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列外) 사병 <3편>
나는 군대 생활의 대부분을 어느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나와 같은 경우는 군대 생활을 했던 어떤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일일 것이다.
엄격한 조직을 갖춘 계급사회 속에서 남으로부터 특별한 간섭을 받지 않고, 어떤 일도 자기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 힘든 일이 있게 되면 언제나 열외가 되었고, 나의 생활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보이게 했고 또 누구도 쉽게 나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이 나와 쉽사리 친해졌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대해서 함께 신병생활을 했던 낯익은 얼굴들이 한 사람씩 군 복무를 마치고 부대를 떠났다. 그리고 그 이후에 신병으로 들어왔던 신병들도 복무 기간이 다 되어 제대를 하고 떠났지만 나는 계속해서 군대에 남아 있었다.
지원병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장기복무 사병인 나는 다른 사람들의 곱절이 넘는 기간을 한 부대에서 머물며 이제는 하사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고, 나는 부대 안에서 하사들의 고참이 되어 있었다.
부대 인근 마을의 민간인들은 나를 만나게 되면 '이 하사'라는 호칭대신 '이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나는 어디를 가도 인기가 좋았다.
그 무렵 소속 부대는 모든 대대원이 일주일간 특수훈련장에 입소를 하여 훈련을 받게 되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대부분 열외로 빠졌던 나였지만 이 훈련만은 열외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특수훈련장은 사단사령부에서 직접설치·운영하고 있었고, 훈련장에서는 입소하는 부대의 인원을 한 사람, 한 사람 철저하게 확인 점검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모든 대대원들과 함께 특수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그런데 그 특수훈련장의 훈련조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을 듣고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부대가 훈련장에 입소하게 되면 내가 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훈련조교들은 내가 입소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그들이 쳐놓은 그물에 영락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특수훈련을 받는 동안 힘들어하는 이하사의 모습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훈련조교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소속 부대가 입소를 하고 내가 나타나자 조교들의 입장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나의 이름이 너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조교들은 훈련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를 벼르던 마음들이 지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작 내가 나타나자 모두들 내 모습에 시선을 모았고, 내가 미소를 짓고 그들에게 다가가자 모두들 내가 내미는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전혀 힘들지 않은 특수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소속 부대의 대대장은 내가 훈련을 받게 되는 일이 염려스러웠는지 자주 내가 있는 훈련코스에 와서 교관들에게 힘든 훈련은 빼주라고 말했고, 교관들도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규정대로 까다롭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도리어 훈련을 받겠다고 훈련코스마다 함께 다녔지만 나에게만은 교관이나 조교들이 훈련을 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빠지라는 말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함께 훈련을 받는 병사들은 이런 일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들 나에게는 그런 일이 당연한 것처럼 인정을 했고 훈련장의 관계자들은 더욱 잘해주려고만 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다른 대대원들 마저 고되지 않게 훈련을 받을 수가 있었다.
나의 군대생활은 고달팠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어디서나 마음껏 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었고, 어떤 물건이 필요하면, 대대의 어느 중대나 보급계 사병을 불러서 주문을 했고 그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나의 요구에 금방 응해 주었다. 이런 일은 나를 부대 안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게 했다.
그러나 세월은 나를 군대생활에만 만족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내 가슴속에서는 샘솟는 젊은 힘이 마음을 흔들어 대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나의 꿈과 마음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계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군대생활이었지만 이제 군대와 세월은 나를 다시 바꾸어 놓고 있었다.
내가 평일에도 자주 외출을 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나는 외출을 나오면 자주 서울로 갔고 그때마다 군복을 입은 채 정당들의 사무실을 찾아가곤 했다. 그때 내가 자주 만났던 사람은 추풍회를 이끌고 있던 오재영씨였다.
오재영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아이는 크면 어른이 되고, 인물은 만들면 인물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에게 매우 큰 용기를 주었다. 오재영씨의 추풍회 사무실은 종로 2가에 있었고,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종로를 찾아가서 오재영씨를 만났다.
