한 것이 외부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나란하면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존재의 본래 모습은 움직임이다. 정지한 것은 움직임이 계에 갇혀 은폐된 것이다.
세상은 변화다. 변화는 움직임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우주 안에 없다. 보이지 않게 내부에서 움직이거나 혹은 외부에 드러나게 움직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움직이는 것은 간섭되어 질서를 만든다. 우리는 그 간섭을 조절하여 객체를 통제할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정지한 것을 외부에서 작용하여 움직이게 한다면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속일 수 없다. 정지한 말을 건드려서 달리게 만들 수 있지만 이미 잘 달리고 있는 말을 건드려서 더 잘 달리게 만들 수 없다.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낮춰 속일 수 있으나 높여서 속일 수 없다.
진리가 진리인 이유는 인간이 진리를 믿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지한 것은 감추는 것이 있지만 움직이는 것은 감추는 것이 없다. 정지한 것은 믿을 수 없지만 움직이는 것은 믿을 수 있다. 움직여보면 드러난다. 정지한 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바꾸어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다.
진리는 움직이는 것의 진리다. 움직이는 것은 이치를 따르므로 낱낱이 검증할 수 있다. 모든 흥하는 것은 이유가 있고 망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흥해도 움직여서 흥하고 망해도 움직여서 망한다. 움직임을 격발하는 원인을 찾아서 대응할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믿고 의지할 수 있다.
존재의 설계도
구조론은 존재의 설계도다.
건물을 지으려면 벽돌과 모르타르가 필요하다.
존재는 건축재를 어떻게 조달하는가?
존재는 궁극적으로 유체다.
유체의 움직임은 질서가 있다.
움직이는 것을 계에 가두면 간섭한다.
자동차가 주행 중에 후진을 못 하는 것과 같다.
유체는 압력을 이루고 간섭을 피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유체는 계를 이루고 내부 원인에 의한 자발적 변화를 일으킨다.
유체의 자발성이 존재의 건축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우주는 유체의 간섭과 압력으로 모두 설명된다.
간섭이 벽돌이라면 압력이 모르타르다.
우리는 강체의 논리 하나만 알고 있다.
강체는 외력의 작용에 의해 두 방향으로 움직인다.
유체는 내부에서 자체 원인에 의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강체는 외부 작용에 의해 움직이고 유체는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강체는 질서가 없고 유체는 질서가 있다.
우리는 존재 내부에 개입하여 질서를 조절할 수 있다.
강체는 외부에서 작용하여 조절할 수 있지만 비용이 든다.
유체는 내부구조를 조절하여 비용 없이 저절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자연은 유체의 자발성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므로 자연스럽다.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은 유체다.
강체는 겉보기 형태이고 내부의 의사결정은 유체다.
물체는 인간의 관측방식이고 존재의 바탕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계에 가두어져 압력을 형성한 유체의 모습이다.
유체의 자발성이야말로 인간의 지식이 도달해야 할 세상의 본질이다.
유체의 관점으로 갈아탈 때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을 뜬다.
무지의 지
인간은
구조를 모른다.
사건을 모른다.
에너지를 모른다.
변화를 모른다.
메커니즘을 모른다.
체계를 모른다.
의사결정 원리를 모른다.
생각하는 방법을 모른다.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도무지 기본이 안 되어 있다.
인간의 뇌는 외부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그것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다.
객체 내부로 쳐들어가서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인간은 모른다.
인간의 방식으로는 외부에 전시된 것만 알 수 있다.
전모를 보려면 존재 내부로 쳐들어가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막을 봐야 한다.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사건의 도입부를 모른다.
그 부분에 대한 논리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의 부재를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그것의 부재를 느끼는 밸런스 감각도 없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도 모른다.
사건의 연결방식을 모르고, 에너지의 접근경로를 모르고, 일의 우선순위를 모른다.
개별적인 사실은 아는데 공통되는 보편원리를 모른다.
결과 측은 아는데 원인 측을 모른다.
출력 측은 아는데 입력 측을 모른다.
