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이고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도로에 있을 것으로 보아 산책을 망설이는데..
짝님이 나갈 채비를 하고 나온다.
'걷자^^' 하고 걷다가 문득 전화기를 들여다 보니
망내누나가 몇 번씩이나 전화를 걸었었다.
누나에게 전화를 거니.. 워싱턴이모가 돌아가셨다고!
한 발, 두 발.. 천천히 걸으며 이모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기억하는 이모는..
내 이모 한 분 뿐이 아닌 일제 시대 강점기 때 가난한 집에 태어나.. 6.25 전쟁을 겪고..
미군과 결혼하여 낯선 미국에 와.. 외롭게 살다 가신
우리 옆에 있던 아줌마요, 이모요, 어머니의 삶이요 한이다.
하여 내가 아파하는 것은 내 이모만의 삶이 아닌 20세기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살아간 조선 여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워싱턴이모란 우리 엄마의 동생이지만 다른 이모보다 유난히 가까웠던 이모였는데..
이모가 미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던 1960년 대 말 나는 영영 못보는 줄 알았을 만큼 미국은 한국에서 멀리 있는 나라였다.
그러다 1970년 대 초 큰누나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일년 후인가.. 워싱턴에 사는 이모를 만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랐다.
그리고 이모는 워싱턴이 아니라 메릴랜드에 사셨는데.. 워싱턴은 알지만 메릴랜드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 지 잘 모르던 시절이라..
이해가 쉽게 워싱턴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워싱턴이모였다. 그 전에는 이름을 붙여 '기순이이모'라 했었고..
다른 이모들은 사는 동네를 붙여 광주이모, 왕십리이모, 수원이모, 분당리이모라 불렀다.
엄마는 지금은 성남시인 경기도 광주에 있던 외가에서 형제자매 가운데 제일 큰 딸로 태어났고,
외가는 증조 할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여 엄마 가족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동대문 밖에 사는 아버지와 결혼을 하여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하월곡동에서 사시다..
갈매리로 이사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니 엄마는 월곡동이모 아니면 갈매리이모가 되나..
워싱턴이모는 두 외삼촌과 두 이모 다음 동생이었으니.. 엄마와는 나이 차이가 제법 있어서
외할아버지는 밥이라도 굶지 말라며 우리 집으로 보내셨으니
이모는 우리와 가족처럼 지냈는데 함께 산 걸 기억하는 큰 형은 특히 이모를 좋아했고,
나는 이모 아들 정도 나이로 이모는 나 어릴 때를 기억하지만.. 나는 그때 이모 기억은 없다.
내가 이모를 기억하는 건..
초등학교 다닐 때 이모가 결혼하여 우리 동네에 와 살았는데.. 게을렀던 한국인 남편과는 헤어지고
이모는 파주로 이사가 미군을 상대하는 옷 가게를 했다.
나는 엄마나 큰 형 따라 파주에 사는 이모네 가게를 종종 갔고.. 이모는 아낌없이 무언가를 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모는 이모들 중에 제일 예뻤다. 그러니 다른 이모에게 가는 것보다 워싱턴이모에게 가는 걸 더 좋아 할 수 밖에..
이모는 미국에 가기 전에도.. 내가 중딩 때.. 우리 집에서 반 년 이상을 살았는데.. 결혼한 상대는 미군 병사였고 그 사이에 아들 브라이언이 있어서 우리의 귀여움을 무척 받았다. 그러다 미국에 들어가셨다.
이모는 미국에 들어와 얼마 안 있어 메릴랜드 오덴톤 Odenton에 집을 마련하여 주욱 그곳에서 사셨다고..
내가 미국에 온 해 여름, 그로서리 가게를 하는 매형의 박스 밴 트럭을 타고 이모를 뵈러 갔다.
그리고 매년 여름에 갔는데.. 이모는 스팀 쿡한 청게와 스테이크를 준비하셨다.. 이모가 굽는 스테이크는 정말 맛이 있다.
해서 큰누나는 어떻게 쿡을 하는지 묻고 보았지만.. 자기가 굽는 거랑 별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맛이 다르다며 신기해 했다.
