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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삶을 일치시켜라/김초혜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지금까지 노력해 왔습니다만, 살아오면서 시와 삶이 똑같이 일치하는 시인을 참 보기 힘들었습니다. 시는 좋은데 사람이 그것에 못 미친다든지 사람은 좋은데 시가 못 미친다든지, 또 시는 참 좋은데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그런 시인들만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그런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시인이지만 일찌감치 자각하고 시와 시인이 같게 보이려고 참으로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시인을 한 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는 피천득 선생님이십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우거의 벽에는 '오동은 천 년 늙어도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는 시가 씌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시를 보면서 아무리 늙어도 가락을 지니는 사람이 되어야겠고, 아무리 춥고 배고파도 문학을 팔아서 밥을 먹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른 살쯤에 본 그 시가 30년을 두고 계속해서 저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크게 잘못한 일 없이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시인이 되는 기본 덕망으로
첫째, 순수한 감성을 지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감성을 지니려면 세상에 대해 지나친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남을 미워하거나 생활에 시달리느라 바쁠 때는 시가 잘 안 써지다가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을 때 시가 씌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둘째, 성직자와 같은 고결한 인품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성직자와 시인은 집을 떠난다는 의미에서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직자도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시인도 아무 것도 갖지 않아야만 성직자는 영혼의 양식을 골고루 나누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고, 시인도 그런 고결한 인품을 가져야만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셋째는 무욕(無慾)입니다
. 무욕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욕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 대한 욕심, 경제·명예· 명성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을 때, 인간으로서의 좋지 않은 욕심이 없을 때 비로소 시인으로서의 덕망을 갖추었다고 생각됩니다.
천년 늙어도 제 가락을 지닌 오동처럼 일관성을 지녀야
주위에서 보면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인이나 소설가, 평론가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걸 보면서도, 흔히 시인이나 소설가라는 이유로 용서해 주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명백히 사회적인 삶을 잘못 살고 있는데도 시를 잘 쓴다는 이유로 쉽게 용서받는다면, 이 세상의 도덕 기준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그에 따라 밑에 오는 사람들한테 본받게 할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날에서 오늘에 이르도록 일관성을 지켜 가는 피천득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때로 힘있고 멋진 시를 보여준 어떤 시인인 작품 같지 않게 흐트러진 삶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역사적인 삶을 그르치고 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그 시인이 누구인지는 다 아실 겁니다.
저는 시인이라는 것은 예지자적인 덕목과 선각자적인 덕목을 고루 갖춰야만, 시인으로서의 최상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지자로서의 덕목이라는 것은 인생을 깊이 통찰해 내고, 인간의 괴로움과 고통을 전부 껴안을 수 있는 품성을 가리킵니다. 또 선각자적인 덕목이라는 것은 역사 앞에 부끄러움 없는 글을 써내는 품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지자적인 덕목과 선각자적인 덕목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승화되어 한 편의 글을 낳는 것이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의 윤동주나 이육사, 한용운 선생 들처럼 자기의 몸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민족의 운명을 아랑곳없이 개인의 영달만을 구하여 친일(親日)한 문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과거를 잘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어서, 그들의 사회적인 삶에 대한 것은 슬쩍 눈감아 주고 시만 가지고 평가하곤 합니다. 저는 그런 시인들을 보면 언제나 시가 가짜거나 사람이 가짜구나, 시가 가짜고 사람이 진짜일 수도 없고, 사람이 가짜고 시가 진짜일 수도 없다, 그건 어쩌면 타고난 재주만 가지고 쓴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시는 굉장히 절제된 언어를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절제된 언어를 선택하다 보니까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대단히 절제되고 인간관계에서도 저절로 절제가 갖추어지는 걸 느낍니다. 슬픔이나 기쁨이나 모든 것에서 언어의 절제를 구사하다 보니까 생활까지도 전부 절제되어서 마치 분당에 살면서 섬에 사는 것 같은 고독을 맛보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화려한 데 나가서 행복하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았을 때의 갈등보다는, 혼자 있으면서 느끼는 고독을 훨씬 더 사랑합니다.
