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간소화 하면서도 스님들 전문성 인정한 왕실
조선 초 수륙재, 왕실 추천재보다 규모 작았으나 점차 커져 왕실, 스님들에 수륙재 공물 공양·시식 담당하도록 요청해 정식 외 추가 제공됐던 가공 폐지, 제도적으로 정착 됨 의미
왼쪽부터 ‘국조오례의 서례’ ‘흉례편’에 실려있는 ‘예찬주준도설’의 ‘습전’과 ‘우제’. 두 그림 모두 중간 부분에 ‘중박계(中朴桂)’라고 쓰인 원(그릇)이 보인다. ‘박계’는 유밀과(유과)에 속하는 과자의 이름이다.
수륙재 주요 공물 중 하나였던 유과는 조선 전기 여러 의례에서 중시된 음식이었다.
세종 2년(1420) 7월 “대비(大妃)가 별전(別殿)에서 훙(薨)하였다.” (‘세종실록』’8권, 2년 7월10일.)
임금의 모후인 원경왕후 민씨의 죽음이었다. ‘훙(薨)’이란 제후(諸侯)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자(天子) 즉 황제가 죽었을 때는 ‘붕(崩)’이라고 한다. 조선은 명목상 중국의 황제에게 사대(事大)를 취하며 스스로 제후국임을 표방했기에 왕과 왕비의 죽음을 ‘훙’으로 적었다.
원경왕후가 세상을 떴을 때 남편인 태종 이방원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임금으로 18년간나라를 다스린 뒤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상왕(上王)의 자리에 있은 지 2년이 되던 해였다.
원경왕후의 장례 절차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소상하여 당시 수륙재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조선 초 수륙재가 불교식 상제례(喪祭禮)의 형식으로 안착되며 정비되던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먼저 부고 당일 태종은 49재 즉 칠칠재를 시행하되 법석의 회[法席之會]즉 법회는 베풀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6재까지 마친 뒤에는 “내 듣자하니 왕후의 재(齋)를 올릴 때 대소 관료에서 복종(僕從)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였다더라”며 추천재를 수륙재에 합설[追薦合設水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9권, 2년 8월22일). 이 두 개의 기사는 몇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첫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불교의 49재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둘째, 본래 49재에서는 칠칠의 각 재마다 법회가 병행되었으나, 원경왕후 때부터 법회가 생략되었다. 다만 법회가 없어도 각 재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서 망자의 명복을 빌었다.
셋째, 원경왕후의 흉사(凶事) 때 추천재가 수륙재에 합설되었다.
합설(合設)은 병설(倂設)과 다르다. 이는 추천재와 수륙재를 둘 다 치렀다는 것이 아니라, 추천재라는 목적성 행사를 수륙재의 형식으로 거행했다는 뜻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합설의 배경으로 수천명의 인원 참여가 거론된 데에서 수륙재의 형식으로 추천재를 합설함으로써 그 규모를 간소화하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수륙재는 불교의 다른 재 의례에 비해 규모가 큰 편으로 남아 있으나, 적어도 조선 초에 왕실의 추천재는 당시의 수륙재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한편 여기에서 ‘칠칠재’ 또는 단순히 ‘재(齋)’, ‘재회(齋會)’라는 표현 대신
‘추천(追薦)’이라고 표현한 점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이는 지목하는 의례의 범위가 49재를 비롯한 백일재, 소상재, 대상재 등의 불교 상례(喪禮) 뿐 아니라, 매년 기일에 맞추어일종의 제례(祭禮)로서 거행하는 기신재(忌晨齋)까지 포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합설의 명령이 내려지고 얼마 안 되어 “지금 국가에서 시행하는 추천 칠재(追薦七齋)는 이미 다 수륙재(의 형식으)로 하기로 정하였으니 [旣皆以水陸詳定],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기신재도 역시 산수가 정결한 곳에서 수륙재(의 형식으)로 [以水陸行之] ”(‘세종실록’ 10권, 2년 10월1일)하도록 규정이 갖추어졌다.
이 규정은 이후 100년가량이나 지속된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선왕인 성종의 첫 번째 기일을 맞아 준비된 불교행사가 시종일관 수륙재로 표현되고 있으며, 수륙재의 형식으로치러진 기신재 또한 중종 11년(1516) 혁파될 때까지 (‘중종실록’ 25권, 11년 6월2일) 꾸준히 ‘실록’에이름을 보이며 그 존속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추천재와 합설된 수륙재의 구체적인 형식은 어떠했을까. 원경왕후의 49재를 마치고 20여일 뒤 예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규정안을 상정한다.
“지금부터 국행(國行), 대부(大夫), 사(士), 서인(庶人)의 추천(追薦)은 모두 산수 깨끗한 곳에 나아가서 수륙재를 올리게 하되, 그 차림에 속인(俗人)은 제외시키고 모두 다 승도(僧徒)를 시켜서 공궤(供饋)하게 할 것[其辦設, 除俗人, 皆令僧徒供之]입니다.
국행에는 종친 한두 명과 예조의 당상과 낭청 각 한 사람으로 모든 일을 점검하게 하며, 대부나 사, 서인은 빈소를 지키는 상주 외에는 자손 한두명만 가게 하고, 이 외의 잡인은 비록 재 올린 다음 날일지라도 참례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법석의 금지는 이미 분명한 법령이 있으나 지금부터 다시 밝혀 엄중히 금지합니다.” (‘세종실록’ 9권, 2년 9월22일.)
추천재를 수륙재의 형식으로 치르는 것이 왕실과 국가의 행사뿐 아니라 일반인에게까지 적용되는 예규였다는 점과, 법석을 금지하고 참석인원을 축소하여 재회의 규모를 간소화하고자 했던 상왕(태종)의 의지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공궤’를 ‘승도’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이다.
수륙재의 공물로는 찐밥[蒸飯], 유과(油果), 두탕(豆湯 : 흔히 두부탕국으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불분명하며 팥죽 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떡[淨餠], 면[淨麪], 과일, 꽃과 꽃병, 종이[奏紙], 면과 베 등의 천, 초와 촛대 등이제시되었으며, 그 양은 신분과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차등을 두었다.
그런데 공물에 대한 이러한 상세한 규정은 공양과 시식이야말로 추천재/수륙재의 중심 재차였음을 웅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연하게도 바로 그 일을 담당하는 전문가로서 스님들의 존재가 수륙재에서 요청되었으며, 또 그 스님들의 기능이 전문성의 영역으로서 인정되고 중시되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여기에서의 공궤란 단순히 음식과 물품의 진설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물품의 조달과 음식의 제조가 사찰에서 스님들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선왕과 선후의 기신재 주무 기관으로
각각 내자시(內資寺 :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나 내섬시(內贍寺 : 궁중에서 소용되는 술과 음식물의 공급 및 직조(織造) 등을 담당하던 관서)가 지목되기도 하였으나
(‘세종실록’ 11권, 3년 1월19일), 최소한 비용과 관리 너머의 실무 영역에서는 관원과 스님들의 공조가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수륙사(水陸社) 사찰에 지급되었던 수륙위전(水陸位田)의 존재는 애당초 수륙재를 위한 비용의 일부가 사찰 자체적으로 운용 관리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기도 한다. 또한 범패와 작법 등의 의식이 공양과 시식에 수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이처럼 수륙재에 전문가로 참여한 스님들에게는 식사가 제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존에 정식(正食) 외에 추가로 제공되기도 했던 가공(加供)은 폐지되었는데 (‘세종실록’ 9권, 2년 9월23일), 이는 역설적으로 수륙재 담당 스님들의 전문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며 제도적 시스템 안으로 정착되어 감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