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자연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physis’, 라틴어의 ‘natura’에서 유래한다. 모두 사람이나 사물의 고유한 성(性)을 말하기 때문에, 좁은 의미로는 그 고유한 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연의 대립물로서 자연으로부터 제외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연이 무엇이냐고 묻는 철학적인 질문에서는 항상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요소는 무엇인가로 답하려고 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이 세계의 궁극적 질료(質料)는 결정할 수 없고 무한하며, 동시에 물·공기 등과 같이 우리에게 친근한 물질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더욱 분명하게, 자연에 대한 질문은 바로 “자연은 무엇으로 형성되어 있느냐?”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기하학적 구조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그 구조에 자연적 대상들이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를 사색했다고 말할 수 있다.
『티마에오스(Timaios)』에서 표현한 플라톤(Platon)의 자연관은 이 세상의 시간적·공간적 실재들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신의 모델에 따라서 창조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점이 더욱 부각되어 자연과 초자연적인 이분화는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다. 초월적인 창조신은 자연법칙의 지배자이다.
아퀴나스(Aquinas, T.)가 신을 ‘Natura Naturans’라 하고 그것을 ‘Natura Naturata’와 구분한 것도 전통적으로 초월신과 자연의 물질성을 구분한 데에서 오는 사고 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자연을 하나의 양적인 영역과 수적인 영역이라고 보는 데에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자연을 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입장은 마찬가지이다.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신이 자연에 내재하고 있다고 하든가, 신의 완전한 선성(善性)이 자연을 토대로 실현된다고 하든가, 혹은 무한과 유한의 관계, 일(一)과 다(多)의 관계,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서 논해지는 모든 문맥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은 주관에 대립되는 객체요 물질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은 기계적인 법칙에 지배되는 세계요 인간적 감정을 배제한 세계이다.
동양에서의 자연은 객체나 대상 혹은 기계적인 법칙에 지배되는 자연이 아니다. 자연에 대해서 가장 전문적으로 발전시킨 철학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잘 나타나고 있다.
4세기에 『장자(莊子)』를 주석한 곽상(郭象)은 자연(自然)과 타연(他然)을 구분해 도(道)는 자연이지 타연이 될 수 없음을 말한 바 있다.
타연이란 기독교처럼 유일신 사상을 믿는 종교에서 절대타자(絶對他者)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을 말한다. 즉, 절대타자에 의해서 우주가 창조되었으므로 타자에 의한 피조물[然]이라는 뜻으로 쓸 수 있으니 타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냥 있음.”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이 말은 살아 있는 그 무엇을 형용하는 말처럼 쓰인다고 할 수 있다.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언어의 열등성이 노장사상의 중요한 골자를 이루고 있다. 언어로써 존재를 표현하면 만가지 물건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존재 세계의 전체를 말하는 도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한 ‘의미 차원’의 세계를 소유한다. 그러나 의미 차원의 세계에 갇혀 살기 쉽다. 도는 우리에게 의미 차원을 벗어나 ‘존재 차원’으로 눈길을 돌리게 하는데, 모든 무지와 고통은 의미 차원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분별을 하기 때문이다.
의미 차원에서 존재 차원으로 옮겨가 존재전체를 직관해볼 수 있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구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미 언어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전체의 존재 차원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도는 자연과 같은 것으로, 그 도는 또한 죽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연, “스스로 그냥 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도는 자연을 본받았다(道法自然)고 했는데, 도와 자연은 실상 같으므로 자연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도 같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자연을 인격화하여 ‘자연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스스로 그냥 있음.”은 언어로 규정될 수 있는 의미 차원을 멀리 떠나 있는 도의 진정한 모습이다.
자연은 존재 차원을 설명하는 단순한 형용뿐 아니라, 자연을 몸에 체득해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현덕(玄德)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을 노자는 “지극히 높은 덕은 인위적이 아니므로 덕이 덕 같지 않다. 덕 같지 않은 덕이야말로 참다운 덕이다. 지극히 낮은 덕은 인위적이기 때문에 덕이 덕 같다. 덕 같은 덕이야말로 참다운 덕이 아니다. 지극히 높은 덕은 인위적이 아니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아주 낮은 덕은 인위적이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老子, 제38장)고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비·미추·선악은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어떤 일정한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의미 차원’의 세계에서 생기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한다면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예에서처럼 원숭이의 수준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聖人)들은 세간의 시비를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해 상대적 현상 세계를 넘어서 자연의 세계에 합일함으로써 극치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옳다[是], 그르다[非]고 하는 것도 ‘의미 차원’의 인위적인 경지에서는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 차원의 전체적 관점, 즉 자연에서 보면 그러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자는 그것을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 것도 없다. 그러나 저것으로부터는 보지 못하고 스스로 아는 것만 안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생겨나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아름답다[美], 추하다[醜]하는 것도 의미 차원의 세계, 즉 인위적인 세계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의미 차원에서 보면 장미꽃은 진달래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존재 차원에서 보면 장미꽃과 진달래는 오직 평등할 뿐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만물이 의미 차원에서 보면 모두 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지적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된다’가 있으면 ‘안 된다’가 있고, ‘안 된다’가 있으면 ‘된다’가 있다. ‘옳다’에 의거하면 ‘옳지 않다’에 의거하는 것이 되고, ‘옳지 않다’에 의거하면 ‘옳다’에 의거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세상 일은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그래서 성인은 그러한 방법에 의거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照明)에 비추어본다.