제게는 시집을 보내오는 시인들이 참 많은데, 저는 지금까지는 어떠한 사람이 시집을 보내주어도 거기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시집을 냈을 때 저한테 편지를 보내주는 사람은 굉장히 귀하게 여깁니다. 이것처럼 언행이 일치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금년부터는 반성을 하고 저한테 시집을 보내준 분들한테 전부 답장을 씁니다. 오늘도 12명에게 답장을 썼는데, '시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린다면 시를 안 쓰는 것이 좋다. 시인의 정신과 선비의 정신을 지켜 나간다면 좋은 시는 저절로 써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 얘기는 젊은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팔기 위해서, 즉 시를 잡지나 어디에 발표를 하고 보이기 위해서 비굴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지요. 그러면서 피천득 선생님의 시를 다시 인용하곤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스피노자는 책을 냈는데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책을 내기 전에 너무 가난해서 대학에서 강의를 나오라는 요청을 받고 "나는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은 배고픔보다 더 참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강의를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나가지 않고 언제나 배고프게 살았답니다. 어느 날 스피노자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이 강하다는 소문을 들은 황제가 "네가 나한테 책을 한 권 보내주면 네 책을 많이 사겠으니 책을 한 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스피노자가 이에 "나는 진리 앞에서만 책을 판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팔지 않는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내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얼마나 당당한 태도입니까.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 문학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산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어려운 시가 난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즘은 어려운 말을 써서 읽는이들로 하여금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지주의(主知主義) 문학이고 주지주의 시라고 생각하면서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되도록 쉬운 말로 진실한 마음을 담아서, 만인이 전부 읽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쉽게 쓴다면 시를 읽는 독자도 많아질 것이고 시를 사랑하는 국민이 많아져서 시인이 배고프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시인은 명예와 자존심만 가지고 살면 되는 것이지, 그 외에 아무 것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육군 사관학교에 강사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처음 육군 사관학교에 갈 적에 제가 청심환을 먹고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갔는데 군복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 동안 강의를 하고 강의실을 나섰지만 집에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모릅니다. 그 학생들의 눈망울이 얼마나 빛나는지 일주일에 하루만 강의를 하는데도, 그 강의를 하던 1년 동안은 사람도 만나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명예와 자존심뿐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제가 선생으로 있을 적에 학생들에게 1년에 책을 6권만 읽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학생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 그들의 최종 학력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남편한테 기죽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갑갑하지 않게 교육을 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취직을 하면 두 달에 한 권씩만 책을 사서 1년이면 6권, 35살이 되면 12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120권의 책 중에서 시집이 30권 정도 될 것이고 철학 서적이 10권, 소설이 30권, 그 외에 수필이나 교양서적을 다 하면 120권이 되면 어떤 문인이나 대학교수보다도 배움에 목말라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알고 있는 학교 선생님이나 대학교수, 문인들도 일평생 120권의 책을 읽는 사람이 참 드물다. 120권을 직접 돈을 주고 사서 정독을 하면 대학을 나온 사람이나 시인, 소설가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일평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과학만 한다고 생에 만족감을 못 느끼는 것처럼, 주부가 되고 다른 직장을 갖는다고 해도 인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없으면 인생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제자들한테 책읽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그 학생들과 같이 꼭 두 달에 한 권씩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지금 문학하는 친구들이나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사는데 5년 만에 제일 많이 만난 날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심심하거나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이유는 책을 많이 읽고 또 읽은 책들이 준 좋은 얘기들이 세상을 사는 데 대단히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지은이가 평생에 걸쳐서 쌓아놓은 경험을 고생하지 않고 우리가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보다도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눈으로 보고 말기 때문에 기억에서 금방 사라지지만 책은 마음속으로 읽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시인 전봉건 선생님은 드물게 제가 존경하는 선배입니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문학 강연에 한번도 안 나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도 저처럼 담이 약해서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것을 대단히 부끄러워했었다고 합니다.