그리고 사이 사이 이모댁에 갔고 아주 가끔 이모가 뉴욕엘 올라오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를 제일 많이 닮은 이모이니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메릴랜드에 가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내가 결혼할 때 엄마 대신 이모가 나를 데리고 입장했다는 것도 이제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이모 모습이 담긴 사진이.. 결혼할 때 사진을 포함해 옛적이나 근래에 담은 사진이 나에게 한 장도 없다는 게 신기하다.
어딘가에 있을 법 하지만..
내가 본 워싱턴이모 삶은 어떤가?.
한마디로 참 모진 인생이셨다.
부모 복이 없으면 남편 복이 없고,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이 없다고..
딱 그렇게 사시다 가신 분이다.
그러니 얼굴 표정에 그늘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 밝음이, 웃음이 많은 것은 엄마와 비슷한 성정이었기 때문이리라.
걱정을 사서 하지 않고, 있는 걱정도 덜어 하는..
그리고 당신의 삶에 복종하는 게 조선 여인의 삶인 듯.. 받아들이며 사셨는데..
이모부 돌아가시고.. 조금씩 조금씩..
아들이 오하이오로 이사간다는 말이 나오면서 더더욱 이모는
자식과 남편, 세상을 원망하는 말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오하이오로 이사간지 일 년이 되었나.. 암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지난 여름 이사간 오하이오에 갔을 때만 해도 크게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는데..
올 2월 초 집 안에서 넘어져 응급 병원에 갔더니 암이 온 몸에 퍼져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병원에 계시면서도 암으로 인한 고통은 느끼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2,18, 일) 아침 7시 30분, 조용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하에는 큰 아들 브라이언과 작은 아들 마이클이 있고, 손자 손녀들이 있다.
워싱턴이모는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전화를 받으면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치매 현상을 보이셨다.
해서 우리는 전화받는 걸 은근히 피했는데 그나마 망내누나가 상대를 해 주니 주로 망내누나를 통해 이모 소식을 듣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투정(?)마저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셨다면 너무너무도 억울한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전화 받기를 꺼린 게 죄송하다.
미안합니다, 이모님.().
이모는 6.25 전쟁 이후 파주에 군무하고 있던 미군과 결혼하셨다.
미군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이들도 적지 않겠지만..
이모에게 그런 행운은 없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대학을 졸업한 미국인과 국민학교도 재대로 다니지 못한 한국 여인이 결혼해 사는 데 행복하기가 쉬울까?.
그것도 미국에서..
이모부는 베트남 전에서 부상을 입어 몸이 건강하지 못했고,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이모는 돈을 벌며 아이들을 키우려 근처에 있는 메릴랜드 공항 식당에서 낮이 아닌 야간 일을 하셨다.
그러나 이모의 그런 정성에 못미친 아이들은 곱게 자라지 않아서 둘 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이가 생겨 결혼을 일찍했다.
그런 자식들이 얼마나 못마땅했을까마는 당신의 팔자려니 하면서 아이들과 손자들을 받아들여 정성으로 키웠다.
당연하지만 그들과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다. 미국 애들이라서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든 틈을 주면 더 기대오는 게 인지상정.
손주 엄마인 며느리는 손자를 정성으로 키우는 시어머니를 만만하게 보고 더더 기대어 오니..
결국은 이모부가 참지 못하고 평상시에는 집에 오지 못하게 했고, 이모와 며느리 사이도 멀어졌다.
게다가 큰 아들인 브라이언은 일하다 허리를 다쳐 제대로 일할 수 없게 되었고, 아이들 엄마와 이혼을 하니..
부모인 이모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이모부는 전형적인 셀피시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몸을 다쳤으므로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어 제법 머니도 챙기고 있었지만..
우스개 말로는 이모가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모에게는 거의 돈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양주권 등 서류를 이모가 손 댈 수 없는 곳에 보관했다..
이모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도록 했으며..
자기는 오로지 자기가 즐기는 취미 생활에 돈을 쓸 뿐이었다.
해서 우리는 은근히 이모한테 이혼을 하고 뉴욕으로 올라와 살라고 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모가 그렇게 했다면 그건 평소 이모가 아니었겠지..
이모 묘지는 오덴톤에 있는 이모부 묘 옆에 있을 예정..
이모는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사시다.. 그렇게 가셨다.().
그리고 엄마에게 한번도 못한 말..
이모 살아있을때도 못했던 말이 목을 메웠다.
사랑해요, 이모
I love you, Yi mo.()
What is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