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긍정의 세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자연과의 합일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은 노장사상뿐만 아니고 중국인들의 보편적 관념이었다. 서구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신·인간·자연의 삼자간의 관계를 단절시켜서 신 없는 자연, 인간 부재의 자연이라는 관념을 배태하고 말았지만, 고대 동양인의 자연관에서 보면 자연 가운데에 신적인 요소나 인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신·인간·자연의 삼자가 내면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자연을 총칭해서 말하면 또한 천이라고도 하는데, 이 천은 우리 머리 위의 천공(天空)이라는 자연 현상을 말하는 동시에 상제(上帝)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인격적인 상제를 배제한 경우라도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규칙적으로 순환하고 만물이 그 은혜를 받아서 나고 있는 사실이야말로 천이 존재하는 직접적인 증거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천은 자연 현상 가운데에 있는 도이며 이(理)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 때에도 천이 가지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어서, 신적이면서도 명확한 신격(神格)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 가운데에 이상적으로 융합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논어』 가운데에 있는 “다만 하늘만이 크고 요임금만이 능히 그것을 본받을 수 있다.”는 측천사상(則天思想)이 나온다. 만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천이지만, 성왕(聖王)인 요임금만이 그 천의 법칙에 따라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천의 법칙이란 만물을 기르는 것은 물론 일월성신의 운행, 춘하추동의 순환 등 자연 현상을 포함하고 있다. 이 측천사상을 더욱 구체화해 일년 중 계절에 따라 제사와 정치를 행하는 세밀한 방법도 고안하여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로부터 중국과 교섭을 맺어온 때문인지 자연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을 몸에 익혀왔다. 특히, 산이 많고 사계절이 분명하며 맑고 청명한 날씨 때문인지 계절에 따른 생활 습관과 놀이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계절과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 태도는 일년 열두달 동안 정교하게 짜인 각종 놀이나 축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월의 설날, 2월 한식(寒食), 4월 초파일, 5월 단오, 6월 유두일(流頭日), 7월 칠석(七夕), 8월 추석, 10월 상달, 11월 동짓날, 12월 그믐 등이 나누어져 있고 여기에 각각 정교한 놀이가 뒤따른다.
그러나 그 놀이들은 단순한 오락적 차원만이 아니고, 여러 종교적 행사가 뒤따르고 있으므로 일종의 자연적인 종교력(宗敎曆)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연과 계절의 리듬에 따르는 생활을 고대부터 행해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러 자연적 요소를 신격화해 숭배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하늘·태양·별·구름·바람·비 등의 천체 현상과 대지(大地)·산·천(川)·호수·연못·바다·물·불 등으로 나누어지는 지상의 온갖 현상들이 신격화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개개의 자연 현상과 자연물에 대해 그것을 신성시하거나 혹은 그 배후에 어떠한 거룩한 힘이 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연숭배를 낳은 생태학적인 환경과 그 가운데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길흉·방위관·세계관에 영향을 주어 심리적인 지향성과 사회 관계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자연스러움의 예술적 감각을 발전시켜 한국적인 미를 낳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언어인 ‘멋’이라고 하는 말에는 인위적으로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가장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멋은 자연스러움과 조화라고 할 때, 그것은 비단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건축·법률·도덕·철학·인생관·세계관 등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이상적 가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활 속의 자연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집터는 모두 강변과 바닷가에 분포되어 있고, 청동기시대 집터는 대부분 산기슭이나 언덕에 배치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신라·백제가 모두 산천에 제사를 지냈고, 이러한 자연숭배 사상은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태조는 1393년 정월에 산천과 성황신들에게 호국백(護國伯)의 봉호를 내렸다. 지금도 산신단이나 성황당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왕궁이나 능묘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터를 잡지 않았다. 8세기경 우리나라에 풍수지리설이 들어와 도선(道詵)에 의해 크게 유포되었다. 이는 음양오행설을 지리의 묘기(妙機)로 파악하여 대체로 용(龍: 산줄기)·혈(穴: 용맥 중 음양이 결합되어 산수의 정기가 응결된 곳)·사(砂: 혈 주위의 형세)·수(水: 강이나 시내)의 사법(四法)으로 설명하고 있다(山法全書 卷之首 上, 上海九經書局).
이런 태도는 산수방위가 인간의 길흉화복을 가져온다는 신비력을 믿어 집터를 잡을 때나 묘소를 조성할 때 명당과 혈을 그 핵심으로 하는 공간 구성의 중심 개념이 발전되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인간·자연·신과의 밀접한 연결을 이루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복거(卜居) 총론 지리에 보면, “사람이 살 집터는 수구(水口)가 잠기고, 안으로 탁 트인 들이 있고, 햇볕을 많이 받으며, 주산(主山)이 수려 단정하고 맑고 밝으며, 분지를 이루고, 토질은 흙과 모래가 굳고 조밀하여 샘물이 맑고 차며, 수려한 앞동산이 있으면 가장 길한 것이다.”고 하였다.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복거(卜居)에 “왼편에 물이 있는 것을 청룡(靑龍)이라 하고 오른편에 긴 길이 있는 것을 백호(白虎)라 하며, 앞에 못이 있는 것을 주작(朱雀)이라 하고 뒤에 언덕이 있는 것을 현무(玄武)라 하는데, 이러한 곳이 가장 좋은 집터이다.”고 하였다.
또한 “무릇 주택에 있어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면 생기가 높은 터이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면 부(富)하지는 않으나 호귀(豪貴)하게 되고, 앞이 높고 뒤가 낮으면 문호(門戶)가 끊기고, 뒤가 높고 앞이 낮으면 우마(牛馬)가 번식한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배산임수(背山臨水) 같은 집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집이 앉는 방향에 대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복거에 “북쪽에 앉아 남향해야 춥고 더운 것이 알맞고 초목이 무성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집에 길을 내는 것에 대해 『산림경제』 복거의 문로(門路)에 “똑바로 직선으로 오는 길은 좋지 않고 반드시 빙 돌아서 굽어야 하며, 집안의 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오른쪽으로 길을 내고 집안의 물이 오른쪽으로 흐르면 왼쪽으로 길을 내야 하며, 서로 상충되는 것은 꺼린다. 길이 청룡을 감싸면 길하고 백호를 감싸면 흉하다. 청룡·백호·주작·현무의 등성이에 십(十)자 모양의 길이 있거나 명당 중심에 정(井)자 모양의 길이 있는 것은 모두 꺼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념들이 집터를 잡거나 조원(造苑)을 하는 데에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조원은 신림(神林)이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환웅천왕이 태백산 위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 하여 건국신화는 신림에서 시작된다.
