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5. 31
정말 재미있던 그 해 야구의 '숨은 그림'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1위보다는 2위권을 다투었던 팀들이 재미있는 야구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한 곳 빈틈없이 얄미울 정도로 단단한 안정감을 가져야 오를 수 있는 것이 1위의 자리인 반면, 2위권의 팀이란 분명 강팀이긴 하지만 한 편에서는 남고 한 편에서는 모자라는, 그래서 그만큼의 인간적인 매력, 그리고 아쉬움과 좌절감에 대비되는 환희와 열광의 높이를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93년은 대구야구의 부흥기였다. 한국시리즈마저 생략한 채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했던 1985년을 정점으로 조금씩 최강팀의 자리에서 밀려나던 라이온즈가 3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복귀한 것이 그 해였고, 1만2000석의 야구장에 8500명의 평균관중이 모이며 서울과 부산을 제외한 지역을 연고로 하는 구단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 관중을 돌파했던 것이 그 해였다.
조화와 역동성, 93년 라이온즈
▲ 김태한 투수 140대 후반의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투수였던 그는 양준혁 대신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은 유망주였다. / ⓒ 삼성 라이온즈
물론 그 해의 패권은 선동열과 김성한을 축으로 공수 양면에서 가장 완숙한 야구를 구사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 가장 매력적인 야구를 한 것은 라이온즈였다. 원년 이래 가장 많은 국가대표출신, 가장 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보유해왔던, 그래서 강했지만 애초에 그 구성으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정석의 야구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낯선 젊은이들을 묶어 패기와 창의성으로 똘똘 뭉쳐진 듯한 싱싱한 플레이를 일 년 내내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 해 마운드의 주축을 이룬 이들은 대졸 2년차와 고졸 5년차로 스물 네 살 동갑이었던 김태한과 김상엽, 그리고 한 살 아래의 대졸신인 박충식이었다. 타선의 뼈대를 이룬 것 역시 대졸 2년차 동봉철, 그리고 한 해 밀려들어온 신인 양준혁이라는 스물 네 살 동갑내기 방위병들이었다.
물론 재기에 성공한 10년차 김성래와 8년차 성준이 각각 공수에 힘을 보탰고, 대졸 7년차 류중일과 강기웅이 내야에서 버텨준 덕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한 해 사이 원년멤버 장태수와 허규옥을 비롯해 김용철, 신경식, 조범현, 그리고 에이스 김성길까지 한 시대 삼성 라이온즈를 곧바로 상징했던 이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해 도무지 익숙한 이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라인업과 삼성 라이온즈라는 전통 있는 간판이 부딪히는 묘한 부조화는, 마치 소년가장이 악물고 지키고 있는 거창한 종갓집 대문을 떠올리게 하곤 했다.
그 거침없는 소년들 같던 라이온즈의 '큰형님'은 신임감독 우용득이었다. 대구 출신으로 프로 원년부터 삼성맨이었던 그는 특히 초창기에 코치 겸 선수로서 함께 훈련하고 함께 경기에 출장하기까지 했던 경험과 포수출신 특유의 질박한 친화력으로 선수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 또 '선생님'이나 '아버지' 같았던 기존의 감독들과는 다른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해의 삼성 라이온즈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조화'와 '역동성'이다. 타선에서는 홈런 타점 2관왕 김성래와 시즌초반 방위병 신분으로 홈경기에만 나서면서도 거의 매경기 홈런을 터뜨리다시피 했던 '괴물신인' 양준혁이 8개 구단 최고의 파괴력을 과시했던 동시에 역시 방위복무 중에 .345의 타율에 24개의 도루를 기록한 동봉철과 .325의 타율에 20개의 도루를 기록한 강기웅의 센스와 스피드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내기번트나 한방에만 기계적으로 의존하는 단조로운 야구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득점을 만들어내는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마운드에도 비슷한 특징이 있었다. 그 해 선발진을 구축했던 네 명의 투수 김상엽, 박충식, 김태한, 성준. 우완 정통파(김상엽)와 좌완 정통파(김태한), 우완 잠수함(박충식)과 좌완 기교파(성준)라는 4인 4색으로 구성된 그들은 허약한 불펜에 뚫린 구멍까지 품앗이하듯 돌려막으며 각기 적게는 139이닝(성준)에서 많게는 181.1이닝(김상엽)까지 소화했고, 모두 2점대 평균자책점과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도합 53승과 12세이브를 합작해냈다.
