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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덴마크 왕자 햄릿이 절규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에 대한 복수를 놓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어머니를 위해 소극적으로 현실을 회피할 것인지, 아버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상황을 돌파해나갈 것인지 갈등하는 것이다.
동양의 시인과 선비들도 수백 년에 걸쳐 햄릿처럼 고민하고 망설였다.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
맛은 좋지만 치명적인 독이 있는 복어 요리를 앞에 놓고 갈등하고 주저했다. 독 때문에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야 할까? 천계옥찬(天界玉饌), 신선이 먹는 음식에 버금간다는 천하진미를 맛보지 않고 평생 아쉬워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까짓 사소한 음식 하나에 목숨 거는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복어 손질법이 발달한 요즘은 복어 요리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어 독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던 옛날에는 복어 요리를 놓고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복어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우스울 수도 있지만 사실 복어로 상징되는 음식에 대한 욕망의 갈등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맛은 있지만 성인병의 주범인 기름진 음식, 퇴근 후 딱 한 잔에서부터 시작해 과음으로 이어지는 음주, 스트레스를 날려줄 담배 한 모금의 유혹 앞에서 누구나 고민하고 갈등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비록 사소한 음식 하나라도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또 다른 소중한 것을 버려도 좋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도 복어는 고급 생선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복어에 대해 일종의 환상마저 품었다. 중국 송나라 시인 매요신은 “복어가 많이 잡히는 계절이면 다른 생선이나 새우는 음식으로 쳐주지도 않는다”고 노래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 《동국세시기》에서는 “복사꽃이 떨어지기 전, 미나리와 기름, 간장을 넣고 끓인 복국은 진미”라고 평가했다. 중국 최고의 미식가로 꼽히는 시인 소동파는 복어를 먹으며 “목숨과 바꿔도 좋은 맛있는 음식”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을 정도다.
낭만파 시인들은 비록 먹다 죽을지언정 천하제일의 맛에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용파 실학자들은 쓸데없이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며 복어를 경계했다. 정약용은 “복어는 독이 있으니 젓가락을 대기도 전에 소름부터 돋는다”며 복어를 멀리했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 역시 “세상에서 복어가 가장 맛있다지만 잠깐의 기쁨을 얻겠다며 음식 따위에 목숨을 걸지 말라”고 말렸다.
일본 사람들도 우리 못지않게 복어를 좋아하지만 과거에는 아예 복어를 먹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 나라에서 강압적으로 맛있는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른 것이다. 주인공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이유는 복어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아 병력 손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무라이들은 전쟁터가 아니라 복어를 먹다가 중독돼 죽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복어는 과연 목숨을 걸 가치가 있을 만큼 별미일까? 각자의 입맛에 따라 다르겠지만 옛날 사람들이 복어에 빠진 이유는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복어 독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독,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식욕을 더욱 자극했을 수 있다.
예컨대 복어 알은 치명적이지만 소금에 절여 10년을 숙성시킨 복어 알젓은 별미로 꼽힌다. 독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질 뿐인데도 미식가들은 입 안이 얼얼해지는 그 맛을 즐겼다. 복어 정소인 곤이는 별미 중의 별미로 춘추시대의 경국지색, 서시를 닮은 맛이라고 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진미였기에 나라를 망하게 한 미인에 비유한 것이다.
지금 복어를 먹으며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복어 논쟁은 현대에도 의미가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원하는 가치를 얻기 위해 도전할 것인가? 아니면 욕심 부리지 않고 현재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지킬 것인가? 선택이 쉽지 않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