이는 삼국시대 산악신앙과도 연결되며, 산신단이나 국사당(國師堂)·서낭당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신라의 계림(鷄林)이나 천경림(天鏡林)·신유림(神遊林)도 모두 신성한 신림이다.
삼국시대 왕궁의 조원은 모두 화려한 규모로 조성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391년 진사왕이 궁내에 못을 파고 기이한 새와 이상한 화초를 길렀고, 동성왕은 500년 웅진의 궁성 내에 못을 파고 임류각(臨流閣)을 세웠으며, 무왕은 634년 궁남지(宮南池)를 조성하고 못가에 버들을 심고 못 속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왕궁 터는 평양 대성산 밑의 안학궁(安鶴宮)터인데, 이를 발굴한 결과 남궁·중궁·북궁·동궁·서궁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으며, 이 궁의 서쪽과 북쪽 및 동남쪽에서 궁원 터가 발견되었다.
신라의 궁원으로는 경주 안압지(雁鴨池)가 발굴되었는데, 안압지는 674년(문무왕 14)에 조성된 신라 동궁의 원지(苑池)이다. 사방 190m 정도의 정방형 공간에 1만5658㎡의 연못을 파고 직선과 곡선을 이용한 지안(池岸)을 쌓았다.
못 속에는 방장산·봉래산·영주산을 상징한 삼신도가 있고, 못 동쪽과 북쪽에 무산(巫山) 12봉을 상징한 가산이 있으며, 서쪽과 남쪽에 임해전(臨海殿)을 비롯한 궁전을 배치하였다. 못가에는 괴석을 절묘하게 배치하고 진귀한 화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안압지는 바라보는 기능을 가진 상징주의적인 축경식조원(縮景式造苑)으로, 바다를 상징한 못 속에 신선의 세계관이 펼쳐져 있다.
신라 이궁(離宮)의 터인 경주 남산 서쪽계곡의 포석정지(鮑石亭址)는 통일신라의 유적이다. 전복 형태의 굴곡진 수로가 돌에 파여 있어 물 위에 술잔을 띄워 흐르게 하면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의 기록처럼 시를 짓는 놀이를 하던 곳이다.
발해의 궁원은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동경성(東京城)내에 756년(문왕 20) 조성된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의 유적에서 발굴되었는데, 연못·가산·정자 터들이 드러났다. 고려의 궁원은 대단히 화려하였는데, 문헌으로 보면 통일신라의 조원을 계승한 것 같다.
조선의 서울 왕궁들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터를 잡고 있어 주산인 북악산(北岳山)을 등지고 서에 백호인 인왕산(仁旺山)과 동에 청룡인 낙산(駱山) 줄기가 뻗어내렸고 남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다. 그리고 서서북의 방위에서 흘러내려 동동남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명당수인 청계천이 있고, 동으로부터 와서 서로 흐르는 객수(客水)인 한강이 있어 모두 길(吉)한 형국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 내에는 모두 북에서 시작해 남으로 흐르는 명당수가 외당(外堂) 앞을 흐르고, 이 명당수 위에는 궁마다 금천교·옥천교 등 돌다리가 놓여 있다.
궁의 배치는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기본형이며,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에 의해 배치되었다. 신하가 활동하는 외조공간(外朝空間)에는 느티나무·회화나무·버드나무 등 수림과 어구(御溝: 궁내 개천)·연못 등이 있다. 왕이 정치하는 치조공간(治朝空間)인 정전·편전 공간은 조원이 없다.
왕족이 생활하는 연조공간(燕朝空間)의 침전후면은 화계(花階)로 조성되었으며, 연조의 후면이 휴식하고 유회하는 조원공간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창덕궁 후원인 비원(祕苑)으로, 그 면적은 약 30만㎡에 이르는데, 1405년(태종 5) 창덕궁이 조성될 때 작은 규모의 궁원이 만들어졌고, 1463년 세조가 일차로 넓히고 1503년 연산군이 더 확장하였다.
이 비원 내에는 역대제왕들이 조성한 여러 형태의 정자와 연못, 괴석과 누각, 민가·어정(御庭)·화목[苑木]·화담·보도·계류 들이 배치되어 있다.
비원의 특색을 보면, 산세를 허물지 않았고 곳곳에서 맑고 찬 지하수가 솟아난다. 연못형태는 방형(方形)이 기본이며, 수목은 계절의 변화가 민감하고 자연스러운 수림이 되도록 길렀으며 관상수같이 전지하는 나무가 없다.
또한 괴석은 석대에 받혀 건물 앞에 배치하고, 정자나 누각은 자연지세를 억누르게 배치되지 않았으며, 깊은 산세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 비원은 자연주의 조원의 특색을 잘 간직하고 있어 사람이 자연 속에 동화되게 만들었다.
경복궁의 경회루 방지는 1만 4464㎡로 각 세개의 방형섬과 돌다리, 장엄한 누각이 조화 있게 어울린 조선시대 원지(苑池)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아미산의 화계와 화전굴뚝 및 자경전의 십장생장식 굴뚝과 화담 향원지와 향원정의 공간은 우리나라 화담의 조원적 기능과 조선 정궁(正宮)의 기본적 배치를 잘 보여준다.
사원은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옮겨가며, 정토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절 앞에 구품연지(九品蓮池)가 조성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주 불국사 마당에 묻혀 있다. 사찰의 다원(茶苑)으로는 대흥사(大興寺)일지암(一枝庵)의 다원이 대표적이다.