물질은 아는데 성질을 모른다.
사물은 아는데 사건을 모른다.
형태는 아는데 기능을 모른다.
하드웨어는 아는데 소프트웨어를 모른다.
드러난 껍데기는 아는데 감추어진 내부를 모른다.
닫힌계를 모르고, 조절장치를 모르고 방향성을 모른다.
의사결정구조를 모른다.
상호작용을 모른다.
우기는 사람은 많고 승복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은 몰라도 상대방이 모른다는 사실은 알기 때문이다.
룰이 합의되어 있지 않으므로 상대방이 알아도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룰의 합의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코끼리의 팔과 다리를 만지려고 할 뿐 몸통은 쳐다보지 않는다.
몸통을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의 최초 출발점을 찍는 문제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여 기초부터 하나씩 빌드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문제다.
수학을 하려면 숫자가 필요하듯이 구조의 언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무지의 지가 필요하다.
좀 알아야 한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세계는 좁아졌고 압력은 증가했고 위험은 커졌다.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독하게 달려들지 않으면 안 된다.
파천황의 파격
미증유의, 전대미문의, 공전절후의, 전인미답의, 전무후무의, 파천황의 파격이라야 한다. 인류문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게 하는 문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는 것을 머리에서 전부 지우고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자연은 연결한다. 생각은 자연을 복제한다. 그것은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연결하므로 기술이 필요하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진짜가 아니다. 기초부터 하나씩 쌓아 올려 마침내 목표에 도달하여 자연의 원본과 일치하는 경로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복제되고 공유된다.
수준을 높여야 한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여 저절로 생각나는 시대에서 도구를 써서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시대로, 지식을 학습하는 시대에서 그 지식을 찾아가는 경로를 복제하는 시대로 바꾸어야 한다. 보이는 것을 보는 시대와 결별하고 도구를 써서 방법적으로 보는 시대로 갈아타야 한다. 수동문명에서 능동문명으로 갈아타고, 귀납문명에서 연역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누군가는 처음으로 소실점을 봤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화음을 들었다. 그것은 객체 내부에 숨은 질서다. 보려고 해서 본 것이고 들으려고 해서 들은 것이다. 우리는 생각의 소실점을 봐야 한다. 모든 생각을 복제하는 원본 생각을 찾아야 한다.
형태를 보되 기능을 보지 못하고, 소리를 듣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메신저를 보되 메시지를 받지 못하고, 육체를 보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하드웨어를 보되 소프트웨어를 다루지 못한다. 객체 내부에 숨은 의사결정구조를 모른다. 인간은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외부 작용에 의한 변화를 볼 뿐 닫힌계 내부 상호작용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를 보지 못한다. 내부에서 작동하는 압력과 간섭의 밸런스를 보지 못한다. 시스템의 조절장치를 보는 눈을 얻어야 비로소 무언가를 본 것이다.
최종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힘이다. 이기는 힘을 조직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다.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임의 주최측으로 올라서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에너지 전달경로를 장악하고 입력과 출력을 조절하지 않으면 알아도 아는게 아니다. 조금 알아놓고 다 인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인류는 아직 반환점을 찍지 못했다. 칼이 없으면 무사가 아니고 총이 없으면 군인이 아니고 지식의 핸들을 잡지 못하면 지식인이 아니다. 구조 속에 감추어진 의사결정원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원자가 하드웨어라면 구조는 소프트웨어다. 존재의 소프트웨어를 건드리면 세제곱으로 복잡해진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의 의사결정 플랫폼을 공유하므로 복제의 원본 하나만 정복하면 나머지는 따라온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한다.
