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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이다.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이은 제2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렇게 2개의 항목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 헌법 전체에서 ‘권력(權力)’이라는 용어는 제1조 2항에 딱 한 번 나온다. 이하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헌법기관의 직권(職權)에 대한 조항은 ‘권한(權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헌법기관들의 모든 직권 행위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한정적(限定的)으로 행사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주권재민(主權在民) 원칙의 법률적 관철의 표현이다.
▲ 이번 대선은 국민들이 ‘국민다운 국민’ 노릇을 하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 조선DB
그런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은 그 민(民)이 국민(國民)일 때만 의미를 갖는다. 한자어 민(民)은 풀이해서 백성(百姓)이라 한다. 사전(事典)에선 “백성은 국민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백성과 국민은 다르다. 백성이란 국민에 대한 예스러운 지칭이 아니다. 국민은 본질적으로 백성과 다르다. 국민은 철저히 근대적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권리를 가진 존재다. 반면 백성은 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단지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국민은 牧民의 대상이 아니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게 목민(牧民)이라는 용어다. 목민이란 말은 한자문화권에선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은 고래로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치민(治民)을 목민이라 칭해 왔다. 제(齊)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관자(管子)》는 ‘목민’ 편으로부터 시작한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유명한 구절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오늘날에도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저서다. 관리든 정치인이든 공직자를 꿈꾸는 자라면 거기서 논하는 목민의 덕목을 가벼이 대해선 안 된다고 여긴다. ‘목민관’이라는, 따지고 보면 꽤 예스러운 말이, 퇴행적(退行的)이라기보다는 공직의 고전적 품격을 나타내주는 용어로 즐겨 쓰인다.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목민이라는 말에 내포된 함의는 현대의 민주적 기준으로 볼 때는 사실 상당히 무례(無禮)하다. “부목민자(夫牧民者) 유축금수야(猶畜禽獸也)”라는 말이 있다. 중국 한(漢)나라 시대 저술인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구절인데, “목민이란 금수를 기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결국 민(民)이란 곧 금수와 같은 존재라는 전제가 내포돼 있다. 오늘날의 ‘민주시민’들로서는 용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主權과 책임
▲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국가와 神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권재민의 국민은 그런 목민의 대상으로서의 민(民)이 아니다.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 주권의 원천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존재다. 그런데 주권의 의미는 매우 무겁다.
지금은 주로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뜻으로만 사용되지만 그 본래 함의는 종교적이기까지 했다. 주기도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한 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서구(西歐) 기독교 문명 전통에서 주권(Sovereignty)은 원래 신(神)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용어였다. 중세(中世) 가톨릭 단일세계 시대, 신의 지상(地上) 대리자(代理者)로서의 교황권(敎皇權)은 모든 세속(世俗) 통치권의 우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후의 절대왕권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라는 용어 자체가 설명하듯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상에서의 대리권일 뿐이었다.
그 같은 주권의 원천인 신의 본질은 전능(全能)함인데 이는 신성한 책임과 양면이다. 신학적(神學的) 비유를 하자면 신은 율법(律法)을 부여하고 그를 지키지 않는 인간을 징벌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육화하여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을 감수하는 무한(無限)책임을 진다. 그래서 신적 주권의 지상대리권인 왕권(王權)도 지상에서 그처럼 책임을 진다. 즉 주권의 신성함은 무한책임을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다.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기의 법학자이자 사상가인 장 보댕(Jean Bodin· 1530~1596)의 주권론은 그 같은 고전적 주권론이 근대적 주권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보댕이 1576년 저술한 《국가론(Les six livers de la République)》(국가에 관한 6권의 책)은 한편으로는 왕권신수설의 청사진이 됐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댕의 주권론은 토머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 존 로크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쳐 근대 주권론을 확립하는 기반이 됐다.
보댕의 주권론은 가톨릭 크리스천 돔 시대 교황의 영향력과 신학의 체계에 종속돼 있던 국왕을 자연법의 영역으로 한 발짝 벗어나게 했다. 보댕의 이 같은 주권론은 70여 년 후에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으로 국가를 신과 분리된 사회계약의 결과인 ‘인공인간(artificial man)’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한 사상적 촉매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국가와 그 주권은 종교적·신학적 차원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주권의 절대적 책임의 함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적 책임을 떠난 주권의 책임이 어디로 가는가였다. 루소와 로크를 거치며 근대 주권론은 국민이란 존재를 그 책임자로 하게 됐다.
