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7월 정유재란
화의 결렬로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려 가토 · 고니시 · 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선봉이 1월 15일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 서생포에 둔진하고 고니시는 부산의 원영(原營)에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왜의 반간계와 선조의 판단착오로 압송 하옥된다 정탁鄭琢의 신구차伸救箚 등 많은 이의 구명으로 4월 1일 석방되어 8월 3일 3대 통제사로 임명되기까지 백의종군 했다
3월 중순 구로다 · 모리[毛利秀元] · 시마즈 · 나베시마[鍋島直茂] · 하시수가[蜂須賀家政] · 우키다 · 고바야가와 · 아사노[淺野長慶] 등 제장들로 총병력 14만 1500명 동래 · 기장 · 울산 등지를 점거하고, 웅천 · 김해 · 진주 · 사천 · 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에 다라 부산에 1만명 경상도 2만명 외는 모두 전라도를 침공하여 군량미 확보와 영토할양을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에 집중됐다
1594년 9월 모든 병력을 요동으로 철수하였던 명나라는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명을 1597년 5월에 다시 출병하였다.
명나라는 양호는 평양에 있고, 마귀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 했다.
왜적은 호남 · 호서 지역을 석권하고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하기 위해 7월 28일 우키다 대장이 5만 병력이 구례로 들어오고,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 대장도 5만의 군사로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 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 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고 명군의 계획에 따라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부총명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이 9월 16일 명량(鳴梁) 대첩에서 왜적의 서진(西進)을 봉쇄했으나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남원을 왜적은 사천 구례로 상륙하여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하여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창령 의령 함안을 거처 온 왜적이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패주하여 8월 19일 무혈점령하였다.
전주에서 왜적은 공주를 거쳐 전의 진천을 지나 직산에까지 이르렀는데 9월 5일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을 부총병 해생(解生) 우백영(牛白英) 등의 조명연합군이 9월 7일 완전히 차단시켰다.
왜적 좌군은 담양 강진 해남으로 내려오고 우군은 20일경 함창 상주 성주 쪽으로 일부는 문경현 비안현을 거쳐 공산성을 거쳐 경주 울산에 주둔했다
1597년 12월 2일 구내역에 진영을 설치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 의병장 권응수 경부부윤 박의장이 좌영, 충청병사 이시언이 중영, 정기룡 고언백이 우영을 맡아 명나라 군대와 경주에 주둔한 왜적을 격파하여 경주성을 수복했다
10여만의 왜군이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주둔하여 겨울을 났다.
1597년 12월 21일 경리 양호楊鎬는 제독 마귀와 함께 명군 4만여 명이 문경 조령을 넘어 경주로 진출하여 도원수 권율의 1만여 명과 함께 24일 울산 태화강의 왜진을 격파하고 정기룡과 명나라 유격장 파새가 울산성을 공격하여 400여급을 베자 가토기요마사가 있는 도산으로 달아났다 23일 명나라 경리가 도산성을 치고 정기룡이 명 유격장 모국기와 함께 선봉장이 되어 660급을 베었으나 6만여 왜적 구원병이 몰려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사야기(김충선) 등 항왜군이 참전했고 조명군 6천 왜군 6천명이 전사했다
1598년 2월 제독 마귀麻貴가 유격 왕국동王國棟이 상주를 방어케 하다가 3월에는 마귀가 상주에 유진하였다
명군을 접대하고 지원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아 명나라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충주에서 지공支供이 부실하다고 충청관찰사의 종사從事 송영구宋英耈를 곤장을 치고 문경에 도착하여 인부가 도망쳤다고 문경현감 홍함(洪函)과 연기현감 이문빈李文賓을 잡아들여 가마를 메게 했다
명군이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구원군’이 돌변하여 폭행과 약탈, 겁탈이 다반사라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속언이 등장할 정도였다.
양호가 파직되고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자 명군은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으로 남진을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로 동로(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 · 강원 · 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동일원(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중로(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 · 황해 · 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유정(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서로(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 · 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이 때는 원임原任 부총병 이녕李寧이 이여해의 요병遼兵 2800명을 거느리고 상주에 주둔했다
임란기에 수군이 육군보다 더 강했고 육군은 도체찰사 체찰사 도원수 순변사 방어사 등 임시직책이 많아 지휘체계가 혼란 했고 수군은 1593년 8월에야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겸임했다
1598년 8월 1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62세로 병사하여 11월 중순까지 강화를 체결하고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를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공략하고,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수상에서 봉쇄하여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수포로 돌아갔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와서 이순신은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고 관음포(觀音浦)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독전하다 11월 19일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유명遺命을 받은 조카 완(莞)이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다
임란기의 왜적의 수군은 15만 8,800이고 별도로 9200명 수군이 더 있었으나 약했던 이유는 전쟁에서 배를 가지고 전투를 한일이 거의 없어 水戰 경험이 없었고 역할이 조선까지 병력을 수송하는 일을 맡았고 해전을 통해서 조선수군을 격파하고 해로를 장악하고 이런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임진란 당시 일본 수군의 총 지휘관이 누구이지도 분명하지가 않다 충무공은 조총의 사격권 밖에서 총통으로 대응하고 화공으로 적을 섬멸했다
1599년 1월에 유정 · 진린 · 마귀 · 동일원 등이 서울로 가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과 명으로 돌아가고 경리 만세덕,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승훈(李承勳), 산동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 두잠(杜潛) 등이 군사 2만 4000으로 서울에 잠시 주둔하다가 다음해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왜군은 불상, 탱화, 서적, 다완 등 문화재를 약탈해간 왜의 경제, 사회,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의 농토는 황폐화되고 인구는 1,300만에서 1,085만으로 215만명 감소했다.”
조선은 왜군의 총칼에 죽고, 귀와 코를 잘리고, 굴비 엮듯 묶여 일본으로 끌려갔다.
참고문헌
이순신 평전, 이민웅 저, 책문, 2012년
이익주는 역사, 임진왜란 https://www.youtube.com/watch?v=4vXAhKeMqsA&t=4253s
충의공기념사업회, 상주와 임진왜란, 2013
징비록 류성룡
조정선생 문집,
성재집 고상증
용사일록 권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