엔트로피
엔트로피는 강력하다. 지식인이 맞는 말을 해도 귀를 틀어막고 개소리로 맞대응하는 소인배 많다. 종교와 주술과 괴력난신과 사이비와 음모론이 판을 친다. 어깃장 놓는 자들을 확실하게 보내는 논리가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빠져나갈 수 없다. 모든 빠져나가는 논리는 대칭을 이용하는데 엔트로피는 비대칭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엔트로피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엔트로피는 간섭이다. 간섭 반대는 압력이다.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는 압력에 의해 격발되고 간섭에 의해 멈춘다. 활은 활시위의 압력으로 격발되고 과녁의 간섭에 의해 멈춘다. 압력은 한 방향이고 간섭은 두 방향인 것이 다르다. 열역학은 간섭에 주목할 뿐 압력을 해명하지 않았다. 엔트로피는 에너지 출력부에 주목할 뿐 입력부를 해명하지 않는 반쪽 논리다.
지하철 출입문에서는 내리는 사람이 타는 사람을 방해한다. 출구가 입구를 막는 것이 간섭이다. 계에 압력이 걸리면 출구와 입구가 분리되어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이다. 모든 흥하는 것은 압력의 조절 덕분이고 모든 망하는 것은 간섭의 증대 때문이다. 압력과 간섭 사이에서 조절장치를 정밀하게 디자인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정의당은 민주당과 국힘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양방향으로 가므로 조절이 안 된다. 고분고분하지 않더라도 국힘당에는 절대 붙지 않는 세력이 진짜다. 뭐든 양방향으로 가는 것은 조절되지 않지만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은 조절된다.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목표에 도달할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가면서 속도를 조절하는 키를 장악해야 한다. 키는 한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에너지는 입구와 출구가 있고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있다. 압력과 간섭 사이에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이 있다. 역사 이래 인류는 에너지의 출구를 주목했을 뿐이다. 받는 자의 논리에 매몰된 수동문명이다. 주는 자의 논리를 따르는 능동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받는 자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주는 자는 조절할 수 있다는 게 다르다. 조절의 논리, 밸런스의 논리로 갈아타야 한다.
압력과 간섭
원인과 결과, 입력과 출력, 시작과 종결, 전체와 부분, 압력과 간섭이 있다. 전부 같은 말이다. 그것은 에너지가 가는 하나의 화살표에서 머리와 꼬리다. 압력의 질서와 간섭의 무질서를 둘이 아닌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너지는 압력으로 격발되고 간섭으로 멈춘다. 압력은 일방향이고 간섭은 양방향이다. 일방향은 의사결정의 효율이고 양방향은 비효율이다. 세상의 모든 원인은 압력이고 모든 결과는 간섭이다. 압력을 조절하여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작용은 반작용이 있다. 작용과 반작용이 마주 보는 것이 간섭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다. 그 반대편에 관성의 법칙이 있다. 관성의 법칙은 압력 조절의 법칙이다. 하나의 에너지 작용에서 머리와 꼬리를 본 것이다.
관성의 법칙 - 머리 쪽 압력의 힘, 효율적, 에너지 입력측
작용반작용 법칙 - 꼬리 쪽 간섭의 운동, 비효율적, 에너지 출력측
관성은 힘이다. 에너지 입력이다. 내부에 압력을 숨기고 있다. 반면 작용반작용은 운동이다. 에너지 출력이다. 작용과 반작용이 서로 발목 잡고 간섭한다. 힘이 운동에 앞선다. 압력이 간섭을 조절한다. 앞서는 것이 효율성으로 이긴다.
에너지가 한 방향이면 효율성이고 두 방향이면 비효율이다. 궁극적으로 효율성이 자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자연의 모든 변화는 효율적인 코스로 간다. 효율이 비효율을 이기는 게 의사결정이다. 비효율이면 동력이 끊어져서 망한다.
수돗물은 수원지에서 수도꼭지까지 연결되어 한 방향으로 흐른다. 수돗물은 역류하지 않으므로 수압으로 조절된다. 교도관은 죄수에게 밥을 적게 줘서 조절할 수 있다. 반대로 죄수가 교도관을 협박하는 식으로 조절을 시도하면? 망한다.