힘과 기교, 빠름과 느림, 불같은 투지와 호수 같은 고요함. 날마다 새로운 키워드로 그라운드를 수놓았던 그들의 야구는 볼 때마다 새로웠고, 풍요로웠다.
4인 4색의 선발진, 그 속의 숨은 그림 김태한
▲ 김태한, 양준혁, 동봉철 69년생 동갑내기 김태한(위), 양준혁(왼쪽), 동봉철(오른쪽). 그 셋은 라이온즈 중흥기였던 93년의 주역이었다. ⓒ 삼성 라이온즈
그들에 관한 기억 속에 숨은 그림처럼 물러앉아있는 이름 하나가 김태한이다(그들 4인의 선발진 중 김상엽, 박충식, 성준은 이미 한 번씩 '야구의 추억' 주인공으로 등장한 바 있다). 통산 44승에 불과한 평범한 이력, 야구장 밖으로 별다른 뉴스거리를 흘려준 적이 없는 조용한 성격. 그래서 꾸준함으로는 김상엽에, 투지로는 박충식에, 그리고 '느림'이라는 특이한 개성을 가졌던 성준에 가려 아주 빠르게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버렸던 투수.
그는 시속 140대 후반의 공을 던지던, 예나 지금이나 스카우트들을 설레게 하는 왼손 강속구 투수였고, 삼성은 1992년에 그를 1차로 뽑느라 양준혁을 1년간 흘려두어야 했다. 그러나 제구력이 다듬어지지 않았고 결정구도 가지지 못했던 그는 데뷔 첫 해 고작 3승에 그치며 기대를 배신했고,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양준혁이라는 '기회비용'과 대비되며 더 싸늘한 평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지명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다가 다시 방위병으로 복무전환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절친한 친구 양준혁이 삼성으로 돌아온 93년, 그도 다시 부활했고 162이닝동안 2.83의 평균자책점, 14승으로 당당한 선발진의 주축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 해,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 사이 홀로 삼성 마운드를 지탱하다시피 했던 김성길을 방출한 데 이어, 전년도 나란히 13승을 올렸던 승률왕 오봉옥과 노히트노런투수 이태일이 4승과 2승으로 몰락한 폐허 위에서 김태한과 박충식이라는 신예가 돌출해 한국시리즈 진출을 성공시킨 것은 사실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용호상박, 93년 한국시리즈
특히 그 해 라이온즈 드라마의 정점은 한국시리즈였다. 젊고 강한 팀 삼성과 완숙한 팀 해태. 물론 그 둘 사이에서 전문가들의 예측은 해태 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단기전 필승카드인 철벽 마무리 선동열의 존재 유무, 그리고 큰 경기에서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경험 요소에서의 기울어짐 때문이었다.
1차전에서 해태 선발인 다승왕(17승) 조계현에 맞서 탈삼진왕(170개) 김상엽이 5회까지 1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1점을 앞서나갔지만 구원투수 유명선이 7회말 2사 후부터 연속포볼에 이어 이순철과 정회열, 이종범에게 연속안타를 맞으며 5대 1로 역전을 허용하고, 마무리 선동열에 막혀 한 판을 내주는 공식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의 예상은 무난히 맞아 들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2차전.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선동열도 따라갈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해왔던 '가을까치' 김정수가 해태 선발로 나선 그 경기에서 삼성의 맞상대 카드는 바로 김태한이었다. 오히려 1차전에 조계현에 맞선 김상엽은 그리 기울지 않는 매치업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정규시즌에서조차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10승을 올리며 안정감마저 더하고 있던 김정수의 경험과 카리스마는 꽤 높은 벽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라이온즈 타선은 김정수에 이어 구원등판한 이강철마저 두들겨대며 여섯 점을 뽑아냈고, 반면 김태한은 해태 타이거즈 타선을 산발 7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아버렸다. 1984년의 최동원과 1988년의 문희수에 이은 역대 세 번째 한국시리즈 완봉승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뒤집어낸 분위기는 박충식이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에 맞서 홀로 15이닝을 버티며 1무승부를 '따냈던' 3차전과 김상엽의 2실점 호투와 양준혁, 김성현의 적시타로 뒤집어냈던 4차전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2승 1무 1패, 삼성은 어느 때보다도 한국시리즈 제패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노회한 호랑이가 젊은 사자의 기세에 놀라 움츠러들던 그 순간, 굳이 라이온즈의 팬이 아니더라도 타이거즈의 장기집권에 조금씩 싫증을 내기 시작하던 야구팬들의 흥미가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기세라는 것은 언젠가 무뎌지게 마련이고 강팀의 저력이란 언젠가는 발휘되기 마련이듯, 잠실로 무대를 옮긴 5차전부터 해태는 다시 해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1루에서 2루로, 다시 2루에서 3루로 도루를 해서 전진한 뒤 내야플라이 하나에 홈으로 파고들었던 이종범의 신들린 다리. 