포퓰리즘과 표팔리즘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은 주권의 이 같은 신성한 무한책임을 국민 자신이 진다는 뜻을 갖는다. 권리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은 상기할 필요도 없는 당연함이다. 국가의 주권에 대해서라면 더욱이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국민주권은 단지 권력의 원천이 국민에 있다는 차원에서의 주권재민만이 아니다. 국민이 그 국가의 운명에 대해 궁극적 무한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임의 문제가 대중(大衆) 민주주의가 전개되면서 되레 종종 잊히는 양상을 드러냈다. 민주주의의 확대가 책임으로서의 주권의 새로운 확립보다는 권리의 획득이라는 측면이 더 내세워지면서 진행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국민주권의 의미가 신성한 책임이기보다는 권리의 주장으로 치환(置換)되어 통속화(通俗化)되었다. 현대 대중 민주주의의 포퓰리즘적 현상은 그런 문제점과 무관치 않다.
포퓰리즘은 그저 포퓰리즘적 정상배(政商輩)의 사특함 때문만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비유적 조어(助語)로 표현하자면 ‘표팔리즘’과 짝을 이룬다. 국민이 자신의 표를 정상배의 권력 획득 놀음에 갖다 팔아버리는 행태다.
투표는 국민의 신성한 주권행사다. 그런데 국민 자신이 최종적인 주권적 책임을 지는 것임을 망각하면 그 의미를 잃게 된다. 포퓰리즘으로 표를 매수하려 하는 정상배에게 넘어가 표를 주는 것은 주권을 팔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국민주권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그렇게 전락한 도처의 나라들의 사례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간단히 말해 망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도 지금 그런 위험이 현실화하고 있다. 고삐 풀린 매표 행각이 난무하고 있다.
니힐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 니체
한편 근대사회가 무르익어가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정신·문화적 진통이 있었다. 낭만주의의 열풍이 휩쓸더니 니힐리즘이 나타났다. 그리고 현대로 접어들면서 각종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언설이 유행을 탔다. 고전적 가치와 근대적 합리주의를 모두 부정하는 니체의 니힐리즘은 이 같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적 조류(潮流)의 예견적 출발이었다.
낭만주의의 끝자락이자 니힐리즘의 정점(頂點)이며 후대(後代)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예견적 선두였던 니체는 위버멘쉬·초인(超人)을 말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3단계를 낙타·사자·어린아이에 비유하여 그에 대해 논했다.
낙타는 무거운 것을 견디는 태도를 상징한다. 마치 중력(重力)이 불가피하게 주는 짐의 무게를 견디는 것처럼 전례의 규범과 관습을 당위로서 지키는 자세다. 사자는 그다음 단계로서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기존의 가치·관습·규범을 깨뜨리는 부정의 힘이다. 그에 이어 니체는 마지막 최고의 단계를 어린아이에 비유한다.
“순진무구,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표현하는 초인의 면모다. 니체는 그 어린아이처럼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창조와 파괴를 마치 유희처럼 즐기는 것을 인간 성장의 최고의 단계라 했다. 니체의 초인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다.
니체의 위버멘쉬·초인론은 오늘날에도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 현상과 함께 그럴듯한 것으로 받들어지곤 한다. 아니 어떤 점에선 각광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 같은 현상은 따지자면 알량하다. 니체의 초인론은 허무(虛無)를 극복하는 긍정적 니힐리즘이라고 하지만 어떻든 니힐리즘은 풍요를 조건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결핍이 일상일 때는 충족을 향한 갈망이 있을 뿐이다. 늘 배고픔을 안고 살며 생사의 긴장이 일상인 상황에선 낭만은 물론이요 허무도 있을 수 없다.
超人 되기보다 국민다운 국민 되기가 더 어렵다
근대는 그 이전 모든 시대가 이룩한 것을 다 합친 것을 넘어서는 진보와 풍요를 제공했다. 니체 이래의 그런 유의 모든 언설(言說)들은 그 같은 진보와 풍요가 없었더라면 제기할 수도 없는 복(福)에 겨운 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니체의 어린아이의 비유는 적절하다. 어린아이는 감상적으로 표현해 순진무구지 사리 분별이 없다. 자신의 행위가 타자(他者)에게 해(害)가 되는지 아닌지 분별이 없다. 분별이 없으면 책임감이 없다. 무분별 무책임에서 창조와 파괴를 유희처럼 행하는 것은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도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럴듯한 언설에 도취되고 또 되뇌면서 생에 대한 긍정이니 극복이니 하는 말로 니체류의 감성을 즐기는 게 유행이 됐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아이가 그렇듯 사실은 일종의 응석이다. 니체는 낙타 → 사자 → 어린아이로 나아가는 것을 초인적 존재로의 성장이라 했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어린아이에서 사자로 그리고 나중에는 낙타와 같은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을 감내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성장이요 성숙이다.