갈릴레이는 관성의 힘을 발견했고 뉴턴은 작용반작용의 운동을 설명했다. 힘은 운동을 조절하지만, 운동은 힘을 조절할 수 없다. 닫힌계와 압력과 관성은 같다. 문을 닫으면 계가 연결되어 압력이 걸리고 문을 열면 관성이 튀어나온다.
의사결정구조
존재는 겉과 속이 있다. 사물은 형태와 기능이 있고, 언어는 소리와 의미가 있고,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다. 정보는 메신저와 메시지가 있고 인간은 육체와 마음이 있다. 무엇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가 더 있다. 하나는 관측자인 인간과 연결하고 다른 하나는 내부의 자체 질서를 구성한다.
무언가 있다면 깜짝 놀란다. 내부에 무엇이 들어 있다면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한 번 놀랐을 뿐이다. 한 번 더 놀라야 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내포와 외연이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하나를 봤다면 하나를 더 볼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동안 외모를 봤다면 이제는 내면을 볼 차례다.
내포 - 내부를 구성한다.
외연 - 외부와 연결한다.
우리의 인식은 겉에 머물러 있다. 과학이 물질을 분해하지만, 속의 겉을 볼 뿐이다. 부품을 관찰할 뿐 존재의 소프트웨어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속의 속을 보지 않았다. 내부에 숨은 자체 질서를 보지 않았다. 신체를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다. 내장을 봤다고 해도 본 것이 아니다. 마음을 봐야 본 것이다.
놀라야 한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조로 봐야 한다. 충격적인 것은 그것의 부재다. 보는 방법 따위 없다. 인류는 아예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인류가 본 것은 저절로 보인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쳐들어온 것만 받아들였을 뿐이다. 외부에 전시된 것만 구경했다.
내포와 외연
소실점을 보려면 그것을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객체 내부로 쳐들어가서 능동적으로 보지 않으면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가만있어도 저절로 보이는 것은 껍데기다. 진짜는 적극적으로 건드려야 보인다. 성질을 건드려야 성질이 보인다. 성질은 성질로만 알아낼 수 있다. 인간이 먼저 성질을 부려야 한다.
구조는 존재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다. 그것은 내포된 자체의 질서다. 우리는 공간에서 에너지 전달경로를 보지 않았고, 시간에서 사건의 발생경로를 보지 않았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떼놓고 각각 봤을 뿐 연결하여 보지 않았고 작동시켜 보지 않았다. 존재가 결따라 가는 경로를 추적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지 않아도 된다는 면피 논리도 만들어 놨다. 원자론이 그것이다. 원자는 내부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부가 없으므로 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당연히 모든 존재는 내부가 있다. 그래야 반응한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야 존재다. 그 반응을 결정하는 의사결정구조를 들여다봐야 한다.
구조는 내포된 기능이다.
구조는 내포된 조절장치다.
구조는 내포된 의사결정구조다.
구조는 내포된 메커니즘이다.
구조는 내포된 차원이다.
존재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반응하려면 외력의 작용에 맞서 반작용해야 한다. 그 반작용의 시작점을 도출해야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구조가 감추어져 있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는 조절장치가 있다.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 밸런스가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구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수류탄이 터져도 안에서 터진다. 원인은 내부 기폭장치다. 밖은 타이밍을 결정할 뿐이다. 원래 터지게 되어 있는 것이 외부의 안전핀이 빠져서 하필 그때 터진 것이다. 터지는 구조가 있다. 감기에 걸린 것은 인체 내부의 면역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 감기에 걸렸는지 타이밍은 외부요인이 결정한다.
원인은 내포와 외연이 있다. 내부요인이 더 중요하다. 외부요인은 시간과 장소만 결정한다. 사건의 본질적 원인과 부수적 요인이 있다. 내포가 본질적 원인이라면 외연은 그것을 돕는 부수적 요인이다. 우리는 핵심을 놓치고 부수적인 곁다리 원인 하나만 알면 원인을 알았다고 믿는다. 객체를 조절할 수 있어야 진짜다.
