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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시스템 이론
1930년대에 이르러 시스템적 사고의 핵심적인 사상적 기준(criteria)들이 유기체주의 생물학자, 게스탈트 심리학자,
생태학자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분야에서의 살아있는 시스템 - 유기체들, 유기체의 부분들, 유기체들의 집단 - 에 대한 탐구는 과학자
들을 연결성(connectedness), 관계(relationship), 맥락(context)등의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은 원자와 아원자적 입자들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혁명적인 양자 물리학의 발견에 의해서도
역시 지지를 받습니다.
시스템적 사고의 사상적 기준
시스템적 사고의 주요 특성들의 요약은 가장 일반적이고 우선되는 기준은 부분에서 전체로의 이동입니다.
살아있는 시스템이란 통합되어진 전체로서 그 특성이 더 작은 부분들의 성질로 환원되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혹은 "시스템적인" 성질들은 전체의 성질이며 그 부분들은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들은 부분들의 "조직화하는 관계"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 말하자면, 질서화된 관계(ordered relationship)를
가지고있는 것이 유기체나 시스템 부류들의 특징이고, 시스템적 성질은 이러한 관계들의 구성(configuration)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시스템적인 특성들은 그 시스템이 분리되어진 요소들로 분해되었을 땐 사라집니다.
시스템적 사고의 또 다른 핵심적 사상기준은 우리의 관심을 시스템의 여러 수준사이로 왔다갔다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살아있는 이 세계를 훓어나가보면, 우리는 시스템들이 다른 시스템내부에 둥지를 틀어 자리를 잡고있는
것을 볼 수있으며, 같은 개념을 다른 시스템 수준에 적용함으로써 - 예를 들어, 스트레스의 개념을 유기체, 도시,
혹은 경제에 적용하는 등 - 종종 우리는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시스템 수준들은 각각 복잡성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각각의
수준에서 관찰되어진 현상들은 그 하위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질을 나타냅니다. 특정 수준의 시스템적
성질들은 그것들이 어느 특정 수준에 도달할 때 출현하기 때문에 "출현" 속성이라고 불리워집니다.
기계주의적 사고에서 시스템적 사고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부분과 전체간의 관계는 역전되었습니다. 데카르트적
과학에서는 어떠한 복잡한 시스템이라도 그 전체의 행동은 그 부분들의 특징을 통해서 분석되어질 수있다고
믿었습니다. 시스템적 과학은 살아있는 시스템이 분석에 의해서 이해 되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분들이 가지는 특성들은 그들에게 고유하게 내재하는 성질들이 아니며, 보다 큰 전체의 맥락에 의해서만 이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스템적 사고는 "맥락에의한" 사고("contextual" thinking)이며, 또한 사물을 그들의 맥락에 의거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들의 환경과 연관하여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시스템적 사고는 환경적
사고(environmental thinking)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 양자물리학이 그토록 극적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 부분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리 되어질 수 없는 관계의 그물안에 존재하는 패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부분에서 전체로의 이동은 또한 사물(object)에서 관계(relationship)로의 이동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의미로 형상(figure)/바탕(ground) 이동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기계주의적 세계관으로 보면 세계는 사물
(object)들의 집합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서로 상호작용합니다.
해서 그들 사이에는 관계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들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시스템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사물 그자체들은 보다 더큰 네트워크안에 묻혀져있는 관계의 네트워크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스템적 사고자들
에게는 관계가 일차적인 것이나, 분별가능한 패턴("사물 - object")들의 경계란 이차적인 것이 됩니다.
살아있는 세계를 관계의 네트워크로 바라보는 인식은 시스템적 사고의 또 하나의 핵심적 특성인 네트워크(독일
어로는 'vernetztes Denken'라는 좀 더 품위있는 말로 표현됩니다)라는 범주로 이루어지는 사고방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네트워크 사고"는 단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에 대해 얘기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천년간 서구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지식을 하나의 건물에 비유했고, 또한 그것
으로부터 파생되어 건축에 대한 비유를 함께 많이 사용해왔습니다.
