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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
청대 권상일의 문인 근품재 채헌이 산북 석문동의 절경지에 정자를 짓고는, 금천∼대하천 9㎞ 구간에 설정한 아홉 굽이 구곡원림의 노래
석문구곡(石門九曲)은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에 있는 금천(錦川)과 대하천(大下川)을 따라 9㎞에 걸쳐 있다. 태백산의 한 줄기가 뻗어와 금학봉(金鷄峯)을 이루고, 맞은편에 높이 솟은 봉우리는 일월봉(日月峯)이다. 이 두 봉우리가 석문(石門)을 이루고 있으니, 예로부터 이곳을 절승지지(絶勝之地) 쌍승방(䨇勝防)이라 하였다.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의 마을 초입인 이곳 석문의 대하천 옆에다 근품재(近品齋) 채헌(1715~95)이 정자 한 채를 세우고는 석문정(石門亭)이라 이름하였다. 대하천(일명 아천鵝川)과 그 아래 금천의 아홉 굽이에 구곡을 정하고 ‘석문구곡’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채헌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60)의 문인이다. 1753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자연에 묻혀 산 선비다. 만년에 석문정을 짓고 구곡을 경영하며 '석문구곡가'를 지었다. 석문구곡가는 한글 가사로 된 ‘석문정구곡도가(石門亭九曲棹歌)’와 한시로 된 ‘석문구곡차무이도가운(石門九曲次武夷棹歌韻)’이 있다.
석문구곡은 1곡 농청대(弄淸臺), 2곡 주암(舟巖), 3곡 우암대(友巖臺), 4곡 벽립암(壁立巖), 5곡 구룡판(九龍板), 6곡 반정(潘亭), 7곡 광탄(廣灘), 8곡 아천(鵝川), 9곡 석문정(石門亭)이다.
1곡 농청대는 문경시 산양면사무소에서 금천제방 왼쪽길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면 있다. 지금은 농청정(弄淸亭)이 자리하고 있다. 농청대는 권상일의 장수지소(藏修之所)였다. 권상일의 ‘존도서와기’에 농청대와 존도서와(存道書窩) 건립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존도리 동쪽으로 수백 보 지점에 대(臺)가 있는데 농청(弄淸)이라 하였다. 대체로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알지 못하고 옛날부터 이름이 전해왔다. 농청대 아래에 맑은 내가 있는데, 그 원두가 대미산(岱眉山)에서 나와 10여 리를 흘러들어 이곳에 이르러 물이 고여 못을 이룬다. 또 남쪽으로 푸른 들판 바깥을 흘러서 낙동강에 들어간다. 농청대 위에는 작은 산이 있는데 월방산(月芳山)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동쪽으로 돌아 내에 이르러 멈춘다. 푸른 바위가 둘러 있는 것이 집의 담장 모양 같은데 오직 동남의 두 면은 물에 임해 두절되었다. 위는 평평하며 30여명이 함께 앉을 수 있으니 바로 농청대다. 우측 곁에 층암(層巖)이 높다랗게 우뚝 솟아 가장 웅장하고 기이하다.
기미년(1739) 가을에 재료를 모아 건축을 시작해 다음해 늦은 봄에 공사를 마쳤다. 뒤 칸은 실(室)이고 앞 칸은 헌(軒)인데 합하여 삼 칸이다. 재(齋)는 졸수(拙修)라 하고, 헌은 한계(寒溪)라 하였다. 통괄해 존도서와(存道書窩)라 이름을 지었다. 날마다 그 가운데 기거하고 도서를 좌우에 배치해 정신과 심성을 기르니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만했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
졸수재가 높아 달을 가장 많이 들이는데, 때로 작은 구름이 모두 사라지면 날씨가 맑고 밝아 달빛이 집에 가득히 비친다. 일어나 멀리 바라보면 시내의 여울이 환히 밝고 들판이 멀리 트이며 동남쪽의 이어진 산들이 안개와 이내 속에 은연히 비치니, 아득한 가운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쁘고 상쾌하며 경치와 마음이 합하는 듯했다. 그 즐거움을 말로써 형용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는 없다.’