그럼 제가 일방적으로 드리는 말은 여기에서 그치고 여러분과 함께 시의 숲을 걸어 보았으면 합니다.
문; 선생님께서 읽으시는 시집과 철학서와 소설은 어떤 종류며 그 외의 책들은 어떤 종류인지 궁금합니다.
답; 특별하게 어느 책을 읽는 것은 아니고 광고나 서평을 보고 난 다음, 요즘은 최일남 선생님의 소설이나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봅니다. 시집은 사서 보는 것은 아니고 신인에서 원로분들까지 보내주는 시집은 받고서 거짓말로 읽지도 않고 "시집 잘 받았습니다. 앞으로 좋은 시 쓰십시오." 이렇게 답장은 안하는 정도로, 오는 시집은 잘 쓴 시도 잘못 쓴 시도 읽습니다. 소설은 제가 평소에 읽었던 선배나 요즘 한창 유행하는 후배들 소설도 많이 사서 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싶어서 사보고 대개는 '인물과 사상'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다 사봅니다. 계간지 {당대비평}을 펴내는 삼인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은 거의 다 사봅니다. 출판사를 신용하기 때문이고 제가 소설 쓰는 사람과 살다보니까 그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는 역사책 같은 것도 사보게 됩니다. 저를 부르주아적인 사람인 줄 알고 있다가 제가 {중국의 붉은 별}을 읽었다고 하면 "아, 그렇게 어려운 책도 읽습니까?"라고 하는데 가려서 읽지 않고 잡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도 읽어보고, 마광수 씨의 {가자 장미여관으로}도 읽었습니다.
제가 피천득 선생을 존경한다고 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데 숨어 있기도 합니다. 80년대에 한참 좌익 우익으로 나눠져서 세상이 시끄러울 때인데, 선생님께서는 교보문고에 가서 직접 사오셨다면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고 계셨습니다. "그걸 읽어보니까 이 시대에 책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전까지는 자기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는데, 사서 읽어보니 이 시대에 이 책은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 사랑을 소재로 시를 많이 쓰셨고 선생님의 시집 {사랑굿}이 우리 시대의 명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굿} 을 쓰던 시절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 저는 동국대학 국문과 재학 중에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어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인이 된 다음에 시를 계속 썼어야 되는데 결혼을 바로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보니까 집이 가난해서 도저히 집에 앉아서 시를 쓸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교편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금은 내가 볼품없이 와서 너희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너희가 시집을 가서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쯤은 선생님의 시가 여기저기서 많이 너희 귀에 들릴 것이다. 그때만 기다려라.'라고 되뇌며 살았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데 어느 누구도 저한테 시 청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날아오는 시집들이 있는데 그 시집들이 저한테 위장병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그때는 아무 것도 소화가 안 되고, "저 집은 부인이 건강하기만 하면 아무 걱정이 없는 집일 것 같은데 머지않아서 저 부인이 죽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제가 아팠습니다. 왜 아픈지는 모르고 소화가 되지 않아서 밥을 먹지 못할 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 날아온 시집들이 저한테 충격을 주어서 그렇게 아팠던 것 같습니다. 1964년도에 등단을 했는데 20년 만인 1984년에 첫 시집을 냈습니다. 다른 사람은 20년이면 시집을 열 권은 더 냈을 텐데 저는 처음 냈습니다. 그때도 제가 인생에 대해서 재미없어 하고 앓기만 하니까 제 시를 좋아하는 한두 사람이 저를 부추겨서 아무리 봐도 대한민국에서 제 시를 좋아하는 팬이 저를 잘 모르던 때에 저의 시를 보고 저한테 연락을 해서 팬이 되었는데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 남자가 "아무리 보아도 김초혜처럼 시를 잘 쓰는 사람이 없는데 왜 시를 쓰지 않는가, 시를 열심히 써서 시집을 내야 된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바보라서 내 시를 잘 쓴다고 하는구나 생각하는 한편, 내가 시를 쓰면 인구에 회자되는 시를 쓸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집 {떠돌이 별}을 냈습니다. 