서원이나 유학자의 별서(別墅)는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에 건립한 무이정사를 동경하는 조원이 베풀어졌으며, 자연에 은둔하는 절의 있는 선비의 정신을 반영한 자연주의 조원이 조성되었다.
소수서원(紹修書院)·도산서원(陶山書院)·옥산서원(玉山書院)·고산석담구곡·소쇄원(瀟灑園)·다산초당(茶山草堂)과 보길도의 부용동 유적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소박한 건물과 연못 주위에 송·죽·매·난·국 등의 격조 높은 화목들이 심어졌다.
누원(樓苑)으로는 남원 광한루(廣寒樓),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 삼척 죽서루(竹西樓), 평양 부벽루(浮碧樓) 등이 유명하다. 조망의 기능을 기본으로 하여 강변의 경승에 자리잡아 강물과 벼랑, 연못과 수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민가(民家)는 배산임수하는 터에 자리잡아 마당 가운데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으며, 상류 민가는 집 앞에 연못을 조성하고 화목을 많이 심었다. 일반 농가는 감·대추·배·모과·앵두·석류 등 과일나무를 많이 심었다.
능묘(陵墓)는 삼국시대의 것은 들이나 강변에 많고, 풍수지리설이 들어오면서 산수 방위를 찾는 명당자리에 조성되었다. 능묘 주위는 삼국시대부터 송림이 울창하였다.
우리나라 조원의 특색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 인간이 자연 속에 동화되는 자연주의 조원이 발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화목은 소나무·느티나무·감나무·대나무·매화·연꽃 등이었으며,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또한 물을 이용한 연못을 즐겨 만들어 방지(方池)·곡지(曲池) 등 여러 형태가 조성되었으며, 못가에 정자나 누각이 배치되고 괴석이 설치되었다. 길은 직선을 피해 지세에 따라 굽이굽이 돌아들게 만들고, 담장은 사람의 키에 비례해 위압감을 주지 않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조원은 화려한 화포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담담한 자연의 순리를 따라 인간의 심성을 순화하고 수신하며 즐기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미술로 표현된 자연
우리나라의 미술과 전통적 자연관
미술은 일차적으로 객관적 대상인 자연을 소재로 한다. 우리나라의 미술은 우리의 환경인 한반도의 자연을 다루게 된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 주변 민족과의 상호교류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데, 우리나라는 특히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한문화(漢文化)가 우리의 자연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크게, 이른바 중국문화권에서 자란 자연관을 모체로 하고 있다.
중국사람들은 일찍부터 자연을 천이라는 개념으로 일컬었으며, 또 이것을 천(天)·지(地)·인(人)이라고도 세분해 생각하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 조상은 가장 가까운 땅[地]을 미술의 소재로 다루어오는 가운데, 중국의 전통적인 자연관에 따라 이를 산수라고 하였다.
한편, 중국사람들의 산수에 대한 인식은 음양오행설의 발전으로 산수화에서 산과 물을 하늘과 땅보다 기본적인 소재로 생각하였다. 산과 물은 풍수설(風水說)의 발전과 더불어 산의 기는 산맥(山脈), 물의 기는 수맥(水脈) 등으로 불리어 여러 자연 현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산수화의 소재가 된다.
다른 한편, 동양인의 자연관은 유가(儒家)와 노장사상에 따라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하나라는 생각이 깊었고, 특히 노장철학에 따라 자연을 인간의 귀의할 곳, 안식처로 생각해 더욱 산수화가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깊은 산과 물은 도교의 신선사상의 영향으로 불로장생의 이상향임은 물론 번잡한 속세를 떠나 심신의 안식을 얻는 곳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옛 선비들이 그리던 곳으로 산수 속에 묻혀 사는 은둔자의 모습을 자연을 소재로 하는 그림 속에 나타내고자 하였으므로 더욱 많이 제작되었다.
표현 소재로서의 자연
산수
동양인의 전통적 자연관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대략 삼국시대부터 자연 중에서 특히 산수에 대한 관심을 미술로 표현하였다.
부여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文塼)은 그 좋은 예로, 여기에서는 깊은 산 속에 불교의 절이나 도관(道觀 : 도교의 절)으로 생각되는 곳을 향해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는 한 은둔자를 볼 수 있는데, 전돌[塼]로 구워진 이만한 실용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에 상당한 그림이 유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리의 산천 자체를 표현한 그림으로서는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 전기를 거칠 때까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중국의 예를 보아, 실용적이었던 지도나, 산천에 제사지낼 때 쓰던 의식용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우리나라의 산과 강이 그려졌을 것이다.
옛 기록에 보면 「탐라화산도(耽羅火山圖)」가 있고, 고려 때에 오면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예성강도(禮成江圖)」·「금강산도」 등이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조에 오면 특히 17세기경부터 우리나라 산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다. 이런 관심은 사행(使行)·기행(紀行) 등은 물론 공무로 지방을 출장하는 관료·선비들의 기행시(紀行詩)와 그림을 통해 주로 나타난다.
18세기에 활동한 정선(鄭敾)은 실경산수화가로 유명하다. 금강산, 서울 근교와 한강, 영남지방의 명승고적(嶠南名勝帖), 평양·경기 지역을 돌아다니며 많은 실경산수화를 제작하였다.
정선이 1751년(영조 27)에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종래의 어렴풋한 자연 묘사에서 크게 벗어나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자연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계절과 기후의 변화에 따른 우리 산천의 모습을 특징 있게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감각은 18세기 이후 크게 발전한 풍속화의 유행과도 깊은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풍속을 나타내는 속화 속에도 우리의 자연이, 특히 도시와 촌락 등이 묘사된다.