우리는 '기본'법칙(fundamental law 기본법칙, 근본법칙), '기본'원리(fundamental law), '기본 구성 요소'(fund
amental building block)등에 대해서 말하고, 그와 비슷하게 과학의 '체계'(edifice - 체계, 건축물 - 역주)는
확고한 '기반'(fundamental)위에 지어져야한다고 주장한다.(우리말 표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영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축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fundamental, building block, edifice 등의 용어들이 사용되고있습니다 - 역주)
중요한 과학적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과학의 기반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Discourse
on Method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과학이 그 자신의 원리를 철학으로부터 빌려오는 한, 나는 그렇게 변화하는
기반위에서는 어떠한 견고한 것들도 세워질 수없다고 생각한다".
삼백년이 지난 후에 하이젠베르그는 그의 저서 Physics and Philosophy에서 데카르트가 세워놓은 바로 그러한
체계(edifice)의 고전 물리학적 기반이 변화하고 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최근의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대한 격렬한 반응들은 우리가 물리학의 기반이 여기서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감정들은 과학이 그 뿌리부터 떨어져나갈지 모른다는 느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자서전에서 그의 감정들을 하이젠베르그와 매우 유사한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밑바탕이 아래로부터 떨어져나가서 그 위에 무언가를 세울 수 있는 어떠한 확고한 기반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새로운 시스템적 사고에서는 지식을 하나의 건물에 비유하던 것이 네트워크라는 비유로 대체 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재를 관계의 네트워크로 인식함에 따라, 우리의 실재에 대한 묘사 또한 어떠한 기반도 갖고있지 않은 상호
연결되어있는 개념과 모델의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지식체계를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는 네트워크로 바라보는 관점은 대단히 불안한
것으로 비춰질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받아 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트워크적 접근이 과학분야를 통해
점차 퍼져나감에 따라 지식을 네트워크로 바라보는 생각이 점차로 널리 수용될 것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적 지식은 개념과 모델의 네트워크이며, 그부분들중 어느 하나가 다른 부분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1970년대 Geoffrey Chew의 저서 "구두끈 철학(bootstrap philosophy)"에서 물리학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구두끈 철학은 물질의 근본 구성 요소라는 개념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근본적 실체 - 기본(= 근본 - 역주)
상수, 기본 법칙, 기본 방정식 등 - 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우주는 서로 관련되어진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으로 나타납니다. 이 망의 어떠한 부분의 특성들도 근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부분의 특성은 다른 부분들의
특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들의 상호관계의 전체적 일관성이 그 전체 망의 구조를 결정하게 됩니다.
(구두끈 이론에서의 물질관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물질의 근본을 이루는 입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A, B, C, D라는 입자들을 알고있을 때, 이 입자들은 그 자체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입자라던가, 아니면
더욱 작은 입자로 분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죠. 얼핏 이 두가지 설명은 서로 상반되어 보이지만, 네트워크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구두끈 이론에서는 A라는 입자는 B, C, D라는 입자에 의해서 형성되어
지는 것이고, B라는 입자는 A, C, D라는 입자에 의해서.. C라는 입자는 A, B, D라는 입자에 의해서...... 이런식으로
모든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과 서로 재귀적으로 서로를 만들어냅니다, 혹은 서로간의 관계속에서 존재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대단히 극단적인 네트워크적 존재론인 셈입니다. 물론 과학적 실험과 검증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론은 아니고, 네트워크적 사고방식의 표현으로 나타난 철학적 내용입니다.- 역주).