그리고 이제는 좀 힘이 떨어지는가 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면 전성기로 돌아가 버리는 김성한과 이순철, 장채근의 한방이 고비마다 터졌다. 또 한두 점이라도 앞서가기 시작하면 되풀이되는 송유석과 선동열의 악몽같은 마무리. 그렇게 타이거즈는 남은 세 판을 휩쓸며 또 한 번 포효했고, 그렇게 라이온즈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침체기 라이온즈의 버팀목, 박충식과 김태한
▲ 김태한 투수 1990년대 중후반은 라이온즈 마운드의 암흑기였고, 그 시기를 지탱한 것은 박충식, 그리고 김태한이었다. / ⓒ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이듬해부터, 완벽하게 세대교체 된 전력에 완숙미가 더해가며 드디어 진정한 강팀으로 올라서리라는 기대와 달리 삼성 라이온즈는 또 한 번 길고 긴 침체의 늪을 헤매야 했다. 오랜만에 부상에서 돌아왔던 김성래가 다시 친숙한 재활의 시간으로 돌아갔고, 내야의 핵 류중일이 목디스크 때문에 전성기를 서둘러 마감하기 시작했다. 김상엽은 한 해 건너 한 해씩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성준은 94년 이후 다시는 두자릿수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다.
감독이 바뀌는 우여곡절 속에 팀 분위기는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두 해 뒤에는 동봉철이, 그 이듬해에는 김성래와 이종두, 강기웅 등이 팀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 들어왔던 이들이 하나같이 기대를 배신하며 팀은 창단 이래 처음으로 4강권 밖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나마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라이온즈가 최하위권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양준혁을 대들보 삼아 버텨냈던 공격력과 무너진 진용 안에서 조금씩 시들어가면서도 제몫을 버텨냈던 박충식, 김태한 두 투수의 힘이었을 것이다.
박충식은 98년까지 꾸준히 선발진의 한 축을 감당해주었고, 93년과 94년 10승대 선발투수로 임무를 다했던 김태한은 95년부터는 마무리로 전환했다. 김태환은 그 해 22세이브, 97년 23세이브를 기록하며 그 두 해 에이스로 돌아왔던 김상엽과 손발을 맞추었다. 삼성이 '박충식과 김태한만 가지고 야구한다'는 말을 듣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 짜임새 없는 타선과 부실한 수비진, 헝클어진 투수진의 조력을 기대할 수 없었던 팀에서 그는 항상 제법 괜찮은 공을 던지고도 야박한 성적표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돌아보면 '최고'가 아닌 '수준급'으로 기준을 낮추더라도 고작 네 시즌에 불과했던 것이 김태한의 활약이었다. 그는 대단한 기록을 남긴 선수도, 특이한 개성으로 기억된 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 재미있는 야구를 선보였던 1993년의 라이온즈를 떠올리며, 기억 속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그의 이름은 각별한 울림을 준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이 없는 황무지에서 정말 겁 없는 소년들처럼 신선하게 돌진했었지만, 그 사이 또 한 명의 전설적인 투수로 다듬어질 틈도 없이 잠재력을 섣불리 태우며 사라져간 영원한 유망주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말이다.
요 몇 해, 대구구장은 수원을 빼고 보면 가장 적은 관중이 모이는 야구장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라이온즈는 해마다 설문조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단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그래서 별 근거는 없다만, 전력의 강함과 약함으로 따져서 이해할 수 없는 그 간격 사이에서, 또 나 말고도 꽤 많은 이들이, 예컨대 93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