이제부터는 관념적 산과 물이 아니고 남산·백악산(白岳山)·안현(鞍峴)·남한산성은 물론 그 지역에 포함되는 건물이라든가 성벽, 그리고 많은 명승지들, 그 중에서 장안사(長安寺)·해인사(海印寺) 등 불교의 사찰 경내외가 그려진다.
금강산도는 내산(內山)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지만(金剛全圖), 외금강이나 해금강의 명소들이나 관동팔경에 나오는 명승지들도 그려진다. 따라서, 정자(叢石亭)·바위(通川門岩)·굴(金蘭窟)·폭포(萬瀑洞) 등은 물론, 여기에 실제로 서식하는 조류·식물 등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실제 경치를 묘사하는 계회도(契會圖)·구곡도(九曲圖) 외에도 17세기 이후 선비들의 갖가지 여행을 통해 본 여러 고장(七寶山·平壤城·舍人巖·華藏寺)과, 놀이와 모임에서 보는 정원(檀園)·정자(太古亭) 등도 있다.
기록도(記錄圖)에 해당하는 그림 중에는 사행에 따르는 화원들이 지나간 도시·나루·항구(釜山浦津·對馬島) 등이 있으며, 정조의 수원성 행차의 기록화는 수원성이나 능원(陵園)의 모습은 물론 당시 한강을 건너는 데 설치한 거대한 주교(舟橋)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는 특히 한강을 중심으로 사찰·나루·봉화대(烽火臺)·관청(牛川分院)·관아(陽川縣衙)·고기잡이(杳湖觀漁) 등 자연과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역사적 현실이 많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전통은 그 뒤 김홍도(金弘道)에 이어지며 20세기 초기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온다. 그 중에서도 금강산도는 계속해서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그림의 소재가 되며(卞寬植), 20세기 초에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 의해 금강산이 많이 그려졌고, 그 뒤 수채화와 유화로도 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명산대천이나 특정 명승지에 대한 화가들의 관심은 이른바 양화(洋畫)의 도입과 자아 중심적인 화가들의 개성의 발전으로 거의 모든 자연 풍경이나 대상들로 확산된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특히 정물화의 발달과 인체와 현실에 대한 관심의 증대, 그리고 추상화 경향으로 산수화는 과거의 상징적 의미를 잃고 화면구성을 위한 대상이나 전통적 맥락을 이루는 소재로서의 구실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식물화와 동물화, 기타
우리 회화에서 산과 물을 제외하고 자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허다하지만, 대략 신앙과 문화적 관습에서 관심을 끌어온 것, 그리고 향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신앙상으로 관심을 끈 것은 신선사상을 들 수 있다. 이것을 전통문화 속에서는 십장생도(十長生圖: 십장생은 해·달·거북·구름·산·물·사슴·학·버섯·소나무를 일컬음)로 나타내며, 위로는 지배자인 왕으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장수하는 소망을 채워주는 대상으로서 자주 그려졌다.
십장생도와는 별도로 신선사상으로 표현되는 산신·호랑이·소나무·영지는 불교와 도교의 장생술(長生術)의 습합 과정에서 사찰 벽화나 신선 탱화(神仙幀畫)로 제작된다.
신선사상은 이 밖에도 무속도(巫俗圖)로 등장하며 굿판의 중요한 장치가 된다. 그 중에서도 신라 때의 솔거(率居)가 그렸다는 황룡사 소나무벽화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문화적 관습으로는 문인화(文人畫)의 한 부분으로 예로부터 선비들 사이에 즐겨 다루어진 사군자(四君子)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대·국화·난·매화는 중국에서 전래한 특별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관념적인 것에 치우친 대상물로, 대상 자체의 특성을 군자들의 도덕적 심성이라든가 절개에 비유해 즐겨 그려졌다.
군자상(君子像)으로서 소나무의 빈번한 표현은 특히 선비의 정신을 반영하는 일면도 있지만 우리 환경의 식물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친밀성에서도 온다. 그러므로 소나무는 향토적인 것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보아온 대상으로서의 소나무에는 정선의 유명한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가 있다. 그 밖에 그는 우리 주위에서 보는 소나무를 아주 빈번히 그림소재로 쓰고 있으며, 이른바 실경산수화에서 그 특징을 아주 간략하지만 잘 나타내고 있다.
다음으로 향토적인 식물로 거론될 만한 것이 별로 없지만, 조선조 청화백자(靑華白磁)에서 볼 수 있는 패랭이꽃은 특별한 예이다. 이러한 꽃이나 식물을 대상으로 즐기는 그림을 화훼라고 한다. 사생(寫生)으로서의 꽃과 식물은 아니지만 후기 풍속도에서는 진달래가 그려지기도 한다.
동물로서는 소·말·개·닭 등이 후기로 오면서 자주 다루어지며, 나비와 고양이의 경우는 남계우(南啓宇)·변상벽(卞相璧)과 같은 전문화가도 있다.
우리 자연으로서의 기타 대상이 될만한 것으로는 바위가 있다. 중국에서 건너온 문인화 취미의 태호석(太湖石)이나 괴석도(怪石圖)가 추상적이었다면, 정선 이후에 다루어지는 실경 속의 바위(翠屛巖·大隱巖)들은 향토적 자연대상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식물이나 동물 또는 바위 같은 자연도 근대 이후 현대에 와서는 상징적 의미가 쇠퇴하고 화폭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일반화된다.
신화의 자연
우리 신화에는 ‘우주창조’도 없고, 또한 ‘초월신(超越神)’도 없다. 단군(檀君)의 아버지인 환웅(桓雄)은 하늘(桓因)의 아들이며, 주몽(朱蒙)의 아버지 해모수(解慕漱)도 하늘(天帝)의 아들이다. 환웅과 해모수는 천제자(天帝子)이다. 따라서 그 아들들, 즉 단군과 주몽은 천제손(天帝孫)이다.