이러한 접근법을 과학 전체에 적용시켜본다면 물리학이 더 이상 과학의 가장 근본적 레벨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트워크안에는 기반 이란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물리학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 현상
들은 더 이상 생물학이나 심리학등에서 설명하는 것들에 비해 더 근본적인 것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시스템 수준에 속해있으나, 그러한 수준들이 다른 수준에 비해 더 근본적이거나 하지는 않은
것이고, 실재를 분리되어질 수 없는 관계의 네트워크로 바라보는 관점은 과학적 객관성의 고전적 개념에 연관해서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적 패러다임내에서 과학적 설명들은 객관적인 것으로 믿어
졌습니다. - 말하자면, 과학이란 인간이란 관찰자나 앎의 과정등에 대해 독립적인 것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은 epistemology(사전에 나와있지 않네요. 아마도 인식론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 역주) - 앎의 과정에
대한 이해 - 는 분명히 자연적인현상의 기술에 포함되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각은 하이젠베르그와 함께 과학속으로 들어갔고, 물리적 실재들을 관계의 망으로 보는 관점과도 매우
긴밀히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를 좀더 복잡하게, 마치 Rorschach test에서의 얼룩무늬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상상해본다면, 이러한 복잡한 네트워크속에서 어떤 패턴을 분리해서 그 주위에 경계를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사물(object)"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작위적인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우리 환경속에서 어떤 사물을 지칭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나뭇잎,
잔가지, 가지, 그리고 나무 줄기들 사이의 관계의 네트워크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을 "나무"라고 한다면, 우리가
나무의 그림을 그릴 때, 대부분은 나무의 뿌리는 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는 보통 우리 눈에
보이는 부분들 만큼이나 뻗어있습니다. 더우기, 숲의 경우에서는 모든 나무의 뿌리들은 땅속에서 치밀하게 서로
연결되어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개개의 나무들간에는 명확한 경계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인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관찰과 측정의 방법들에 달려있는 것이 됩니다. 하이젠베르그의 말을 빌자면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질문하는 방식(method of questioning)에 대해 드러난 자연의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시스템적 사고는 객관성의 과학에서 epistemic한 과학, epistemology가 과학이론의 통합적인 부분이 되어
지는 틀거리로의 이동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간략하게 요약되어진 시스템적 사고의 사상기준들은 모두가 상호의존적인 것들입니다. 자연은 관계의 상호
연결되어진 망으로 나타나고, 어떠한 특정한 패턴들을 "사물(object)"로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 관찰자와 앎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망은 그에 해당하는 개념과 모델의 네트워크의 범주에서 설명되어지고,
이중 그 무엇도 다른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즉각적으로
한 중요한 의문점을 떠올립니다. 만약에 모든 것들이 다른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져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 어느
한가지라도 이해할 수있겠는가? 모든 자연현상들은 결국 서로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중 무엇하나라도 설명
하기 위해서는 우린 다른 모든 것들 또한 이해하고있어야하고... 사실상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시스템적 접근을 과학으로서 자리잡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근사적 지식(approximate knowledge)이 존재한다는
발견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낡은 패러다임은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이라는 데카르트적 신념에 기초하고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과학적 개념들과
이론들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근사적인 것입니다.
과학은 어떠한 완전하고 확정적인 이해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초 물리학 코스에서 종종 이루어지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쉽게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한 여교수가 어느 특정한 높이로 부터 물체를 떨어뜨리고서
간단한 뉴튼 물리학 공식으로부터 그 물체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대부분의 뉴튼 물리학이 그렇듯이 이 계산에는 공기의 저항을 무시할 것이고 그 해답은 완전히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만약 떨어트리는 물체가 깃털이었다면 그러한 실험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교수는 이 "첫번째 근사치"에 만족할지도 모르지만 간단한 공식을 추가함으로써 이 공기저항을 계산속에 고려
하고자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 두 번째 근사치 - 는 좀더 정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기저항은 기온과 기압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교수가 대단히 야심찬 사람이라면 그녀는 세
번째 근차치를 얻기위해 이런 변수들을 고려해넣은 매우 복잡한 공식을 유도할 것이나, 공기 저항은 기온과 기압의
영향만 받는 것이 아니고, 대류 - 말하자면 방안에서 이루어지는 공기 입자의 대규모 순환 - 의 영향도 받습니다.
학생들은 이러한 공기 대류가 열려진 창문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만 또한 그들의 호흡 패턴에 의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교수는 더욱 근사 되어진 해답을 얻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단순한 예를 통해 알 수있듯이 어느 물체가 낙하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환경에 - 그리고, 결국에는
나머지 전체 우주에 -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자연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변수들을
고려 했건간에 어쩔 수 없이 그 나머지 다른 부분은 고려에서 누락되게 됩니다. 따라서 기술(description) 그 자체와
기술되어진 현상(described phenomenon)간에 이루어지는 정밀한 일치 여부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자들은 결코
진실을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실재에 대해 제한되고 근사적인 기술만 가능할 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우리가 무한히 상호연결되어진 패턴의 망에 대해 근사적 지식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시스템적 사고자들에게는 신념과 힘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말로 표현했습니다.