존도서와는 1808년 화재로 소실되고 ‘존도서와’ 편액만 남았다. 후인들이 1863년에 다시 지었고, 지금 농청대는 이 건물을 보수한 것이다. 보수하면서 ‘농청정’ 편액을 단 것으로 보인다.
‘일곡이라 학해선으로 거슬러 오르니(一曲溯學海船)/ 청대의 수척한 대나무 앞 내에 비친다(淸臺瘦竹映前川)/ 선생이 가신 후 완상하는 이 없으니(先生去後無人弄)/ 태고암 머리에 저문 안개 드리우네(太古巖頭銷暮煙)’
스승 권상일이 별세한 후 대나무 앞을 흐르는 맑은 물을 완상하는 이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2곡은 주암이다. 1곡에서 1.6㎞ 정도 올라가면 현리(縣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금천 한 쪽에 부벽(浮碧)이 있고, 다른 한 쪽에 주암(舟巖)이 자리하고 있다. 채헌이 살던 당시와는 달리, 현재는 부벽 앞으로 물길이 흐르고 주암 앞은 논밭으로 변했다. 물길이 변한 것이다. 주암과 금천 사이에는 하천 둑이 가로막고 있다.
부벽에는 현재 경체정(景棣亭)이 자리하고 있다. 경체정은 선조인 채성우를 비롯해 그 7형제를 기려 손자(孫子)가 세운 정자다. 1935년 현리에 처음 세윘으나 홍수의 피해 때문에 197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주암은 현리에서 현리교를 건너 왼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데, 위치는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이다. 이름 그대로 배 모양의 바위로, 바위 위에 주암정(舟巖亭)이 세워져 있다.
이 정자는 주암(舟巖) 채익하(蔡翊夏 1573~1615)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44년에 건립했다. 정자는 배 모양의 바위 위에 선실(船室)처럼 지어졌다. 후손 채홍탁이 지은 ‘주암정기’에 주암정 건립 내력이 나와 있다.
‘웅연(熊淵) 남쪽에 큰 바위가 있어 형상이 배와 같은데 벼랑을 다듬어 길게 매어놓았다. 옛날에 우리 선조 상사(上舍) 부군(府君)이 일찍이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노닐고 즐기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이로 인해 주암으로 이름을 지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별세하셨다. 그 후 이 바위를 지나며 노닐던 사람들 모두 갔지만 이름은 남게 되었다. 임오년 3월에 일을 시작해 9월에 공사를 마치니 그 때의 형편에 따라 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취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이가 있으나 난간에 기대 바라보면 천주봉(天柱峯)이 북쪽에 솟아 있어 완연히 만 길의 베를 걸어놓은 듯하다. 금강(錦江)이 남쪽으로 흘러들며 의연히 한 세대의 금람(錦纜)을 모은다. 기타 자연의 아름다움은 안개가 드리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니,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도를 위한 이름난 구역이 되기에 충분하다.’
주암정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최근 주암정을 보수하면서 조성한 것이다. 정자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주암정은 팔작지붕에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마루로 되어 있다.
‘이곡이라 동쪽에 일월봉이 솟아있고(二曲東亞日月峯)/ 두 바위 물을 베니 형제의 모습이네(雙巖枕水弟兄容)/ 정자 앞 부벽은 천년이나 되었고(亭前浮碧千年久)/ 대숲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몇 겹인가(望裏竹林翠幾重)’
3곡 우암대(愚巖臺:청대 권상일이 설정한 암대)는 현리에서 현리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작은 길을 따라 400m 정도 가면 나온다. 금천 왼쪽 야산 암벽 밑의 우암대 위에는 정자 우암정(友巖亭)이 있다. 우암정은 1801년에 창건됐다. 우암(友巖) 채덕동이 선조인 채유부(蔡有孚)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채덕동은 형제간 우애가 각별했고, 부유하면서도 검소하였으며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다.