첫 시집을 낼 때 너무 안 팔릴 것 같아서 발행사인 현대문학사에 부탁해서 책을 7백권을 사가지고, 내 시집을 내서 손해보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 나눠주었습니다. 그랬는데 고맙게도 시집이 한 사람 두 사람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덕분에 재판을 찍게 되었는데, 그 기분이란 {사랑 굿}이 백만 권 팔릴 때보다 더 좋았습니다. 재판(再版)을 겨우 천 권 찍는데도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84년에 시집을 내고 나서 80년대의 군사독재는 오랫동안 계속되고 세상은 매일 최루탄가스와 의문사 죽음, 행방불명으로 아주 시끄러운 시기였습니다.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제게 맞는 시가 어떤 걸까, 운동권 시도 좋지만 어렵게 사는 이 시대의 민초들을 어루만져 주는 사랑의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84년에 시집이 나오니까 반응이 좋아서 85년에 {사랑굿1}을 내고 86년에 {사랑굿2}를 내고… 88년에 {어머니}, 89년에 {사랑굿}을 183편으로 끝을 냈습니다.
그때의 사회상이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구로공단을 비추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그 프로에 구로공단에 있는 직공들이 책상 앞에 써 붙인 시가 [사랑굿]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보고 '이것이 저렇게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한테도 무슨 뜻인지를 알고 감동을 주고 위안을 주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고급 독자를 겨냥해서 쓰는 게 아니고, 저렇게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에 대한 시를 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사랑굿] 연작을 쓰다가 말다가 했는데, 어느 날 제가 존경하는 시인 김구용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이분도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계신 분인데, 저는 이분을 세 번 정도밖에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만난 게 아니고 행사에서 잠깐 뵈었는데, [사랑굿] 연작을 100여 편 정도 썼을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저와 담소를 나누시는 가운데 "여기서 끝내면 오행(五行)을 따져보니까 김초혜 시의 맥이 끊길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 사랑굿을 계속해서 더 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용기를 얻어 계속해서 사랑굿을 써 나갔습니다.
당시는 제 남편 조정래 씨가 [태백산맥]을 써서 시끄러울 때인데, 그때 제 시집이 잘 팔리고 하니까 방송국 같은 곳이나 신문사에 인터뷰를 많이 할 적에 저더러 "[태백산맥] 과 같은 큰 작품을 쓰는 조정래와 사는 김초혜가 사랑 나부랭이나 쓰는 시인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혁명도 사랑의 성취다. 가장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혁명을 할 수가 없다. 혁명이라는 것은 나와 가족을 버리고 보다 더 나은 우리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하는 게 혁명인데 그 혁명의 최고점은 사랑이다. 조정래 씨가 가고 있는 산봉우리나 내가 하고 있는 산봉우리나 가게 되면 맨 꼭대기에 사랑이라는 봉우리가 있을 것이다. 가는 길이 다를 뿐이지 그 두 사람이 추구하는 문학의 방향은 같다. 본래 문학이라는 것은 인간을 위한 작업인데 인간을 옹호하고 인간의 생활을 보다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길이 다르고 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고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있을 뿐 도달하는 점은 같다." 제가 이렇게 표현했었습니다.
문;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어떤 작가는 독서가 오히려 작가의 순수한 단어의 선택이라든가 시 작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는데 그렇다면 독서가 시에 미치는 영향 또는 독서를 지향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시인이 시를 쓰는 작업에 충실할 수 있는가?
