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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추억과 감회
1. 학창시절의 추억과 자칭 언더우드 맨
먼저 저의 프로필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농촌 출신인 저는 1949년에 서울에 경신중학교에 입학해서 2학년에 진급하자 다음해 6.25발발로 학업을 멈추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1.4후퇴로 피란중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한국전쟁 동족상잔의 6.25 참전을 겪느라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24살 나이에 저는 당시 내신성적 제도라는 입학제도 덕분으로 별 따기보다 힘든 연세금자탑을 입학시험도 치루지 않고 57학번으로 평생 자랑스러운 연세인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이미 말했듯이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중학교와 어더우드가 설립한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세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이만하면 언더우드 맨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언더우드와의 인연은 또 하나있습니다. 농촌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는 1907년에 창립된 고향교회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학년부터 언더우드가 창립한 새문안 교회에서 세레를 받고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성가대 교회학교 교사 교회학교 유년부 지도목사, 고등부 지도목사, 새문안 보이스카웃 대장, 3년간 새문안교회 임시당회장을 역임했으니 거기다가 언더우드가 설립한 중.고등학교에서 37년을 교목으로 봉사했으니 평생을 언더우드와 함께 살았으니 누가 보나 저는 언더우드 맨임을 사진있게 말할 수 있어 우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차제에 영원한 연세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저는 자칭 영원한 언더우드맨임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감사합니다.
2. 학창시절의 추억과 감회(연세대학 시절)
학창시절의 추억과 감회를 말하라고 했는데 딴 소리만 했네요 그러면 이제부터 연세신학대학 학창시절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말해보겠습니다.
1) 울밑에선 봉선화
입학하자 드넓은 노천극장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션이 있었다. 모두 흥겨운 시간중에 맨 뒤에서 6째 줄 좌측에서 여섯 번째 학생이 지적이 되었다 바로 나였다. 일어서서 울밑에서 봉선화야 울밑에서 봉선화야를 계속 반복하다가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고 크게 소리내여 불렀다, 만장한 모든 학생들이 바수는 첫다. 웃기기 위한것이고 얼떨결에 부른 노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 흥겨운 자리에서 일제하에 부르던 저항가를 불렀던가 좀 엉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혹시 일제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탓이 아닌가??
2) 1학년때는 악마 지금은 천사
당시 연신은 한국교계에서는 신신학이라고 하는 평이 있었고 모 교단에서는 연신출신을 신신학이라고 해서 거부하는 그러한 풍토였습니다. 그 연유인즉 교단 신학에 비해서 학문이 진보적이고 자유로왔기 때문이었다. 연세신학과 교실에서는 시간마다 학생들과 교수들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교회에서 훈련된 신앙과 교수님들의 신학교 성경교육내용이 이해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생은 벌떡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교수님에게 항의를 하는 학생도 종종 있었습니다. 요나서가 휙션이냐 논휙션이냐, 홍해냐 갈대바다냐, 역사적 사실이냐 메타포냐 등등은 교회에서 목회자들로부터 들은 성경해석하고는 전혀 생소하고 믿을 수 없는, 80년대 90년대까지도 아니 지금까지도 교단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총회에 교수를 고발하는 등 상상도 못할 이슈들이었던 것이다. 3학년때 일이라고 기억되는데 하루는 교수님이 교실에 들어오시자마자 맨 앞에 앉은 한 학생이 Teacher(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 왜그러시나요 하고 교수님이 답하자 대뜸 그 학생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선생님 우리가 1학년때는 선생님이 악마같았는데 지금은 천사처럼 보입니다“라고 해서 모두 배꼽을 잡은 일이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수가 가르친대로 답을 하면 B를 주고 다른 답을 하면 A를 준다는 한태동교수의 교수방법은 연신학문의 폭이 구도자들의 사고의 폭을 얼마나 깊고 넓게 풍성하게 했다는 것에 오늘날 포스트머던, 다원화 시대를 살아가는 후학들에게 신앙의 폭을 넓혀주고 신앙생활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한 것이다. 나는 두 학교의 신학수업을 통해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폭넓은 구도자가 된 것을 만족하고 복스럽게 생각한다.
