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이성계의 등장과 가족 관계 이성계는 일찍 죽은 아버지 이자춘을 대신해 고려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함경도 변방 출신의 무명 장수일 뿐이었다. 젊어서부터 무술이 뛰어났던 이성계는 고려를 괴롭히던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378년(우왕 4년)에 내륙까지 침범한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이후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의 선두주자가 되어 중앙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1388년(우왕 14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해 재상인 수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성계의 형제로는 동복누나인 정화공주와 이복형 이원계, 이복동생 이화가 있다. 자녀로는 잠저 시절에 혼인한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방우, 이방과(훗날의 정종),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훗날의 태종), 이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 등 6남 2녀가 있고,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방번, 이방석, 경순공주 등 2남 1녀가 있다. 고려 말 중앙 정계는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문하시중 최영과 신흥 무인 세력을 대표하는 이성계가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권신 이인임, 임견미 등을 몰아냈다. 이들은 출신 성분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 지지층까지 상반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최영은 친원파로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의 장인이기도 했다. 반면 이성계는 동북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명나라를 지지하는 친명파로, 권문세족들에 대항하며 성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았다.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의 전력으로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전쟁에 패해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이 높았다. 설사 어렵게 승리한다고 해도 친명파인 이성계는 명분상 치명타를 입게 되어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우왕과 최영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들어 요동 정벌에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성계는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정에 나섰다. 그러나 요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벌군에게 시련이 닥쳤다. 압록강 하류의 섬인 위화도에 이르러 심한 장마를 만나 더 이상 진군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도망병이 속출했다. 마침내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했다. 왕의 명령을 어긴 회군은 명백한 반역 행위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민수도 회군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결단은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군심을 얻은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렸고, 회군 소식은 곧바로 평양에 머물러 있던 우왕과 최영에게 전해졌다. 평양에는 소수의 친위군 정도만 남아 있었을 뿐 반란군에 맞설 병력이 없었다.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후퇴했으나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의 공격을 받고 생포되었다. 우왕과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죽임당했다.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평소 존경하던 이색을 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리고, 본인은 좌시중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에 동조했던 조민수는 우시중에 올랐다. 또한 조준, 정도전 등의 친명파 신흥 세력이 조정에 대거 포진했다. 이들은 개혁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태조 이성계의 왕위 등극과 조선왕조 개국 이성계는 1392년(공양왕 4년) 7월 17일에 정비의 명과 문무백관의 추대로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조선의 태조이다. 이에 앞서 이성계는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이 국새를 가져오자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두려운 마음에 거조(행동거지)를 잃었다.”라는 표현도 나온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천명과 인심이 쏠려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소신료가 거듭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하니 마침내 그 뜻을 받아들였다. 475년을 이어 온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나이 58세였다. 새 왕조를 연 이성계는 농본주의, 숭유억불, 사대교린을 국시로 삼고, 조림을 명나라에 보내 자신의 등극을 알렸다. 또한 밀직사사 한상질을 보내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았다. 조정에서 논의된 새 국호 후보에는 이 외에도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이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과 ‘화령’중 ‘조선’을 새 국호로 정한 것이었다. 1393년(태조 2년) 1월 15일부터 고려를 버리고 새 국호 ‘조선’이 사용되었다.
조선의 새도읍지 한양과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정도전은 이성계를 설득해 명나라와 일전을 불사하려고 했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실제로 표전문을 작성했던 김약항, 노인도 등이 명나라에 잡혀가 처형당했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대해 요동 정벌로 맞서자고 했다. 이성계 역시 정도전의 요동 정벌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동 정벌 계획은 1398년(태조 7년)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제거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명나라도 정도전의 반대파인 태종이 즉위하자 1401년(태조 1년)에 국왕의 고명을 내려주었다. 이성계는 구세력의 온상인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첫 번째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륜이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계룡산이 도읍으로는 적당하지 않다며 반대를 했다. 그리고 무악을 새 도읍지로 추천했다. 그러나 태조와 함께 후보지를 둘러본 정도전과 무학이 너무 협소하다고 반대했다. 다음 후보지로는 무학이 추천한 청와대 자리가 거론되었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과 목멱,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 동향으로 궁궐을 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 터는 너무 좁고, 도읍은 자고로 남향을 하는 것이 원칙이니,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삼각산, 백악을 주산으로 하고, 안산과 낙산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 남산을 남주작으로 삼아 도읍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새 도읍지를 정했다.
1차, 2차의 왕자의 난과 태종 이방원의 왕위 등극 1400년(정종 2년), 한씨 소생의 넷째 아들 방간이 박포의 부추김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은 방원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이 후 방원은 스스로 세제가 된 데 이어 1401년(태종 1년)에 왕위에 올랐다. 정종이 물러나고 태종이 즉위하니,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태종은 개경의 수창궁에 불이 나자 이성계의 뜻을 따라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향인 함경도 지역에 머무르며 한양으로 돌아오라는 태종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함흥으로 이성계를 모시러 간 차사들이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1402년(태종 2년)에 안변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면서 이성계와 태종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표면적으로는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이성계가 버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결과는 태종의 승리였다. 조사의의 반란군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이성계는 할 수 없이 한양으로 환궁했다. 함흥에서 돌아온 이성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였
태조 이성계의 7년 통치와 승하 태종 이방원에게 백기를 든 이성계의 말년은 쓸쓸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었던 이성계는 불교에 의탁해 먼저 간 부인과 자식 들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소일했다.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에 창덕궁 별전에서 죽었다. 향년 74세였다. 새 왕조를 세운 태조는 7년이라는 길지 않은 치세 기간 동안 정도전과 함께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그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결국 창업 군주로서의 위대한 꿈은 이성계가 아닌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성혁명은 이성계가 함경도 변방 출신의 무장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고작 왕씨 출신의 왕이나 바꾸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이성계를 도와 새 왕조의 탄생을 주도한 정도전, 하륜 등 서얼 출신 인사들도 신분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성혁명에 동참한 것이었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일부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에 의해 조선의 500년 역사가 탄생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