우암정 뒤쪽에 바위가 솟아있는데, 바위에 ‘우암채공 장수지지(友巖蔡公 藏修之地)’라고 새겨져 있다. 우암 채덕동이 은거한 곳이라는 의미다. 우암대 앞으로는 본래 금천이 흘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암과 마찬가지로 금천 둑에 막혀서 물길이 이르지 않고 있다.
‘산양천이 적성산의 남쪽에서 나와 남쪽으로 나아가 옛날 추향(樞鄕)인 권 선생의 청대(淸臺)가 되었다. 청대로부터 위로 5리 지점에 수풀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승경이 있다. 인천(仁川) 채군상(蔡君尙)옹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내가 금년 봄에 한 번 올라가니 정자의 좌우는 모두 푸른 바위이고 앞은 시냇물이 있어, 맑은 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가 자주 난간에 들려왔다. 시내 밖에는 밝고 맑은 모래다. 고요한 별장인데, 별장이 자리하는 옛 현은 아침 저녁에 연기 꽃과 시내 아지랑이가 숲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정상관(鄭象觀)이 지은 ‘우암정기’에 있는 내용이다. 3곡시는 다음과 같다.
‘삼곡이라 여울가에 저문 배가 걸리니(三曲灘頭倚暮船)/ 우암대 몇 천년이 되었는가(友岩臺古幾千年)/ 우뚝 솟은 화주 모래 가에 서 있고(亭亭華柱沙頭立)/ 염바위 바라보니 다만 절로 어여쁘네(回首濂巖只自憐).’
화주는 화수헌(花樹軒)이라는 집인데 지금은 복원 증축하여 고풍스런 한옥카페로 탈바꿈했다.
4곡 벽립암은 금천 가의 바위 벼랑이 맑고 많은 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근래 농지정리 과정에서 바위가 많이 제거돼 옛 모습을 적지 않게 잃어버렸다.
‘사곡이라 솟아 있는 푸른 바위 벼랑에(四曲蒼蒼壁立岩)/ 바위 이끼 이슬을 머금어 푸르게 드리우네(岩苔含露翠)/ 높다랗게 보이는 형체를 아는 이 없고(高見形體無人識)/ 넓고 넓은 뒷내에는 물이 가득할 뿐(汪汪後川只滿潭).’
5곡 구룡판은 마을 이름이다. 문경시 산북면 약석리 마을이다. 마을 표지석에 ‘구룡판’이라고 표기돼 있다.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아홉 마리 용이 서로 다투어 승천하려는 형상을 하고 있는 형세이고, 그 산기슭에 평평한 곳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날 지세라고 하면서 산혈(山穴)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흙의 색깔도 붉게 되고 산 고개도 잘록해졌다고 전한다.
‘5곡이라 시냇가에 길이 돌아 깊고(五曲溪邊路轉深)/ 구룡판 아래는 버드나무 숲을 이루네(九龍板下柳成林)/ 숲 사이에 그윽한 흥취 누가 아는가(林間幽趣誰能會)/ 한 곡조 뱃노래에 객의 마음 상쾌하네(一曲棹歌爽客心).’
6곡 반정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산북 장수황씨 문중에서 설립한 비름모티 태고벽 위의 완심정浣心亭-일명 浣亭-으로 추정) 6곡시는 다음과 같다.
‘육곡이라 반정에 물굽이 둘러 있고(六曲潘亭一帶灣)/ 흰 구름 깊은 곳에 동문이 닫혀 있네(白雲深處洞門關)/ 비파산 풀 푸르고 강가의 꽃 떨어지며(琶山草綠紅花落)/ 황새가 우니 봄뜻이 한가롭다(黃鳥綿蠻春意閒).’
7곡 광탄은 두 줄기 물길이 만나 넓은 여울을 만드는 지점이라 광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광탄은 석문정에서 내려오는 대하천과 화장골에서 내려오는 동로천이 만나 넓은 여울을 이루는 지점이다.