"과학은 점점 더 세밀하게 제기 되어지는 의문들에 대해 그때 그때의 일시적 해답을 통해서 발전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 현상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과정 사고(Processing Thinking)
지금까지 논의 해 온 모든 시스템적 개념들은 시스템적 사고라는 큰 줄기의 다른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는 맥락적 사고(contextual thinking)라고 할 수 있고, 그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줄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새로이 등장한 과학입니다. 이 두 번째 줄기는
과정 사고(process thinking)입니다.
데카르트 과학의 기계주의적 관점에서는 기본적인 구조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상호작용하게 하여 과정을 발생
시키는 힘과 역학이 존재합니다. 반면 시스템 과학에서는 모든 구조들은 그 아래에 진행되고 있는 과정들이 발현
된 것으로 봅니다. 시스템적 사고는 언제나 과정 사고입니다.
금세기 전반부에 시스템적 사고가 형성되어지는 동안 과정(process)적 측면은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인 루드윅
본 베르탈란피(Ludwig von Bertalanffy)에 의해서 1930년대에 처음 강조되었고, 1940년대에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인공두뇌학)에서 더욱 깊이 탐구되어졌습니다. 일단 사이버네틱스가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와
다른 동역학적 패턴들을 과학적 탐구의 주요 주제로 만들자, 생태학자들은 생태계에서의 물질과 에너지의 순환적
흐름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생태학자들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Eugene Odum의 교과서 Fundame
ntals of Ecology는 생태계를 흐름을 나타내는 간단한 도표로서 나타냈습니다.
물론, 맥락적인 사고와 마찬가지로 과정 사고 역시 그에 앞선 철학적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사실 우리는 서구 과학의 여명기 때 Heraclitus가 말한 "모든 것은 흐른다"는 격언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20년대에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대단히 과정지향적인 철학(process-oriented philosophy)을 정립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생리학자인 Walter
Cannon은 Claude Bernard가 말한 유기체 내부 환경의 일정성의 원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항상성(homeostasis) -
유기체들로 하여금 그자신 스스로를 그들 내부의 여러 가지 변수들이 허용한계내에서 변화하는 역동적 균형의
상태로 유지할 수있게 해주는 기전 - 이라는 개념으로 세련화시켰습니다.
그러는 동안, 세포에 대한 매우 자세한 실험적 연구들은 살아있는 세포의 대사과정은 기계주의적 과학으로는 설명
되어질 수 없는 질서와 역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러한 과정들은 수천개의 화학 반응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이루어져 세포의 영양분들을 변환시키고, 그 자신의 기본 구조들을 합성해내며, 노폐물
들을 제거합니다. 대사과정은 지속적이고, 복잡하며, 고도로 조직화된 활동입니다.
화이트 헤드의 과정 철학, 캐논의 항상성 개념, 그리고 대사에 대한 실험적 연구등은 모두 Ludwig von Bertalanffy
에게 강한 영향을 미쳐서 그로하여금 "열린 계(open system)"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게 하였습니다.
후에, 1940년대에 베르탈란피는 그의 틀거리를 더욱 확장하여 시스템적 사고의 다양한 개념들과 유기체주의
생물학을 결합하여 살아있는 시스템에 대한 정립된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Tektology
Ludwign von Bertalanffy는 살아있는 시스템의 조직화 원리를 설명하는 납득할만한 이론적 틀거리를 처음 정립한
사람으로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반 시스템 이론(general system theory)"에 대한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하기 23년 전에 이미 러시아의 의학연구자이자 철학자, 경제학자였던 Alexander Bogdanov는
베르탈란피의 것과 같은 세밀함과 범위를 가지는 시스템 이론을 발전시켰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러시아 말고 다른데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습니다. Bogdanov는 그의 이론을 그리스어 tekton("builder")에서
따서 "tektology"라 불렀고, 이것을 번역하자면 "구조의 과학"이라고 할 수있다. Bogdanov의 목표는 모든 살아있는,
그리고 살아있지 않은 구조의 조직화 원리를 밝히고 일반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Tektology는 자연과 인간의 활동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조직화의 양식(mode)들을 밝혀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양식들을 일반화하고 체계화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경향과 법칙에 대한 추상적 체계를 제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 Tektology는 어느 특정한 분야에 대해서가 아닌,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조직적인 경험(organizational experience)들을 다룹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Tektology는
다른 모든 과학의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