여기에 ‘천제-천제자-천제손’의 신통보(神統譜)가 성립한다. 천제손은 상징적으로는 ‘일자(日子)’의 존재이다.
천제손인 주몽이 엄수(淹水)를 향해 “나는 천제손이고 하백외손(河伯外孫)이다.“(東明王篇), “나는 일자이고 하백지손(河伯之孫)이다.”(魏書)라고 외친 일에서 천제자는 곧 일자임을 알 수 있다.
유화(柳花)는 우발수(優渤水)의 수신이요, 알영은 알영정(閼英井)의 수신이다. 선도성모는 선도산(仙桃山)의 산신이요, 정견신모(正見神母)는 가야산의 산신이다.
유화·선도성모·정견신모는 모두 일광감정(日光感情)으로 회임해 각각 주몽·혁거세·수로를 낳았다. 이렇듯 건국신화의 신은 자연(天·日·山水) 바로 그것으로, 여기에서 고대인의 자연숭배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신화의 신은 자연 안에 존재한다. 자연을 통일적으로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초월신은 없다. 즉,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그 자연을 인간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며, 그리하여 인간을 인격적으로 다스리는 초월신, 즉 자연 밖에 존재하는 신은 없다(초월신은 없지만 자연숭배에서 중심은 있다. 그것은 날·해=日이다.).
이 ‘자연숭배=자연관’은 자연환경, 즉 풍토의 소치인 듯하다.
그러나 풍토가 곧 신(그리고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계기로서 문제시할 뿐이다.
우리 신화는 세계를 ‘자연의 생기현상(生起現象)’으로 보았고, 자연을 ‘힘(에네르기)의 수지균형(收支均衡)’으로 보았다. 그것은 감성의 체험이지, 이성의 사고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화의 자연관은 “자연이 곧 신이다.”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
향가의 자연
향가에서 자연은 아직 정취화(情趣化)되지 않았다. 그 자연은 대체로 영적(靈的)인 것으로 사유되었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의 “모래 가른 물가에, 기랑(耆郎)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어, 일오나리 자갈밭에서, 낭(郎)이 지니시던 마음의 갓을 쫓고 있노라.”(김완진 해독)에서 그러한 사유를 읽을 수 있다.
일오나리는 아리나리[閼川]의 지류로 보인다. 아리나리는 신라인의 영수(靈水)이다. 혁거세(赫居世)는 이 나리가의 샘(東泉)에서 목욕하고 왕이 되었고, 알영도 이 나리에서 목욕하여 닭부리를 제거할 수 있어서 왕비가 되었다. 신라인들은 서약을 할 때 ‘아리나리’에 걸기도 하였다.
사영지(四靈地)의 하나인 북산(北山) 밑으로 흐르는 것이 아리나리로 ‘일오나리의 자갈밭’은 영적인 곳이다. 따라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은 그곳 돌 하나하나에 스며 있을 것이니, 신라인은 그것을 좇는 것이다.
서약을 잣나무에도 걸었음은 신충(信忠)의 「원가(怨歌)」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잣나무는 서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시들고 지켜지면 되살아난다. 기파랑은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어.”라고 잣나무로 상징화되었다.
아리나리 물가의 잣나무는 특히 영수(靈樹)로 신앙되었을 것이며, 기파랑은 이 잣나무숲에서 고깔(화랑)로 추대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 수풀을 보자마자 ‘기랑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어. ’라고 감격을 터뜨리는 것이다.
서약을 나무(혹은 물·돌)에 건다는 것은 ‘혼=골’을 나무에 매는[結] 것으로서, 그것은 혼의 영화(靈化)를 꾀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자연관에서는 자연은 정취화, 즉 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키기가 어렵다. 그 자연은 상징(원형 상징)이기가 쉽고, 신앙의 상징으로서의 자연 그것은 직접적인 존재론이다.
향가의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의 교감(交感)·등질(等質)’의 감성 체험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신라는 명산대천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질차(秩次)해 이 삼사를 국가의 사전(祀典)으로 삼았다.
이것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예제(禮制)이다. 그렇지만 고유의 자연신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토함산을 동악대왕(東岳大王)으로, 선도산을 서악대왕(西岳大王)으로 봉작한 것이 그것이다. 토함산은 탈해신화의 본산이며, 선도산은 선도성모신화의 본산이다.
그런데 자연숭배가 예(禮)로 제도화되면서 변화를 일으켰고, 그 변화는 또한 불교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어차피 자연숭배는 변화를 맞게 마련인데, 그것은 영원의 자장(磁場)은 아니기 때문이다.
속요의 자연
속요(俗謠)에서 자연숭배의 변화를 엿볼 수 있고, 또한 자연 감정의 등장을 볼 수 있다. 「동동(動動)」의 “정월 나릿므른 아으 어져 녹져 논, 누릿 가온 나곤 몸하 올로 념셔.”(1월장)에서 자연숭배의 해체를 읽을 수 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가른다. 그 순간 맑디맑은 허무의 마음에 쨍하고 금이 간다. 고독의 거울 위에 떨어지는 자연의 순간적 변화가 예리하게 잡혀 있다. 이것은 완전한 개성 서정(個性抒情)이다.
「동동」은 달거리로서 매달 그 상황을 세시풍속에 걸고 있다. 이 1월장은 대보름날의 답교(踏橋)의 상황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달거리의 본질은 매달의 운수를 ‘축(祝)’하는 것으로, 답교는 겨울을 내쫓고 봄을 불러들이는 ‘축’의 제의(祭儀)이다.
그런데 1월장에는 그러한 축의 사유가 없다. ‘얼고저 녹고저 하는 냇물’ 속에 부침하는 겨울(얼음덩이)의 단말마적 발악을 본다면, 그리고 횃불을 밝혀 그것을 내쫓는다면, 그래서 봄의 소생을 선점(先占)한다면, 어찌 ‘누릿 가온데 나곤 몸하 하올로 념셔! ’라고 고독을 절규할 수 있는 것인가.