‘칠곡이라 배를 저어 광탄에 오르며(七曲行舟上廣灘)/ 다시금 가유서숙을 되돌아 보노라(嘉猷書塾更回看)/ 안타까워라 밤비가 봉산을 지나가니(却憐夜雨蓬山過)/ 활수의 원두에 찬 물이 불어나네(活水源頭添一寒).’
8곡 아천은 아천교 주변이다.
‘팔곡이라 아천은 돌길이 열리고(八曲鵝川石路開)/ 세심대 아래로 물이 돌아 흐르네(洗心臺下水回)/ 나루에서 복사꽃 줍는 일 말하지 마라(渡頭不說桃花網)/ 나들이객들 진처 찾아 물 따라 오리니(遊客尋眞逐水來).’
9곡은 석문정이다. ‘석문(石門)’은 석문정 옆의 시내 양쪽에 바위 벼랑이 솟아 있어 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문을 지나면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조금 더 올라가면 김룡사와 대승사가 나온다. 채헌은 석문 옆에 석문정을 짓고 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풍류도 즐겼다.
채헌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석문정에 노닐며 한글 가사(歌辭)로 읊은 ‘석문정가(石門亭歌)’를 짓고, 12수의 한시로 된 ‘석문정십이경(石門亭十二景)’을 짓기도 했다.
지금 석문정에는 채헌이 한글로 지은 ‘석문구곡도가’를 새긴 시판과 ‘석문정기’ 기판 등이 걸려 있다.
‘구곡이라 석문에 길이 확 열리며(九曲石門道豁然)/ 광풍과 제월이 청천에 가득하네(光風霽月滿晴川)/ 등한히 꽃을 찾는 길 알아내니(等閒識得尋芳路)/ 연비어약 모두 이 동천이어라(飛躍鳶魚摠是天).’
채헌은 9곡을 속세를 떠난 별천지로 표현하며, 선비가 지향하는 이상세계가 펼쳐지는 곳으로 노래하고 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연비어약은 천지 만물이 자연의 바탕에 따라 움직여 저절로 그 즐거움을 얻음을 상징한다. 이는 곧 도(道)는 천지에 가득차 있음을 뜻한다. ‘시경(詩經)’에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오른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구절이 나온다.
한시 ‘석문정십이경’ 중 ‘석문정’과 ‘석문’을 읊은 시다.
‘일대의 십리 시내와 산이 기이하여(一帶溪山十里奇)/ 반생 동안 오고가니 기대하는 바에 합하네(半生往來契心期)/ 지금에야 머물던 자리 장식하고(于今粧點盤旋地)/ 천석정 앞에서 생각한 바를 위로하네(泉石亭前慰所思).’
‘두 봉우리 높이 솟고 한 시내 달리니(兩峯嶪一川奔)/ 뾰족한 산 하늘에 닿고 돌은 문을 이루네(箭括通天石作門)/ 조물주가 조화의 도끼로 만들지 않았다면(不是天公裁化斧)/ 또한 응당 우 임금 산을 이끈 흔적이네(也應大禹導山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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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문경의 구곡원림, 문경시·김문기, 2004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채헌 기사
[생원] 영조(英祖) 29년(175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4위(19/100)
자(字) 계징(季澄)
생년 을미(乙未) 1715년 (숙종 41)
졸년 을묘(乙卯)(주1)
【補】1795년 (정조 19)
향년 81세
합격연령 39세
본관 인천(仁川)
거주지 상주(尙州) 산양(山陽)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사마시제 이의(二疑)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부(父)]
성명 : 채윤형(蔡允亨)
관직 : 학생(學生)
[안항(鴈行)]
형(兄) : 채식(蔡㵓)[進]
형(兄) : 채완(蔡浣)
형(兄) : 채연(蔡演)
[출전]
『숭정3 계유식년 사마방목(崇禎三癸酉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