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소리 말고 낑가 조라!
이문열의 소설 ‘아가雅歌’는 1940년대 농촌 공동체를 배경으로 시골의 어느 마을에나 있음직한 '당편'이라는 여성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개인과 공동체와의 관계, 장애 여성성의 사회적 의미, 잃어버린 공동체의 '기호記號'를 회상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는 장애인을 통해 ‘공동체 내의 의사소통과 그 역할을 하는 '기호記號'를 다분히 사회학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하였다.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애여성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가해온 과거를 고백하는 화자의 말을 인용하여 한국 전통사회의 보수적인 복지개념에 대해 그 민낯을 보여준다.
해방 이듬해 어느 문중 마을에 형세가 가장 좋았던 녹동 댁에 사람인지조차 분간이 안 가는 어린 생명체가 풀씨처럼 버려진다. 소설의 주인공인 당편이는 소아마비를 앓아 정신적,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여인이다. 이름부터가 '반편이'를 연상시킨다. 마을 공동체는 인정 많은 녹동어른의 ""어예기는 어예?(어떠하기는 어떻게?) 내 품에 날아든 새를. 당편이는 우리 식구라. 그러이 여러 소리 말고 낑가조라(끼워줘라). 타고난 게 들쭉날쭉해도 이래저래 빈줄랴(맞춰) 어울래 사는 게 사람이라. 너들하고 한 쌈에 여주라(넣어주라) "라는 허용에 한 식구로 살게 된다.
마을 구성원의 일원이 된 당편이는 그가 만들어낸 많은 에피소드인 '당편이 밥죽', '당편이 방'등의 과정을 거쳐 점차 하나의 기호로서 공동체에 깊숙이 인식된다. 마을 사람들은 당편이에 대한 수많은 말들을 만들어내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을 유지시켜 나간다. 이러한 관심은 여자로서 당편이를 보는 성적性的인 호기심, 그가 치른 전쟁 통의 곤욕, 장사 '황장군'과의 사랑, 그리고 나이 쉰을 훌쩍 넘어 만난 건어물 장수와의 생활 등이 오늘의 시점에서 회상의 형식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 회상은 작가 이문열의 성장기 고향의 친숙한 언어와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소설 속 남성들의 관점이다. 여성을 장난삼아 성추행하는 것이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둔갑해서 쓰인다. 황장군에게 겁탈당한 당편이는 분명 동의 없는 강간이었는데, 그게 여자로 대해준 증거라는 식으로 풀이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이 ‘여성성을 승인’하고 장애여성의 성별 결함을 ‘치유하려는 개입’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정당화한다.
“우리가 성적인 측면에 집착한 것은 그녀의 불행을 즐기는 잔혹 취미가 아니라 불완전한 그녀의 성적 기호를 보완해주는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녀를 여자로 대했으며, 방법은 달랐지만 틀림없이 그녀를 한 여성으로 사랑한 것이다”
“영화 '섹스 볼란티어'에는 척수 손상이 있어서 부모로부터 일상적인 돌봄을 받는 여성 장애인이 나온다. 그녀는 생리를 중단시키기 위한 자궁절제술에 동의한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이 여성은 생리가 그립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은 신체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진 여성들에게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경우 이 여성이 아이를 낳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자궁절제술이 불임수술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보다 편의를 위한 치료라고 생각 된다"(김은정의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중에서).
이문열의 ‘아가雅歌’는 ‘치유’라는 이름의 성폭력과 향수로 장애인들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한다. 타인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이 지닌 고유한 차이를 지우려는 행위를 ‘치유 폭력’으로 본다면 장애 여성을 향한 농촌 주민들의 성폭력을 따뜻한 포용과 사랑의 방식으로 접근한 이문열의 관점은 지극히 거칠고 자의적이다. 그는 장애인은 존재 그 자체가 큰 위로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장애인을 보면 자신의 삶을 안도속에 성찰하며 돌아볼 수 있고 성실과 경건의 결의까지도 다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당편이가 처음 녹동 댁에 받아 들여 지던 그 시절만 해도 부락공동체의 구조와 심성에는 당편이와 같은 소위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 들어앉을 자리가 있었고, 그것을 공인해준 아량 넓은 녹동어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 시절의 부락공동체의 정서와 관점을 높게 평가하고 그리워하는 듯하다.
한국의 보수를 대변한다는 이문열의 전통지향적인 공고한 가치관과 반 페미니즘 시각은 ‘아가雅歌’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보수층이 보는 복지는 일시적 시혜이자 기분 좋은 지역사회의 추억거리이다. 당연하지만 미래지향적인 복지 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불쌍한 반푼이가 왔으니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살면 된다. “여러 소리 말고 낑가 조라” 식으로 있는 사람들이 선심 쓰듯 베푸는 행위에 지나지 않은다.
책을 읽으며 내가 일순간 멈추어서 오랫동안 음미한 부분은 다음이지 않나 싶다. 당편이는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기호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모자람은 다음과 같은 구성원들의 말이 나타내듯 나름대로 존재론적인 의미가 있다. "나는 말이래요. 당편이가 오고 세상이 새로 비는 것(보이는 것) 같니더. 아지매도 알드키로(아는 것처럼) 참말로 한도 많고 설움도 많은 내 아이랬니껴? (이하 생략) 어떨때는 이렇게 살아 무슨 영광 보겠노 싶은게, 칼이라도 물고 엎어졌뿌까 하는 맘까지 들더라고요. 그런데 당편이 오고 저게 허우적거리며 사는 꼴을 보이 실실 생각이 달라지니더. 하이고, 저런것도 사는데, 카다가 퍼떡 니는 얼마나 다행이로, 싶고. 저래도 다 사는거라, 카다가 또 퍼뜩 니는 지대로(제대로) 살아야 된데이, 카는 다짐이 나더라고요. "
사족이다. 이 책을 보며 작가의 장애인에 대한 독특한 용어들이 일반적인 어휘가 아니어서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가 장애인을 지칭하는 환유換喩나 지려천박자智慮淺薄者, 곰배팔이, 용천뱅이, 청맹과니 등은 지나치게 수사학적이고 난해하다. 이 또한 이해하며 읽어야 하는 끼워주는 용어들인가?
(2024년 5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