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 머무르려무나.
1989년 3월 24일, 동고(코모) 성금요일
1. 사랑하는 아들들아, 나는 너희 모두를 대표하는 사도 요한과 함께, 처참한 임종 고통의 피비린내 나는 시간을 치르고 계시는 내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다. 그분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번번이 비탄에 젖은 내 영혼을 칼날처럼 찔러 댄다. 그분의 고통 전체를, 티 없는 내 마음의 열려진 잔이 방울방울 받아 모으고 있다.
2. 나는 단말마의 고통 속에 계시는 그분의 큰 목마름(*요한 19,28; 시편 69,22 참조)을 좀이라도 덜어 드리기 위해 바칠, 사랑과 연민을 찾아보려고 이 자리에 있다. 작은 사랑이나마 구하고 있건만, 그분의 처형을 지켜보는 자들의 마음과 입술에서 나오는 비인간적인 사악함과 뿌리 깊은 증오, 조롱과 모독의 고함 소리만 우리 주위를 에워싼다. 그 숱한 외침들 중에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으로 내 마음을 찔러 상처 입히며 피가 흐르게 한 모욕은 바로 이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어서) 네 목숨이나 건져라.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0-42; 루카 23,35-37 참조)
3. 하지만, 내 성자께서 (사람으로) 탄생하시고 성장하시며 살아가신 것은 정녕 이 ‘십자가’에 오르시기 위해서였다.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온순한 어린양(*이사 53,7)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참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이사 53,7 참조)이신 것이다.
4. 나는 오늘, 어머니로서의 현존을 통해, 그분께서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 너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머물러 계시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 오, 성자님, 십자가에 머무르십시오. 이 처형대에 달려 고통받고 돌아가시는 당신을 도와드리려고 내가 여기 있습니다.
- 오, 성자님, 십자가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온 세상을 당신께로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요한 12,32 참조).
5. 그래서 당신은 성부의 품을 떠나 내 동정 모태로 내려오셨습니다.
6. 그래서 나는 당신이 사람으로 태어나시도록 아홉 달 동안 내 태중에 모시고 살과 피를 취하게 해 드렸습니다.
7. 그래서 당신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여느 사람들처럼 인간의 성장 리듬을 따라 자라나셨습니다.
8. 그래서 당신은 한 떨기 꽃송이처럼 피어나신 유년기에 (이어,) 청소년기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힘차게 성장하셨습니다.
9. 그래서 당신은 나자렛의 가난한 집에서 날마다 힘든 노동을 하셨고, 날마다 당신을 기르신 아버지 요셉의 소중한 협력과 애정 깊은 이 ‘엄마’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10. 그래서 당신은 삼 년 동안의 고된 공생활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펴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가난한 이들과 작은 이들과 비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 (당신) ‘왕국’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11. 그래서 당신은 빌라도가 재가(裁可)한 종교법정에서 재판과 사형언도를 받으셨고, 그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지도록 넘겨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태 5,16)께서 마련해 주신 당신 영광의 옥좌에, 팔다리를 펴신 채 (달려)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외아들’(*요한 3,16.18 참조)이신 당신은 또한, 세상의 온갖 죄악과 증오와 불순결과 죽음을 없애시는 유순한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기도 하니 말입니다.
(오,) 귀하고 열매 많은 ‘십자가’야, 네 팔 안에 세상의 ‘구세주’께서 달려 계시도다!
12. 우리 속량의 대가(代價)가 달린, (오) 아름다운, 구원의 나무야! 오늘 네 위에 달려 계신 ‘파스카 제물’에 의해 거룩해진, (오) 복된 십자가야! 그분은 (이렇게)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는 ‘희생 제사’로써 만민을 구속하시는 분이로다!
13.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 ‘성금요일’에, 내가 너희에게도 이렇게 말하도록 허락해 다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 머무르려무나.
(그러니) 너희는 내 ‘원수’의 교활한 유혹과 세상의 흔한 유혹에 넘어가지 마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하(며 놀리)는 소리들이 오늘날에도 너희에게 되풀이되고 있지만 그것에 넘어가선 안 된다.
14. 안 되고말고! 예수께서 하셨듯이, 너희 역시 사제다운 희생을 몸소 바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들어야 하고, ‘아버지의 뜻’에 마땅히 예. 하고 응답하며, 기도와 용서의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너희도 오늘, 세상의 구원을 위해 너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