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저수지
설날에 고향 큰집에 들린 적이 있었다. 차례를 지내고 나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저수지 쪽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매년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왔지만 웬일인지 이날만은 저수지를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큰집에서 농로를 따라 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겨울 찬바람에 부서지며 밀물져 오는 저수지의 푸른 물살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물길을 따라 모천회귀하는 연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저수지에 도착했을 때 난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연어처럼 설레는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빙 둘러 칸칸이 놓여있는 낚시 의자만이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저수지 가운데로 사람이 통행하기 쉽게 나무 데크도 놓여있었다. 땡볕이나 비를 피하도록 천막가림막을 한 낚시의자와 나무데크길은 완전 흉물이었다. 낚시의자 주변으론 라면봉지나 종이컵도 어지럽게 뒹굴었다.
낚시꾼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저수지를 황량하게 만들어놓았다. 나무데크길을 걸어 저수지 한가운데로 들어가는데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이 쩡쩡거렸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 옛날 저수지의 풍광 때문일까. 덧없는 세월을 아쉬워 하며 얼음이 제 가슴을 마구 쾅쾅 치는 소리 같았다.
한참을 서성이고 있는데 위쪽 조립식 판넬집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발걸음이라고는 전혀 닿지 않는 겨울 저수지를 찾아온 낯선 방문객을 보고는 의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가 고향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땅한 직업이 없어 생계유지 차원에서 동네 사람들이 낚시터를 마련해준 것이라는 말도 듣게 되었다. 지금은 낚시꾼이 모여들지 않는 계절이라 저수지 위쪽에 판넬집을 지어놓고 실내낚시터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저수지가 낚시터로 변한 내력에 대해 더 물으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혹시라도 그의 마음을 긁어 싸움이라도 터진다면 손해 볼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말은 고향사람이지만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내가 중학교 때 타지로 이사를 간 동안에 그가 태어나고 자란 탓이었다. 같은 고향사람이면서도 낯설기 그지없는 사람들, 이것이 현재 처한 고향의 현실이었다. 명절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도 젊은 사람들은 누가 누군지, 누구 집 아들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 옛날 고향에서 같이 지냈던 사람들의 유전적인 모습만 희미하게 어른거릴 뿐이었다. 만약 읍내에서 잘못 어깨만 스쳐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처럼 동네 저수지는 그 옛날과는 아주 판이한 모습이 되었다.
나는 무엇보다 동네 사람들을 개탄했다. 그림처럼 아름답던 저수지를 낚시터로 허가해준 동네사람들에게 일말의 증오심을 느꼈다. 아직도 팔팔한 젊은이가 생활대책이 없다면 육체적으로라도 벌어먹으라고 떠밀 일이지 그 아름답던 환경을 일시에 흉물로 만들어 준 동네 사람들이 더 안타까웠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때의 즐거운 추억도 없는 모양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물비늘을 않고 잔잔한 포말을 일으키던 저수지, 황소가 되새김질을 하며 구슬프게 내지르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미역을 감던 추억들, 저수지 주변이 연두빛 물로 뒤덮인 봄날, 바람결에 밀려와 파르르 떠는 포말을 날렵한 꼬리로 찍어 하늘로 날아오르던 제비들, 수면을 미끄러져 가는 물뱀들,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저수지는 가난한 동네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고도 남았다. 고향의 명물하면 저수지라고 할 정도로 그 때의 저수지는 많은 추억과 애환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는 이 저수지를 수리잡이라고 불렀다. 아마 “수리조합”의 줄임말 같았다. 여하튼 사람들은 저수지를 수리잡이라고 부르면서 세월을 보냈고 어른이 된 지금도 어린 시절의 저수지 풍경이 내 마음속에 들어앉아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웬만한 시골길은 아스팔트로 떡칠해 있고 구불구불하던 논두렁도 똑바로 펴지고 있다. 풀들이 솟아나야 할 시골의 흙 마당도 비가 내리면 불편하다는 핑계로 회색빛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여름 날 저수지에 미역 감으로 갈 때 유연하게 굽이치던 도랑가에 낭창낭창 머리 풀고 춤을 추던 버드나무들이나 도랑가 비탈을 꼬리 감추며 잽싸게 달아나던 다람쥐의 행방을 이제는 볼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봄날이면 들녘을 배회하던 황새들도 더 이상 날개를 접지 않았고 전깃줄에 앉아 지지배배 하고 까르르 웃던 제비들도 모습을 흔적을 감춘 지 오래되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고 지금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는가. 물론 허기진 배를 면할 수는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흙길을 콘크리트로 메우고 오밀조밀한 자연의 숨통을 막은 덕분에 주어진 행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문명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불안에 노출되었을 때 자연이 주는 심미적 안정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가. 흙길이나 풀들의 작은 숨구멍마저 틀어막다 보면 결국에는 자연이 인간 세상에 큰 재해를 내려 줄 것은 뻔하다. 눈만 뜨면 옛것을 없애려고 애를 써는 사람들 앞에서 자연인들 마음이 편하랴. 자본과 이해득실에 따라 자연환경마저 무참히 파괴시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대강의 현실만 봐도 우리나라의 앞날은 암담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자본에 길들여져 편리함에 산다지만 자연스레 흐르는 물길마저 포클레인의 삽날을 갖다 대는 현실이 서글프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연륜처럼 쌓인 강바닥의 모래를 긁어내고 버드나무 줄기처럼 휘늘어진 강줄기를 직선화시켜 유속을 빠르게 한들 우리 삶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홍수 대비와 이익 창출이 목적이라지만 자연을 거덜 내서 얻는 결과는 보나마나 뻔하다.
요즘 돌아가는 현실만 봐도 섬뜩한 일이 많다. 심심하면 터지는 동시다발적인 재해를 난 당당히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 재해는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내면 속에는 인간의 탐욕이 분노처럼 들끓고 있다.
나는 지금에 와서 고향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현재 낚시터로 변한 저수지를 그 옛날 수리잡으로 되돌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둑방의 버드나무 유연하게 춤을 추고 풀빛 짙은 둑방에 앉아 평화롭게 되새김질하는 황소의 천연덕스런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옛날 그 모습으로 돌아가 지금도 고향의 어린 아이들이 벌거벗고 미역을 감을 수 있는 공간, 그래서 복잡한 이해득실로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정서적 안정과 여유로움으로 살아가게 한다면 그보다 더 값지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