3) 시대를 앞서 가시는 교수님들
교회사를 강의하신 한태동 교수님이 하루는 반에 들어오셔서 대뜸하시는 말씀이 생물학과에 가서 생물에 관한 강의를 들어보라고 하셨다. 뜻밖에 제안이었지만 나는 생물학과에 가서 선택과목으로 수상신청을 하려고 했다. 마침 신과 필수과목이 겹쳐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왜 교수김이 생물학을 공부하라고 하셨는지 그 때는 몰랐다. 우리에게 폴틸리히의 문화신학을 가르치신 서남동교수님이 생태학적 신학을 들고 나왔을 때에 비로서 왜 생물공부를 하라고 하셨는지를 깨달았다. 미래를 예측하시고 생태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두라고 하셨던 것이다. 연세신학은 미래를 바라보는 신학이었다.
4) 교수님과 함께 신나는 야구시간
학문만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수업시간도 융통성이 있었다. 선생님 야구해요 하면 교수는 주저함이 없이 학생들과 함께 야구장으로 갔다. 당시 인더어 볼이라고도 하고 쏘프트 볼이라고도 하는 야구공보다 약간 크고 쏘프트한 볼을 가지고 야구 규칙대로 야구놀이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수업도 중요하지만 교수와 학생간에 밀도 있는 친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5) 버스보이콧
버스보이콧트하면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 마틴루터 킹목사가 또 오른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 1년동안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은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클리블랜드 애비뉴 운수회사의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버스는 멈춰섰고, 파크스는 체포되어 벌금형에 처해졌다. 이 일로 몽고메리 시민90%가 버스보이콧에 참여했고 몽고메리 연방법원과 지방법원은 인종분리는 위헌이라고 몽고메리시는 백기를 들었던 사건으로 이 몽고메리의 승리는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흑인 민권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발돋움하게 된다. 1957년 서울 버스회사가 학생 버스운임을 10원에서 20원으로 올리려고 했을때에 연세를 비롯한 서울시내 모든 대학생들이 버스보이콧운동을 벌였다. 당시 나는 서대문에서 학교까지 이미 도보로 등교를 했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이대학생들은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까지 운동에 참가 했다 결국 버스회사가 손을 들고 말았다. 요새는 왜 버스요금이 올라도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는지 학생들이 돈이 많은가 보다
6) 4.19 사자!!!
학창시절의 추억에 4.19를 빼놓을 수 없다. 전교생이 동시에 대강당에 모여서 채풀이 끝나자 신과학생을 필두로 정법대학 등 전교생이 모두 스크람을 짜고 교문밖을 나왔다. 신촌네거리에 왔을 때는 홍대생들이 뒤를 따랐고 서울역을 지난 남대문을 향할때는 세부란스 남학생들이 들것을 들고 여학생들은 흰 까운을 입고 우리행렬 뒤를 이었다. 시청앞을 통화 광화문을 향해 청와대로 가려 했지만 이미 와 있었던 고대시위 학생들에 막혀 우리는 우회를 해서 종로 창경원 비원을 향개 가고 있을때였다. 이미 청화대까지 진출한 서울대학생들중에는 사상자가 나서 엠브란스에 실려 서울대학병원으로 급송하고 그 차 위에서는 총탄에 맞아 붉게 학생의 와이셔스를 흔들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우리 시위행렬은 겁에 질리기도 했지만 더욱 흥분해서 교수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계속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종로경찰서 현관 지붕에서 우리 시위대를 향해 따따따 쏘아내는 총소리를 들으며 광화문 광장에 이르자 현재 종합청사 근방에 나무에숨어서 갈겨내는 총탄에 법정대학생 최인규가 그 자리에서 쓸어졌다. 그 지점에서는 정법대 생들이 우리 신과대앞에 나서서 행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위행렬은 먼춰 앉아 오후 5시까지 연좌시위를 했다. 광화문 사거리에는 탱크가 대포를 빙빙 돌리고 있는 삼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고등학생들 즘 보이는 학생들이 총성이 나는 방향을 향하여 포복으로 가어가고 당시 경기도청 앞길에 한 사람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뛰어가고 있었다. 후에 통계에 의하면 그날 250여명의 시위대들이 총탄에 쓰러졌다, 오후 5시까지 연좌시위를 한 우리연세 시위대는 행렬을 돌려 학교까지 가서 당시 연세1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총장의 연서를 듣고 귀가 했다. 우리의 졸업앨범 카버를 넘기면 4.19사자라는 표제 글이 눈에 확 뜨인다.