개인으로서도 그러하지만 문명사적으로도 그렇다.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과 발전은 무권리 한 목민의 대상인 존재에서 주권적 책임을 짊어진 존재로 나아간 것이었다. 그사이에 마치 사자와도 같이 자유를 포효하는 시민혁명의 단계를 거쳤다. 인간은 그렇게 하여 ‘자유의 존재 자체’가 됨으로써 주권적 책임을 짊어지는 국민이 되었다. 주권은 무겁다. 국가가 무거운 만큼 무겁다.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은 그 무거운 주권의 책임을 짊어진 존재다. 사자에서 낙타로 나아간 것이다. 주권적 책임의 차원에선 이게 진짜 성장이다.
감성적으로는 ‘극복’이라는 위버멘쉬적 언설은 매력이 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은 개인도 그렇지만 국민이라는 차원에선 더욱이 ‘감내(堪耐)’가 중요하다. 자유와 권리는 단지 포효하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감내하지 않으면 지켜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초인’은 좀 있어 보인다. 반면 ‘국민다운 국민’이란 말에선 고담준론(高談峻論)의 꼰대 맛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초인이 되기보다는 사실 ‘국민다운 국민 되기’가 더 어렵다.
국민다움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 대한민국 건국으로 한국인은 ‘백성’에서 ‘국민’으로 진보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건국했다. 제헌헌법은 제1강에서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하고 있다. 현행 헌법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건국됨으로써 한반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남쪽 절반에서나마 국민일 수 있게 되었다. 목민의 대상으로서의 백성이 아닌 주권의 담지자(擔持者)로서의 존재다. 그러나 국민다움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법제적인 규정은 조건일 뿐이며 선포는 시작일 뿐이다. 국민다움은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다.
건국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더없이 가난했다. 건국하자마자 겪게 된 전란(戰亂)은 그에 더해 폐허를 안게 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 최악의 조건을 이기고 발전을 이룩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명백히 선진국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취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것만으로도 비유하자면 초인 이상의 초인이다. 그러나 어느덧 70여 년을 경과해 현재에 이른 시점, 대한민국 국민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국민다움의 내실을 묻는 시험이다.
국민다움이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 한국은 안팎으로 간단찮은 시련에 봉착해 있다. 자칫 미증유(未曾有)의 위기로 치달을 수도 있는 시련이다. 국민적 양식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상황은 매우 불편하다. 여당 후보의 문제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그 고정표는 아랑곳없이 집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주권적 책임의 국민적 양식의 차원에서 보자면 국민다움의 자격이 있느냐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좌파 지식분자들의 경우는 더욱이 가관이다. 이들은 양심의 화신(化身)인 양 행세를 하며 민주팔이 진보팔이를 해왔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보이는 행태는 민주 진보 운운을 따지고 국민적 양식을 묻기 전에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 자체를 의심케 한다. 이런 부류들이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만만찮은 세(勢)를 보인다. 거기서 국민다움을 찾을 수 있는가?
물론 바른 생각을 가진 많은 국민이 있다. 불의(不義)한 상황을 어떻게든 종식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힘을 모아주고자 한다. 야당 후보의 지지율 등락에 관계없이 정권교체지수가 여전히 강력한 것은 그런 국민들 덕분이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분란(紛亂)의 난맥을 보였다. 대의(大義)를 중히 여기기보다는 파당적(派黨的)인 그리고 사적(私的)인 정략적 야심에 젖은 행태가 계속 삐져나왔다. 진통 끝에 분란이 일단은 수습되는 듯하다. 그러나 또 다른 말썽은 없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현실의 정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정치인 당사자들도 나름의 애로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식 있는 시민들 사이에선 “지금 대한민국에선 정치인보다도 국민 노릇 하기가 더욱이 고달프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이 또한 이겨내야 할 국민다움에 대한 시험일 터이다. 그렇게 여겨야 한다.