답; 아주 흔한 말로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를 많이 읽는다고 해서, 시를 읽고 나서 금방 자기 시를 쓴다고 책상에 앉는다면 금방 읽었던 시들이나 소설의 문구들이 그대로 표절 비슷하게 되어서 자기의 시를 방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에는 시라는 것은 많은 체험을 한 사람만이, 슬픔이나 기쁨이나 그 외의 고통이나 여러 가지를 많이 체험한 사람만이 체험의 축적이 강한 사람만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가본 골목이나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들이 잊혀지지 않고 아무리 많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거의 다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마음에 남아서 그 언어가 재생되어서 자기 시로 육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되도록 남의 시를 많이 읽도록 권합니다. 많이 읽다 보면 다른 사람의 시어에서 자기의 상상력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시집을 보내면서 인용해서 쓴 어떤 분의 [얼룩]이라는 시인데 함께 읽어 볼까요.
꽃은 피기보다는 지기가 아파서
쓸어도 쓸어도 얼룩이 지느냐
이 얼마나 절창입니까. '모든 것이 피기보다는 지기가 아파서 이렇게 쓸어도 쓸어도 얼룩이 남는구나. 인생도 아무리 쓸고 다듬어도 얼룩이 남는 것처럼 이분은 아마도 꽃을 인생에 비유한 모양이다'고 하면서 오늘 하루종일 그 [얼룩]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남긴 얼룩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서, 지금부터는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과욕이고 인생의 얼룩을 줄이는 시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남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다른 상상력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저는 100% 도움을 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남의 시를 읽으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남의 시에 너무 천착해 있고 자기의 상상력이 고갈되어서 그 사람의 그 시에만 천착해 있기 때문에 방해를 받지, 좋은 시를 보고 다른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좋은 시가 써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쁜 시를 읽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대개 저보다 잘 쓴 사람의 시를 읽으면 시를 쓰고자 하는 의욕이 떨어집니다. 그럴 때는 제일 잘못된 사람의 시를 읽으면 '이 사람은 이런 것도 시집이라고 냈는데, 앞으로 이 시에 비하면 내 시는 너무나 잘 쓰는구나' 하면서 발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사랑굿]을 쓸 적에 '굿'자를 붙인 것은 인생도 사랑도 한판 굿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나게 굿한 번 추어보자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사랑에 대한 시를 쓰다보니까 제가 사랑의 전문가도 아니고 자꾸 막히면 '사랑시'를 쓴 시인들의 시집을 꺼내 봅니다. 그러면 용기가 생깁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썼으니 내 시는 너무 잘 쓴다고 하면서 썼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제 [사랑굿]을 읽으면 '아, 이것도 사랑이라고 썼으니 나는 정말 사랑이라는 시는 잘 쓸 것이다'는 생각이 우러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시에 제가 [사랑굿]을 183편이나 썼는데도 피천득 선생님의 이 시 한 편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시인의 연가]의 연가를 함께 읽어 봅니다.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려 아니하리
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려도 아니하리
어디서 다시 만나면 잘 사는가 하리라
언뜻 보면 시가 쉬우니까 우리가 19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 김소월의 시를 낭만파 시라고 무시하고 주지주의 시만을 즐겨 읽던 머리를 가지면 피천득 선생님의 이 시가 아주 쉽고 간단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곰곰이 음미해 보면 잊혀지면 잊으려도 하지 않고 생각나면 잊으려도 안하고, 그러니까 세상을 물 흐르는 대로 감정도, 자기가 제어할 수 없는 게 감정이기 때문에 자기가 한번 사랑했던 사람, 억지로 하지도 않고 억지로 안하려고 하지도 않고 저절로 순리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살겠다는 시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시를 보면서 183편의 사랑굿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이 한 편을 능가하는 시를 못썼구나, 하는 자책을 할 때가 있습니다.