「동동」에서는 다가오는 봄의 발자국 소리를 분명 듣고 있으나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자연이법(自然理法)과 인간 운명과의 괴리를 절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은 깨지고 마는데, 그 깨진 틈 사이에 흐르는 개인의 시간, 그것이 자연 감정을 낳고, 여기에서 개성 서정이 성립한다.
「청산별곡(靑山別曲)」에도 자연숭배는 없다. 1장은 “살어리 살어리랏다/청산(靑山)애 살어리랏다/멀위랑 래랑 먹고/청산애 살어리랏다.”고 청산을 무척이나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곧 이어 2장에서는 “우러라 우러라 새여/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널라와 시름 한 나도/자고 니러 우니노라.”라고 청산을 통곡하고 있다. 이렇듯 청산에 대한 감정은 단일하지 않다.
4장은 “어듸라 더디던 돌코/누리라 마치던 돌코/믜리도 괴리도 업시/마자서 우니노라.”라고 청산 속에서 절대절명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다.
내용은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는 청산 속, 적막의 장막이 시시각각으로 죄어온다. 장막의 한 귀퉁이에 구멍을 뚫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다. 어디라는 방향도 없이, 누구라는 목표도 없이 무작정하고 허공의 장막을 향해 돌을 던진다.
「청산별곡」에서는 자연이법에, 그리고 인간 운명에 구멍을 뚫고자 몸부림한다. 그러나 구멍은 뚫리지 않고, 장막에 부딪혀 퉁겨져 나온 돌에 맞아 통곡을 터뜨린다는 내용이다.
청산에 들면 고독이 풀어지리라 여겼는데, 정작 들고 보니 고독은 더욱 심해진다. 이렇게 되면 자연이법과 인간 운명은 어긋난다.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의 교감(등질)’에 밀착되었던 집단 감정은 깨지고, 대신 개인 감정이 자각된다. 이 자각에서 자연 감정은 배태된다.
「동동」과 「청산별곡」에는 원형 상징으로서의 자연숭배는 없다. 대신 자연 감정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자연 감정은 ‘친애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허무의 감정’이다. 불교의 무상관(無常觀)에서는, 청산은 숭배의 황홀은 커녕 어떠한 미적 감동도 불러일으킬 여지가 없는 것으로, 그것은 시조·가사의 자연 감정과는 판이하다.
시조·가사의 자연
조선의 시조·가사에 이르면 자연 예찬이 풍미해 강호가도(江湖歌道)라는 문학사조를 이룰 만큼 자연은 매우 풍부해진다. 따라서 자연관도 뚜렷해지고 또한 자연 감정도 다양하게 꽃피게 된다.
산수문학은 시조와 가사에서 형성되었다. 조선 사인(士人)은 상자연(賞自然), 곧 음영풍월(吟咏風月)을 그들의 풍류로 삼았다. “옛사람 풍류 미가 못미가”(상춘곡)와 “왕래풍류(往來風流)를 닐어 므슴고”(도산십이곡)는 그것을 단적으로 말하여준다.
신라인의 풍류는 현묘(玄妙)이고, 고려인의 풍류는 유상(遊賞)인데, 이것에 비하면 조선인의 풍류가 상자연이라는 것은 특이하다. 그만큼 조선인은 자연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가졌다.
자연을 상(賞)함에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자연을 ‘이(理)의 표상’으로 보는 태도이다. 이황(李滉)은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아 어늬 그지 잇슬고”(도산십이곡)라고 하늘을 나는 소리개와 연못에 뛰노는 고기, 물 속에 비친 구름그림자와 햇빛을 보고 감동해마지 않았다.
그것은 조화유행(造化流行)의 ‘활발(活潑)’을 본 때문이다. 활발을 통해 자연의 거짓이 없는 자태, 있는 그대로의 드러남, 즉 천지화육(天地化育)의 지성(至誠)을 보고는 옷깃을 여민다.
이렇듯 자연의 이를 보았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연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곧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이다. 자연에서 이를 보는 것은 그것으로써 인성(人性)을 도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황은 “옛 산림(山林)을 즐긴 자를 보건대 둘이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섬겨 즐기는 자가 있고,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길러서 즐기는 자가 있다. 전자를 따른다면 결신난륜(潔身亂倫)에 흘러 심한즉 짐승과 무리지어도 그릇되다고 여기지 않음이 두렵고, 후자를 따른다면 좋아하는 바는 찌꺼기 뿐이요, 그 전할 수 없는 묘(妙)에 이르러서는 구하면 구할수록 얻을 수 없으니 어찌 즐거움이 있으리요. 그러나 차라리 후자를 위해 힘쓸지언정 전자를 위해 스스로 속이지는 않겠다.”(도산잡영기)고 논해, 자연에서 도의(이)를 찾아내어 인성(심성)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황의 태도는 유가의 자연관을 보여준다. 유가에서는 ‘현허를 그리워하고 고상을 섬기는’ 도가(道家)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무위자연의 자연관은 인성의 도야를 소외하기 때문이다.
윤선도(尹善道)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물·돌·솔·대·달을 벗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그치지 않음’, ‘변하지 않음’ 등의 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은 객관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이념(절대정신)의 표상이 된다.
이처럼 유가의 자연관은 자연을 신비(신앙)나 낭만·허무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물아일체는 사람과 자연이 무매개적으로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의 이를 체찰(體察)하는’ 과정을 통해 합일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과 더불어 존재한다.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롬과 가지라.”(도산십이곡)는 구절도 유가 자연관의 실제성을 보여준다.
둘째는 자연에게 흥(興)을 느끼는 태도이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자연 현상에서 흥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조선의 산수문학은 그것을 유별나게 강조하였다.