한국은 이제 작은 나라가 아니다. 국토 기준으로는 작지만 인구 기준으로 보면 남한 5000만 명만으로도 결코 적은 게 아니다. 만약 EU 소속이라면 총 27개 가맹국 가운데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 다음의 5번째의 대국이다. 더욱이 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순위를 셀 필요 없이 이미 선진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원래 자리에서 한국의 입지는 여전히 항구적 긴장이 기본이다. 한반도 관련 강국들은 그냥 강국들이 아니다. 막강하다. 불편한 장소다. 하지만 숙명이다. 개인은 몰라도 국가는 이사를 갈 수가 없다. 좋든 싫든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의 성취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이 불편한 곳에서 계속 살아남아야 하며 또 번영을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둘러싼 대치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우선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혀온 북한이 있다. 핵(核)무장까지 하고 있다. 그에 더해 중국의 야욕이 있다. 하지만 이에 함께 대처해야 할 한·미·일의 결속에 문제가 발생했다. 문재인 정권이 야기한 것이다. 한미동맹이 버팀목이지만 현 정권이 이어지면 그 전도(前途)를 절대로 안심할 수 없다.
滅共에 반발하는 現 정권 세력
“시련의 징조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공은 점증하는 국제적 비중을 배경으로 그 영향력을 강화해나가고 있으며… 심상치 않은 변화의 물결이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국가안보에 일대 시련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얘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1971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신년사의 한 대목이다.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이다. 반세기 전에 지적했던 위협적 상황이 지금 더 생생하고 첨예한 현실로 닥쳐와 있다. 그런데 최근 바로 그렇기에 더욱이 주목될 수밖에 없는 일이 하나 일어났다.
‘멸치와 콩’으로 상징되는 멸공(滅共) 캠페인이 하나의 사회적·정치적 밈(Meme)이 되어 퍼져가고 있는 현상이다. 밈이란 인터넷에서 시작된 강력한 새로운 방식의 문화 전파 현상을 뜻한다. 이것은 좌익 세력의 행태에 대한 거부감과 대한민국에 대해 모독적 행패를 거듭해온 중공(中共)에 대한 반감이 전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선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 정권 패거리들은 그에 대해 반발을 노골적으로 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증명이다. 그들이 그런 좌익이자 중공에 대한 사대굴종(事大屈從)의 무리라는 확인이다. 그런 점에서 다가오는 3·9대선(大選)은 더없이 중요하다. 결과에 따라선 대한민국이 사실상의 체제 전복(顚覆)뿐만 아니라 중공에 대한 신판 사대주의적 굴종이 본격화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될 위험도 있음이 예고되고 있다. 이번 대선은 단순한 선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선택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사적 운명 위에 서 있다
게다가 단지 대한민국의 운명만이 아니다. 세계적·세계사적 차원의 운명적 의미가 있다. 그와 관련해 노재봉(盧在鳳) 전 총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한민국이 70년여 이룬 성장과 힘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비해 도약할 기회를 맞았으나 문 정권은 그것을 차버렸다.… 한국의 세계사적 위상과 문명사적 사명(使命)을 파악하지 못하고 거꾸로 잘못된 방향을 잡은 탓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신흥국가들 중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한국은 아프리카,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본보기로 삼는 모범적인 모델이다. 정치적으로도 한국은 자유·민주·인권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뤘다.”
“대한민국은 지도상으로 보면 작은 나라이지만 유라시아 대륙과의 관계에서는 ‘작은 거인’이다. 우리 주변 대륙은 중국, 러시아 등 온통 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들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자유’와 ‘야만’이란 투쟁의 최일선에 서 있는 전초(前哨) 국가이다.”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노재봉 전 총리는 이렇게 언명했다. “대한민국은 중국·북한 같은 대륙국가의 전체주의를 바꾸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다. 반대로 한국이 무너지면 대륙 전체가 전체주의화 된다. 한국의 운명은 한국만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 주변의 강국들은 지정학적(地政學的) 숙명이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세계사적으로 ‘전체주의적 야만’과 ‘자유의 문명’이 대치하는 최전선이 돼 있다. 문명사적 운명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다움이란 그래서 내적으로는 국민국가의 주권자다운 책임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세계사적 소명도 안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오는 대선에서 그에 답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국민다운 국민 노릇을 하는 것은 초인보다도 더 위대하다.⊙
이강호 /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월간조선 2022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