태백산맥과 사랑굿의 정서는 동정의 두 면과 같아
문;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이 출간되었을 때 마음 고생을 많이 하신 걸로 아는데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남편 조정래 씨가 [태백산맥]을 출간했을 당시의 과거형 에피소드가 아니라, 저는 지금까지도 겁을 내고 있습니다. 1994년에 자유총연맹에서 조정래 씨를 고발할 적에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꼬셨는가 하면 문둥이들을 꼬셨습니다. 문둥이협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보니까 문둥이들이 애기의 간을 빼먹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문둥이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걸로 문둥이 10만 명이 당신의 집으로 갈 테니 그리 알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그것은 조정래 씨가 이경재 신부님이 계시는 나자로 마을에 가서 [태백산맥]을 썼고 거기에 우리가 기부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하고 말하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저희 집을 찾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나자로 마을에서 봤던 손도 없고 코도 없고 얼굴이 찌그러진 나환자들 10만 명이 이 골목으로 들어온다고 생각을 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남편한테 잘못했다고 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전화를 받아서 "마음대로 하시오. 쳐들어오거나 나를 죽이거나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대처하면 될 것을 저는 그랬습니다. 또 새벽 2시만 되면 전화가 옵니다. 제가 받으면 "장난이 아니다. 너와 너의 아들과 네 남편을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시기가 지난다고 해서 안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벌벌 떨면서 끊습니다. 맨날 그런 협박성 전화가 걸려 오니까 하루는 생각해 낸 것이 조그맣게 "여보, 빨리 녹음해" "지금 이 전화가 녹음이 되고 있습니다. 협박 전화이기 때문에 고발하겠습니다." 그 후로는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아파트나 빌라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까 집을 지어 이사를 가자고 조정래 씨가 말하면 지금도 나는 절대 이사는 가지 않겠다. 양평이나 지리산 근처의 한적한 곳으로 가면 그때 그 사람들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어서, "나 죽거든 집을 지어 나가라, 나는 절대로 개인 주택에는 살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때 조정래 씨가 나간다고 할 때는 반드시 사람이 따라다녔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협박 전화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 94년, 95년 96년 계속해서 전화를 하더니 97년부터는 전화가 없습니다.
문;{어머니}를 쓰신 계기와 {세상살이} 시집의 시가 어려운데 말씀해주십시오.
답; {어머니}는 남녀노소 누구한테나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링컨이 한 말인데 "조물주는 우리에게 신이 하나씩 필요한데 신을 많이 만들 수 없어서 신 대신에 어머니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신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저한테는 6,25사변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우리들 모두를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어느 날 54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어머니에 대한 연작시를 썼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그냥 신일 뿐만 아니라 저의 오늘을 만들어 주신, 저의 문학과 인격과 제 삶, 검소함, 모든 생활 속에 어머니가 들어와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시를 쓰면서 작은 몸 어디에 그런 힘 숨어 있었는지, 너무 울어서 어머니의 시를 다 쓰고 나니까 몸살이 날 정도로 쓴 시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불효에 대한 것을 쓴 것입니다.
그 다음에 쓴 {세상살이}는 제 시가 너무 쉽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평론할 게 없다고 합니다. 80년대와 70년대를 산 우리들의 세상살이를 쓴 것입니다. 원풍노조에 있었던 사람들, 아남산업에서 텔레비전을 만드는 사람이 고개를 하도 옆으로 하고 일을 하다보니까 사경증에 걸렸는데, "그것은 너의 잘못이지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왜 너만 그 병이 걸렸냐"고 하면서 노동자를 쓰레기 취급해 버리는 사연을 시로 담았습니다. 제가 겪지 못해서 부끄러운 일들을 시로 써 놓은 것입니다. 연탄을 끄는 아버지가 새벽에 연탄을 끌고 가다가 뒤에서 미는 아들이 내리막길에서 잘못 잡아서 연탄 마차에 아버지가 깔려 죽은 얘기 같은 것, 80년대 우리 주변에 흔히 있었지만 우리는 따뜻한 안방에 앉아서 등 따스하고 배부른 편안한 생활을 할 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그분들이 겪은 일들을 제가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의미에서 [세상살이]라는 시집에 담았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어머니한테 색동무늬로 늘 비춰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어머니 자신이 색동무늬로 자녀들한테 보여주었던 느낌이 듭니다. 우리 아들이 시를 쓰는 것을 한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고마우신 선생님] 이라는 시를 한 편 써놓았습니다. 처음 쓴 시로는 너무나 예뻤습니다. 저는 47년 동안 그 표현이 안 나왔는데 어떻게 9살 때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고마우신 선생님]이라는 시입니다.