“임천(林泉)이 깁도록 됴흐니 흥을 겨워 노라.”(고산구곡가), “수풀에 우 새는 춘기(春氣)를 내 계워 소마다 교태(嬌態)로다/물아일체어니 흥인들 다소냐.”(상춘곡), “쇼 머기 아들이 석양의 어위 계워 단적(短笛)을 빗기 부니”(성산별곡), “고주사립(孤舟蓑笠)에 흥겨워 안잣노라.”(어부사시사) 등이 그러한 것이다.
「도산십이곡」의 “사시가흥이 사롬과 가지라.”의 흥이 이념적 감동의 것이라면, 위에 든 흥들은 미적 감동의 것이다. 이 흥의 내용인 자연미는 ‘담박미(淡泊美)’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담박미는 표현상으로는 묘사, 즉 형사(形似)를 억제한다.
「고산구곡가」는 고산의 산수를 읊은 것인데, 정작 경관의 묘사는 거의 없다. 그저 담담하게 경(景)을 서(敍)했을 뿐이다. 일곡의 “일곡(一曲)은 어오 관암(冠巖)에 비쵠다/평무(平蕪)에 거드니 원산이 그림이로다/송간(松間)에 녹준(綠罇)을 노코 벗오 양 보노라.”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아침햇살 속에 펼쳐지는 경치를 두고 아무런 묘사도 하지 않았다.
윤선도의 “우 거시 버구기가 푸른 거시 버들숩가/어촌 두어 집이 ○속의 나락드락/말가 기픈 소희 온갖 고기 ○노다.”(어부사시사)도 역시 그런 것이다. 뼈꾸기·버들숲·어촌·소·고기 등의 경을 담담하게 서하였을 뿐이다.
이이(李珥)와 윤선도는 자연의 미를 그저 객관적 인상의 것으로서 제시만 했을 뿐, 그것을 아기자기하게 서정화(抒情化)하지 않았다. 즉, 자연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자연미는 담박하게 마련이다.
조윤제(趙潤濟)는 이것을 “꽃이요 나무라는 그 개개의 특정한 미가 아니라 꽃 일반, 나무 일반에 대한 미다.”고 논하기도 하였다. 감정이입의 억제, 이것은 조선 사인의 미 의식이고 또한 자연 감정이다.
조선의 산수문학에서 비애나 허무의 창백한 서정과 낭만이나 방일(放逸)의 ‘동탕(動蕩)하는 서정’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이 자연 감정에 말미암는다. ‘감정이입의 억제’는 곧 ‘개념 인식의 억제’이기도 하다.
담박미는 내용상으로는 은근함과 덤덤함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결국 박(樸)을 관상(觀想)하기 위함이다. “동창(東窓)이 밝앗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 아희들은 상긔 아니 니럿냐/넘어 사 긴 바틀 언제 갈려 니.”(남구만)에서는 농촌의 정취가 은근하게 풍겨나온다.
‘동창이 밝앗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말을 듣게 되면 늦잠 자던 머슴아이는 맨발로 뛰어나와 쟁기를 메고 밭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 말의 은근함에 감동되기 때문이다.
“대초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리며/벼 뵌 그루에 게 어이 리고/술닉 체장사 도라가니 아니먹고 어이리.”(황희)
이 노래에서 ‘밤은 어이 듯드리며’, ‘게 어이 나리고’의 ‘어이’에서 가을 농촌의 즐거운 정취가 은근하게 풍겨 나온다. 또한 ‘대추·밤·그루·게·체장사·술’ 들은 가을농촌에는 으레 있는 것들로, 돌담과 사립문과 더불어 있는 농촌의 생활이다.
이 생활 속에서 담불담불 쌓인 노적가리를 집집마다 볼 수 있을 듯한 것은, 이것들(생활)이 그저 덤덤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압개예 안개 것고 ○뫼희 비○다/밤물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온다/강촌(江村) 온갓 고지 먼 비치 더옥 됴타.”(어부사시사) 여기에서는 꽃의 색을 말하지 않았고 그저 ‘먼’ 빛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 거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거리, 대상에서 초연(超然)된 거리이다. 이 거리가 은근함과 덤덤함을 낳는다.
자연의 미에 흥겨워하지만 그 미가 격정적 서정에 흐르지 않고 은근함과 덤덤함의 담박을 유지한 것은 조선 사인의 금욕주의적 자연 감정에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된다.
중요한 점은 이 담박미가 정감의 분방한 발로를 제어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의 실제였다. 그런데 그것은 때로는 유미(唯美)에 침잠해 박(樸)을 관상하기도 하였다.
“지당(池塘)에 비 리고 양류(楊柳)에 인제/사공은 어듸 가고 ○만 엇고/석양에 무심 갈며기 오락가락 더라.”(조헌)이 작품의 색조는 어둡고 명상적인 한색(寒色)이다. 이 한색이 어떠한 심의(心意)의 표상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한색에서 은근한 그 어떠한 미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미의 ‘박’이다.
“내집이 길○냥여 두견이 낫제 운다/만학천봉(萬壑千峰)에 외사립 닷앗는듸/좃 즛즐 일 업서 곳 지는 조오더라.”(무명씨) 너무나도 조용하다. 시간이 멈추어져 있다. 그 잠은 태고의 정적을 꿈꾸고 있다. 그 정적이 덤덤한 미를 낳는다. 그것 역시 유미의 ‘박’이다.
위 두 작품은 진경산수가 아니라 의구(擬構)된 자연이다. 이 양식공간(樣式空間)에 들면 유미의 ‘박’을 마음껏 관상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염담(恬淡)의 세계에 잠길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도가의 자연관이 있고, 그것은 또한 상자연의 두 태도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박의 관상은 조선 산수문학에 있어서는 예외적인 것이다. 조선 사인은 원칙적으로 그런 것은 기휘(忌諱)하였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