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3 고통(苦痛)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理由)
고통(苦痛)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理由)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안락(安樂)의 인(因)은 아주 적고, 고(苦)의 인(因)은 매우 크고 많기 때문에 고(苦)에 의지하여 도(道)를 닦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모른다면, 진에심(瞋恚心)이 생기거나 도(道)를 닦음에 나약한 마음이 생겨서 이것이 복(福)을 짓는데 큰 장애(障碍)가 된다.
고(苦)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고, 전생(前生)의 업(業)에서 오는 것도 있다. 또한 악행(惡行)을 행하여 생기는 것도 있고, 어떨 때는 선행(善行)을 닦았는데 고(苦)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특히 숙업(宿業)과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의 힘으로 금생에 내가 받아야할 고(苦)들은 막을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이미 일어났다면, 이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本來)의 고(苦)에 더하여 이런 저런 쓸데없는 분별(分別)로 생긴 불안(不安)의 고(苦)까지 겹쳐서 참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고(苦)를 받아들여도 근본적(根本的)인 고(苦)는 어떻게 물리칠 수 없겠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분별(分別)로 인하여 일으킨 불안(不安) 등의 고(苦)는 마음 먹기에 따라 물리칠 수 있다.
비록 고통(苦痛)이라 할지라도, 도(道)를 닦는 방편(方便)으로 받아들이고 지닌다면, 고(苦)는 아주 작아지게 되어 능히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고(苦)를 받아들이는 인욕(忍辱)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고통(苦痛)을 응당(應當) 받아들이는 방법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통(苦痛) 자체(自體)를 공덕(功德)을 생각하는 방법이다. 둘은 고(苦)의 난행(難行)을 능히 참는 공덕(功德)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셋은 점차(漸次)로 적은 것부터 익혀 가면서 고통(苦痛)의 어려움이 점점 작아지는 도리이다.
고통(苦痛)의 공덕(功德)은 다음과 같다. 고(苦)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진세(塵世)를 싫어하여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出離心)을 일으켜 해탈(慧脫)을 촉진시키는 공덕(功德)이 있다. 고(苦)의 핍박(逼迫)으로 인하여 나라하는 교만심(驕慢心)을 없애게 되어 나의 교만을 사라지게 하는 공덕이 있다. 큰 고통(苦痛)은 불선(不善)의 결과(結果) 임을 알고, 고(苦)의 원인을 없애기 위하여, 선행(善行)으로 나아가게 하는 공덕이 있다.
또한 고(苦)의 핍박(逼迫)으로부터 후세의 안락(安樂)을 구하기 위하여, 금생에 선(善)의 인(因)을 닦게 하는 공덕(功德)이 있다. 더불어 윤회(輪廻)에서 헤매는 중생(衆生)들의 괴로움을 관찰하여 그것을 없애주기 위하여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키게 하는 공덕이 있다. 또한 염리심(廉離心)으로 교만(驕慢)을 없애게 하고, 죄를 부끄럽게 여기고. 선(善)을 좋아하게 하는 공덕이 있다.
고(苦)의 난행(難行)을 참는 공덕(功德)에 대하여, 지난 날 자타(自他)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 내가 수많은 난행(難行)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자타(自他)를 위한 큰 일을 하고자 하는데 어찌하여 현재의 작은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하고 사유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이런 인과(因果)를 이제 알았으니, 실로 나는 이제 큰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높이 증상(增上)시켜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나쁜 선지식(善知識)에 미혹(迷惑)되어 아무런 의미(意味)가 없는 악도(惡道)에서 스스로 뾰족한 삼지창에 뛰어들어 가거나, 자기의 몸을 불에 태우는 등의 난행(難行)을 참아내기도 한다. 세간(世間)에서 살아 가면서 일상 생활이나 농사(農事)일이나 상업(商業)이나 고용살이나 전쟁(戰爭) 등으로 어차피 수많은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난행(難行)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한량없는 고통(苦痛)을 이겨내는 이득(利得)을 생각해 보면, 사형수(死刑囚)가 손가락 하나 자르는 것으로 사형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면, 그는 손가락 하나쯤 자르는 고통은 오히려 몹시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조그만 난행(難行)의 고통(苦痛)으로 끝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고, 지옥(地獄) 아귀(餓鬼) 등 악취(惡趣)의 고통(苦痛)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런 난행(難行)들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능히 목전(目前)과 영구(永久), 이 두 가지 고(苦)의 차이(差異)를 분명하게 사유한다면, 난행(難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증장(增長)될 것이다.
작은 괴로움을 불평없이 감수하여 닦아나가게 되면, 점점 더 큰 고통도 어렵지 않게 참아낼 수 있게 된다. 고통을 참는 습관(習慣)을 들이면 작은 고통쯤은 크게 생각하지 않게 되듯이, 고통을 인욕하는 일이 점차 습관(習慣)이 되면, 안락한 마음에 안주하게 된다.
연약한 마음으로는 번뇌(煩惱)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아주 굳세게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불굴(不屈)의 의지(意志)를 일구면 큰 고통 또한 좋은 도반(道伴)이 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의(威儀)에 의지한다는 것에는 행주좌와(行住座臥)가 있다. 이 가운데 행(行)과 좌(座)에 모든 장애(障碍)에서 마음을 정화(淨化)시키고, 모든 고통을 참고 받아 들여야 한다. 때가 아니면 자리에 앉거나, 눕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야 한다.
법(法)을 완전히 거두어 받는 다는 것은, 삼보(三寶)에게 공경(恭敬) 존경(尊敬)하고, 스승에게 공양(供養) 존경(尊敬)을 올리는 것이다. 불법(佛法)을 받아 지니고, 법(法)을 남에게 널리 설하고, 불경(佛經)을 찬탄(讚嘆)과 함께 큰 소리로 독송(讀誦)하여야 한다.
혼자 외진 곳에 머물 때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유가(瑜伽)를 마음에 지어갈 때는 지관(止觀)을 수행하여야 하나니, 이런 모든 것에서 생기는 고통을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가무(歌舞) 등을 멀리 여의고, 친구(親舊)들도 멀리 여의고, 오락(娛樂)을 버리고, 세간(世間)의 즐거움에서 멀어져야 한다.
지금 해야 할 것에 의지함이란, 출가자(出家者)는 발우(鉢盂)와 승복(僧服)의 업(業)이 있어야 하고, 재가자(在家者)는 죄(罪)가 없는 동사(同事)와 장사 및 일의 노임(勞賃)으로 살아가는 등 재가(在家)의 일에서 생기는 모든 고(苦)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