7) 4.19 정신
연세학부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교 신대원 졸업반때도 전교학생이 6.3한일비준 반대 3일간 금식기도를 한 다음날 광나루신학교에서 시청앞에까지 진출했다가 경찰권봉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옆구리를 경찰의 무릎으로 채이는 등, 1972년 12월 유신반대 7일금식기도를 하게 된것도 연세에서의 체득한 4.19정신의 영향이었다고나 할까?
8) 장신에서 만난 연신선배 민경배 목사
그리고 한가지 인상은 교수님들마다 민경배 민경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아마 공부를 잘한 모양이고 영국에 유학을 간 수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수님들의 입에서는 민경배이름이 끝이지를 않았습니다. 어떤 선배인데 그렇게 칭찬이 자자한가 했는데 내가 연신을 졸업하고 장신에 편입해서 공부하는중 바로 그 민경배가 신대원 졸업반에 편입해서 같이 졸업을 해서 그 유명한 학부 선배 민경배가 신대원 동기동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민경배 목사는 연세신학을 졸업한 후에도 연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교수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고 기대했던 대로 신학교 총장도 역임했고 한국교회사의 대가가 되었다.
9) 감리교냐? 합동이냐?? 통합이냐???
신학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당연히 목사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4학년 졸업반이 되어 당시 학생과장님 지 목사님과 상담중 연세신학만을 졸업해서는 목사가 될 수가 없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말로만 듣던대로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고모님의 후원과 교회 목사님의 도움을 받고 6.25참전을 하고 군대를 두 번이나 갔다오고 천신만고 끝에 이제 졸업하면 목사가 되는줄 알았는데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유인즉선 연세 신학대학은 교단신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목사가 되려면 교단신학을 다시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단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4년 신학을 한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감리교 목사님은 감리교단 신학대학으로 가라고 권하시고 연신선배중 교회선배인 합동교단 선배 목사는 총신으로 가라고 권하셨습니다. 통합측 교회에서 신앙의 잔뼈가 굵은 저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1때 서울에 올라와 통합측 교단인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의 뼈와 살이진 저로서는 당시 담임목사이신 강신명 목사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잘 됐어 앞으로 목회자는 공부를 많이 해야해”하시면서 장로회 신학대학에 갈 것을 권하셨습니다. 연신을 졸업하면 장신에 본과 2년에 편입해서 2녀만 하면 졸업이 되는 때였는데 마침 그해에 예과2년 보과3년하던 학제가 미국식으로 바뀌어 학부를 졸업하고 3년을 하는 신학대학원 제도 첫해가 되어 별 수 없이 3년을 수학고야 목사고시 자격을 가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연신을 졸업하면 감리교신학대학에 가서 편입해서 1학기동안 교리장정만 이수하면 감리교 목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신졸업생들이 감신으로 가서 감리교 목사가 되었는데 저는 저 혼자만 장신에 가서 3년을 더하고 지금은 없어진 강도사 고시를 거치고 목사고시를 통과해서 장로교 목사가 되어 장로교 계통의 학교인 경신 중.고등학교에 부임하여 37년을 교목으로 은퇴했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맨으로서 장로교 목사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샬롬
2015년 7월 9일
연신57학번
경신중.고등학교 전 교목실장, 현 명예교목.
대한예수교장로회 전 서울노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목전국연합회 명예회장
*** 위 글은 2015년 8월 31일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100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동문회 총무 요청으로 작성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