우리는 눈으로 라디오를 봤고 분해조립도 해봤지만, 라디오를 틀어보지 않았다. 라디오 소리를 들어보지도 않았다. 방송국과 연결해 보지 않았다. 라디오와 상호작용하지 않았다. 고백해야 한다. 무지의 지라 할 것이다.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충격받아야 한다. 구조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성큼 들어가야 한다.
연결문제
진짜는 연결된다. 가짜는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해 보면 진위가 드러난다. 과학은 객체와 연결하는 루트를 찾아내는 것이다.
- 대칭되는 것은 가짜다.
- 발산되는 것은 가짜다.
- 순환되는 것은 가짜다.
출구가 입구를 막으면 가짜다. 대칭되는 것, 발산되는 것, 순환되는 것은 에너지의 출구가 입구를 막으므로 연결되지 않는다.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로가 파괴된다. 그런 것은 다른 것에 딸린 부속품으로 있을 수 있으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로를 추적하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두 다리는 대칭이나 골반은 비대칭이다. 골반이 없으면 갈 수 없다. 두 바퀴는 대칭이나 바퀴 축은 비대칭이다. 실제로는 바퀴 축이 가는 것이며 바퀴는 지면과의 마찰을 줄여줄 뿐이다. 대칭은 비대칭을 도출하는 절차일 뿐이다. 발산은 바퀴 축이 깨져서 두 바퀴가 따로 노는 것이다. 순환은 두 바퀴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일종의 돌려막기다.
진짜는
-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다.
- 공간과 시간의 우선순위가 맞다.
완전성의 문제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분리되고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어야 완전하다. 비로소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구조가 없으면 가짜다. 존재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세트로 있다. 모듈 단위로 있다. 갖춤이 있다. 유령이든 귀신이든 내세든 천국이든 도깨비든 모든 거짓말은 그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출력을 먼저 하고 나중에 입력할 수는 없다. 둘은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로를 다치지 않으려면 사건의 공간적 방향과 시간적 순서가 맞아야 한다. 언제라도 공간이 먼저고 시간이 다음이다. 전체가 먼저고 부분이 다음이다. 우리는 이 하나의 원리를 나침반으로 삼아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기는 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기능이다. 자연을 움직이는 것은 기세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권력이다. 그것은 이기는 힘이다. 지식의 최종결론은 이기는 힘이다. 압력이 간섭을 이긴다. 이겨서 객체를 조절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알면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지식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것은 힘이다. 산업의 힘과 지식의 힘이 필요하다. 힘은 조절된다. 조절 스위치를 장악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주는 결국 힘이다. 힘을 획득하기까지는 존재의 껍데기를 본 것이다. 껍데기는 힘을 도출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원자는 껍데기다.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를 전달하는 장치다. 원자는 구조를 연결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엔트로피는 간섭의 증대다. 반대편은 압력의 조절이다. 힘은 궁극적으로 압력이다. 압력은 방향전환이다. 회전하는 물체가 매 순간 방향을 바꾸므로 파동이 잘게 쪼개져서 압력이 발생하는 것이 모든 힘의 근원인 구심력이다.
닫힌계 안에서 밸런스의 칼로 쪼개면 유체가 되고 압력이 발생한다. 압력이 0이면 간섭된다. 간섭되면 지는 힘이다. 엔트로피는 지는 힘이다. 질이 입자를, 입자가 힘을, 힘이 운동을, 운동이 량을 쪼개서 압력을 발생시킨다.
코어가 움직이면 언밸런스다. 밸런스의 복원은 공간을 확보한다. 공간을 획득하면 압력은 0이 된다. 압력이 감소하면 간섭된다. 움직이는 것은 멈출 때까지 관성력이 작용한다. 모든 멈춘 것은 압력이 0에 도달하여 간섭된다.
간섭을 상대편에 주고 압력을 내가 가지면 이긴다. 상대편을 잘게 쪼개서 서로 발목 잡게 하면 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잘게 쪼개놓으면 유체가 되므로 다른 사건에서는 더 큰 힘이 생긴다. 게임 형태가 바뀌면 역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