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맛
봄에는 여러 가지 맛이 있다. 맛은 오감을 통해 느낀다. 생명체는 각자의 감각기능을 통해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사물을 나름대로 읽고 느끼며 이에 반응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 서면 연초록의 세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달래며 냉이의 향긋한 냄새가 봄이 왔음을 알리고, 개울물 소리, 봄꽃들이 벌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 또 한 확연히 보이지 않아도 내 곁에 와 있는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따스함이요, 훈기요. 맛이다. 그중에 으뜸은 바로 맛으로 봄의 참맛이다.
입맛에도 오미가 있다.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짠맛 즉 다섯 가지 맛이다. 어떤 음식이라도 다섯 가지 맛을 담고 있으나 그 음식이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맛에 따라 달다 쓰다 시다로 구분할 뿐이다. 계절에 맛이란 이름을 달아본다. 여름은 쓴맛이라면 가을은 신맛이요 매운맛이다. 그리고 겨울이 짠맛이라면 봄은 단맛이다. 다섯 가지 맛 중에 그래도 단맛이 으뜸이다. 즐겁고 행복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만큼 좋다는 것이 아닐까?
봄이 되면 나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추억이 있다. 중학교 시절이다. 옆에 짝꿍은 안동 시내에서 철공소를 경영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이 친구에게 반찬 하나를 얻어먹으려고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의 도시락엔 향상 기름기는 도는 계란 프라이가 들어 있었고 따로 준비한 반찬통에는 고기와 멸치는 기본이었다. 간혹 파란 시금치가 있었는데 그 맛이 그렇게 좋았다. 하지만 나의 도시락 반찬은 고추장에 무나 마늘을 넣어 삭인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니 친구의 반찬을 보면 귀족을 넘어 황족처럼 보였다. 어린 나이지만 집안 살림을 대충 아는 터라 고기반찬은 언감생심이고 파란 나물 반찬이라도 넣어 달라고 졸랐다. 그런데 그 시절 우리 집 수준에 시금치를 반찬으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던 때다. 어느 봄날 어머니는 파란 나물 반찬을 넣었다며 도시락을 건네주셨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친구의 나물과 빛깔도 다르고 맛도 달랐다. 내 도시락 반찬은 산나물 반찬이었다. 어릴 적 입맛에 산나물은 향도 좋지 않고 빛깔도 그랬다. 그때부터 불혹을 넘을 때까지 산나물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쉰을 넘기고부터는 그 싫던 산나물이 봄이 되면 먹고 싶었고, 먹으면서 깊은 향에 스스로 빠져가고 있었다. 나이에 따라 음식의 취향도 바뀌고 있음을 이 봄에 다시 느낀다.
토요일 시골 텃밭에서 상추 등 씨앗을 파종하고 고추와 들깨 등 몇 가지 모종을 심었다. 여름을 풍성하게 해줄 채소들이다. 눈을 돌리니 텃밭 가장자리에서 봄볕에 익어가는 것들이 선뜻 잡혀 온다. 봄 채소다. 노지에서 꿋꿋하게 겨울을 딛고 자란 것들이다. 봄을 피워 올린 파란 시금치와 쪽파, 부지깽이나물이다. 각각 몇 움큼씩 뜯어 비닐봉지에 고이 담아 개선장군처럼 아내에게 전했다. 아내는 미소로 봄나물을 받아 끓은 물에 살짝 데치더니, 적당한 간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뿍 넣고 무쳐 식탁에 올려준다. 콩가루를 묻혀 찐 파란 쪽파 무침. 찬바람을 이기고 푸르게 봄을 피워 올린 시금치, 그리고 나무도 풀도 아닌 다년생의 식물로 잎을 제공해주는 부지깽이나물이 봄 식탁을 풍성하게 해준다. 젓가락을 든 얼굴에 미소가 봄빛만큼이나 싱그럽다. 봄맛 하면 그래도 나물이고 그 나물도 지난해 내 정성이 녹아 있으니 어찌 맛이 없으랴, 입속에는 즐거움이 얼굴에는 미소가 깊은 봄 속에 빠져있다. 봄은 단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