선생님이 일기장에 예쁜 수를 놓았어요
똑똑하게 셈 잘하는 우리들을 가르치시느라
선생님의 얼굴에는 언제나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어요.
할아버지 선생님께서 너무나 자상하게 가르쳐서 이런 시를 썼을까 아니면 그 아이의 감성이 예민해서 그런 시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머리 아닌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가 되어야
문; 요즘 나오는 시들이 어려워서 작자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도저히 감을 못 잡을 때가 많은데 시는 아무리 그 내용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해도 독자가 읽어서 못 알아들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별이나 달, 해를 많이 쓰는데 그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써온 단어이기 때문에 그것을 요즘의 시에 쓰기에는 구태의연한 것이고 한마디로 후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이나 달, 해, 섬을 시의 단어로 쓰는 것만큼 영구불변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이런 단어를 선택해서 쓰는 것이 후진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시인이 시를 어렵게 썼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하지만 자기가 쉽게 쓴 것입니다. 저도 한동안 1974년도에 주지주의 시가 얼마나 유행을 하는지, 저같이 쉬운 시를 쓰는 사람은 발붙일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문학사상}에서 첫 청탁을 받고 이상하게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참 쓰기가 쉬웠습니다. 어려운 말로 대강 추상적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구상을 하지 않고 금방 추상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그렇게 어렵게 쓰는 것 같습니다. 시가 어렵다는 것은 시는 예술이지 학문이 아닙니다. 공부를 해서 노력을 하고 연구를 해서 납득이 된다면 그건 학문이지 예술이 아닙니다. 시는 노래여야 합니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아무리 어려운 노래도 어려워서 못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주문을 외듯 입 속에서 흘러나와야지 비로소 좋은 시입니다. 김소월의 시가 다 쉬워도 우리한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처럼 어려운 시를 쓰는 사람은 제 생각으로는 실력이 없는 시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모든 시들은 읽어서 금방 감동이 되는 시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하는 것은 학문입니다. 알게 해서 감동을 받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편지를 보내는데 신대철 씨의 시 중에 마음을 다스리는 시보다 마음을 울리는 시라는 신음소리, 눈보라 속에 뭐가 들린다고 썼습니다. 마음을 다스려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울려야 합니다. 감동을 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시는 읽지 않아도 됩니다. 시와 독자가 거리가 멀어진 이유도 바로 시인들이 잘못입니다. 시인들이 그렇게 어려운 시들을 썼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우리 나라는 본래 시 문화권 속에서 살았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을 뽑을 때에도 시 한 편을 보고 뽑았습니다. 그 시 한 편에 인생이 들어있고 그 사람의 철학이 들어있고 역사관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 시 한 편을 보고 과거급제에 등용했던 것처럼 우리는 시 문화권 속에서 살았는데, 시와 독자가 멀어지게 된 큰 원인은 바로 시인들이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잠꼬대 같은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별이니 달이니 섬이니 이런 것들이 진부한 것도, 사랑도 얼마나 진부한 것입니까. 별이니 달이니 섬이니 하는 것도 내용을 진부하게 쓰면 달도 별도 진부해지고 새롭게 쓰면 달도 별도 언제나 새롭게 다가옵니다. 제가 쓴 어머니라는 것, 세상살이, 사랑굿이라는 것은 전부가 진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진부한 것들을 진부하지 않게 독자들한테 가까이 가게 할 수 있나' 하는 것이 제가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시는 잘 못썼지만 100만 명의 독자를 가졌다는 것은 제가 노력한 것이 조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진부한 것을 가지고도 새롭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출처] 시(詩)와 삶을 일치시켜라/김초혜|작성자 성기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