나의 방문이 잦아지자 오재영씨는 추풍회의 청년 당직자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고 나는 곧 그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오재영씨는 호걸풍의 남자였는데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그에게 정이 갔다. 그도 역시 나를 보면 항상 좋은 인상으로 대해주었다. 내가 찾아가면 외식도 함께 했고 또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만날 때는 서슴없이 나를 그 자리에 동석하게 했다.
나는 그때부터 내 자신이 점점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내가 군대에서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도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나 군대라는 것이 들어갈 때처럼 나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원병으로 입대한 직업군인이었으므로 전역을 하는 일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군대에서 규정된 기간을 복무를 하고 난 이후라야 선택이 가능했다. 나는 그런 제약을 잘 알면서도 군대를 떠나기 위한 궁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쉽사리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내가 군대를 나가는 일도 어렵지만 막상 군복을 벗고 나면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국졸인 나의 최종학력으로는 직업을 얻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시간만 나면 군대에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1968년의 봄이었다. 나는 부대에서 특별 휴가를 받았다. 그러나 막상 휴가증을 손에 쥐었지만 마땅히 가야할 곳이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서 다음날 군용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12시간 동안,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밤을 세우면서 몸은 피곤을 느꼈다. 열차는 새벽녘에 부산진 역에 도착했다.
나는 아침의 찬 공기를 마시면서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차도에는 끊임없이 차량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버스를 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스레 버스를 탔다가 너무 일찍 도착하게 되면 사람들의 잠만 깨울 것 같아서 일부러 길을 걸으며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낯익은 길을 걷다보니 지난날의 일들이 떠올랐다.
영도다리 위를 걷고 있는 중에도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나는 단칸방에서 쪼들리며 사는 형제들을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신선동에 살고 있었다. 그가 살던 집은 남의 땅 위에 지어진 단칸짜리 판잣집이었다. 형의 가족들은 언제 철거가 되어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단칸짜리 판잣집을 찾아가서 며칠간을 머물렀다. 그 동안 내가 갖고 있던 약간의 돈을 형의 가족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고향을 찾아갔다.
내가 태어났던 고향에는 두 누나가 살고 있었고 몇 명의 친척들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누나 외에 다른 친척들은 나에 대해서 대부분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가난하게 살던 두 누나의 집에서 하루씩을 지내고 난 후 고향을 떠나야 했다.
부대 안에서는 언제나 당당한 나였지만 어렵게 사는 형제들을 만나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나에게는 군대를 나오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휴가기간이 남았는데도 12시간동안 철길을 달려야 하는 군용 열차에 다시 올랐다. 오후 4시에 출발을 한 열차는 새벽 4시에 용산 역에 닿았다.
나는 또 새벽길을 혼자 걸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남산공원이었다. 나는 공원의 광장에 있던 벤치에 앉아서 해가 뜰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 지난 후 해가 뜨자 큰길로 도로 내려왔다.
나의 발길이 남대문시장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길거리의 한편에서 그릇을 들고 열심히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도 금방 시장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있던 곳으로 가까이 가보았더니 그들은 꿀꿀이죽을 먹고 있었다.
꿀꿀이죽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 형편이 어려웠던 그 시절에 미군부대의 식당에서 미군들이 먹다가 남긴 음식을 거두어 와서 끓여서 팔던 것을 말한다.
나는 그 곳에서 꿀꿀이죽 한 그릇을 사 먹고 다시 용산 쪽으로 걸었다. 남대문에서 용산의 삼각지까지는 버스를 타면 여러 정류장의 거리였지만 시간이 많은 나는 구태여 돈을 내고 버스를 탈 필요가 없었다.
나는 육군본부가 있던 삼각지까지 걸었다. 그러나 내가 왜 육군본부 쪽으로 걷고 있는지 몰랐다. 헌병들이 지키고 있던 육군본부의 정문 위병소를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왜 육군본부를 찾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시간은 오전 열시 경이었다. 큰 건물의 중앙에는 별 4개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건물 한쪽으로 여군이 한 사람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여군의 뒤를 쫓으며 여군을 불러 세웠다. 나는 여군에게 '참모총장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느냐'고 방향을 물었다. 여군은 총장실을 찾는 나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나더니 금방 참모총장실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1층의 복도를 통과하여 여군이 가르쳐주던 2층으로 올라가자 내가 찾는 참모총장실의 팻말이 문 앞에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