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나흘, 죽을 만큼 힘든
통증과의 싸움
11월 21일 오전 7시30분 수술실로 이동하는 침대에서 웬지 가뿐한 마음이 들었다. 수술 첫 번째 인 난 수술자 대기실 제일 안쪽에 밀려졌다.
대기실 챠임벨 소리가 나며 한명, 또 한명 나는 한가하게 들어오는 그들을 세고 있다. 28명 드디어 다 들어 왔는지 의사 간호사 한조씩 각자 맡은 침대를 밀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를 담당한 신ㅇ규 교수가 보인다. “마취 시작 하.......” 마취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깊은 수면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후에 들은 얘기 수술시간 4시간) 입원실로 옮겨진 것도 인식 못하고 통증에 시달렸다. 나는 계속 아픔을 호소하며 몸부림을 쳤다. 간호사가 팔에 꽂혀있는(2주일간 팔에 꽂아놓는다) 바늘을 통해 통증주사를 놓는다. 통증은 가라않지 않았다. 주사는 4시간을 지나야 또 맞을 수 있다. 난 견딜 수 없어 그 사이에 마약성 진통제를 먹는다. 팔에는 무통주사가 계속 몸속으로 들어가건만, 열은 떨어지지 않고 통증은 더더욱 심하다.
내 몸은 너무나 통증이 힘든 나머지 뒤 틀리는 것 같고, 입 마름은 입술뿐이 아니라 목젖까지 타들어 가고 혀는 말라 입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눈은 열로 충혈 되어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간병을 맡은 동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수건에 물을 묻혀 입안까지 계속 적셔 준다.
(나만큼 힘들었을 동생을 생각 하면 미안하고 고맙다. )
수술한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기진맥진 초죽음이 됐다. 저녁7시가 되며 금식이 풀려 물을 마시려는데 넘어가지가 않는다. 동생이 또 수저로 물을 떠서 입안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꼬박 4일을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1주일이면 퇴원할 수 있다는 기막힌 주치의 말을 생각하며 5일째 되는 날 일어나 보기로 맘을 먹고 구르듯이 일어나라는 간호사 말을 기억하며 난간을 붙잡고 일어나 앉았다. 머릿속이 휭 하니 비어 있는 것 같고 어지럽고 멍하다. 주치의가 날보고 1주일 후 퇴원할 수 있단다. 6일 되면서 아침 일찍 보조기를 갖고 틈틈이 걸음마로 시작하여 자주 걸었다. 신기 하게도 자고나면 몸 상태가 조금 나이지고 또 자고나면 걷는 것이 수월해지고 했다. 걸음 수가 많아지며 머릿속도 맑아 져 갔다. ‘아! 참!’ 5년여를 나를 그렇게 통증으로 괴롭히던 종아리를 가만히 만져봤다. 아프지 않다. 고쳐졌다는 확신이 든다.
정말 1주일 만에 퇴원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에겐 무리라 생각했다. 딸들과 2주일 후 실밥(호치켓으로 찍어놓은 상태)을 뽑는다고 하니 아예 그 후에 퇴원하기로 상의를 하고 회진 때 담당교수님께 말씀 드렸더니 쾌히 승낙 해 주었다.
동생은 이어폰 한쪽은 내 귀에 다른 한쪽은 본인 귀에 끼고 예배 현황은 눈으로 보게 하고, 찬양을 듣게 했다. 그 아픈 중에도 눈에 보였다 안보였다 귀에 들렸다 안 들려다 한다. 예배와 찬양으로 아픔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보려고 애쓰는 동생의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보였다 안 보였다한다.
나의 잘 걷는 모습을 보는 담당간호사는 “생살을 가르고 철심을 박고 이 큰 수술을 했음에도 잘 감당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인지, 회복이 빠르고 순조롭네요.” 하며 칭찬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쉬지 않는 응원의 기도, 친구들의 기도, 특히 매일 저녁 후 9시면 1층 조용한곳을 찾아 11시 까지 기도하고 올라오는 동생의 특별기도가 있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감히 알지 못하리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고 은혜다.
작은딸은 통증에 시달릴 때 무서워 엄마 곁에 갈수가 없었는데 닷새 만에 얼굴에 웃음이 돌고 일어나 앉는 것 보니 마음이 기쁘단다.
병원에서 두 번째 1주일은 집에서 혼자 지낼 마음의 준비와 혼자 할 수 있는 일 찾아 하며 보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퇴원했다.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