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구조하기 외 4편
어떤 자세는 먼지처럼 누워 눈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눈사람은 얼마나 오래된 자루일까
눈사람은 어쩌다 폼페이 유적의 화산재사람처럼
귀도 눈도 입도 코도 희게 지우고
두 손가락으로 아무리 간질여도 끄떡없는
아무리 간질여도 소용없는
저 딱딱하고 하얗게 웅크린 덩어리가 되었나
눈사람이 더 깊은 생각에 잠기기 전에
더 깊은 생각에 빠진 채 풍화되기 전에
눈사람 속에서 눈사람을 구조하는 매뉴얼
2인 1조로 눈사람의 없는 이목구비를 가리고
눈사람의 겨드랑이 쪽 임파선에 손을 밀어 넣은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딴전을 피우는 거야
휘파람 불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거야
그러다가 방심한 순간 불끈, 힘을 줘 끌어내리는 거야
그리고 담요나 모포로 침착하게 어깨를 감싸주는 거지
품페이의 달무리처럼 목에 두른
연보라 삭흔(索痕)까지 풀고 나서
천년도 더 된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 눈사람
무연고 고독사한 시신을 염습하는 기분으로
눈사람의 잠근 자루 지퍼를 조심조심 열어주면 돼
다음에 눈사람의 자루 안으로
천천히 무릎걸음 해서 들어가는 거야
국자로 뜬 계란 노른자처럼
아슬아슬 예쁘게 담긴 채로 기다리는 거야
간지러운 데를 끝까지 참고 버티는 거야
간지럼을 끝까지 참는 스릴이라니
간지럼이 스스로 공기처럼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긁지 않고 기다리는 거야
맹그로브가 들어간 문장들
함정에 빠졌다
맑은 생선국이었어
냄비 바닥에 잠긴 맹그로브 숲속으로
레몬상어의 꼬리지느러미가 물결을 일으키고
야광 플랑크톤이 파랗게 밀려드는 여름밤
빗물이 맹렬해지는 기수역(汽水域)
순다르반스의 새 떼와 휘파람 오리
나일악어와 이라와디돌고래의 은신처가
장맛비처럼 끓어오르는 냄비 속
쑥갓 줄기 깻잎과 팽이버섯 사이사이로 드러난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켤 때마다
내 먼 바다는 얼마나 따뜻해졌을까
바짝 졸아든 생선 국물에 육수를 부으면
다시 함정이 무성해질 것 같아
울창해지려는 구멍들 위로
육수를 붓다 보면 다시 맑디맑은 맹그로브
방금, 레몬상어의 지느러미가 움직였어
사근사근 포말이 일었고
숲을 흔들어 강모래를 일으켜
시야가 흐려지려는 순간
레몬상어의 지느러미를 떠올리는 순간
맹그로브는 다시 어둡고 탁한 문장이 되고
그 순간 또 함정에 빠지게 되는 거야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레몬상어의 꼬리지느러미를 젓가락으로 꽉 집는다
부탄가스버너 손잡이를 돌려 불을 끄고
한밤중 허방다리를 무사히 건너는 거야
맹그로브가 들어간 문장에는
노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줄게
크로크무슈에 치즈를 뿌리면 일어나는 일
새벽에 울리는 휴대전화 알림음은
빙판 위의 트럭처럼 불온하다
폭설로 인한 눈사태가 예상되오니
외출을 자제해 주시고 안전한 실내로 신속히 대피 바랍니다
크로크무슈를 먹는 사람들에게도
긴급재난 문자가 도착한다
잠시 잊고 있었어
크로크뮤슈에 치즈를 뿌리면
키르기스스탄의 계곡에 눈발이 날리게 되는 사실을
내가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한 발을 내밀어 멈춰 세운 눈덩이
만년설에 빠진 나머지 발목 한 쪽을 찾아
내리막 빙판길 트럭의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까
그러다 운이라도 좋으면
크로크무슈의 영구 동토층 어디쯤에 갇히게 될지도 모르지
크로크무슈에 치즈를 뿌리는 일은
어쩌면 일종의 애도 같은 거야
너의 슬픔도 나의 치즈처럼 굳어지기를
200℃로 예열된 오븐에서 4분 30초
노릇노릇 딱딱해진 크로크무슈를 꺼낼 때
비슈케크 사거리에 신호등이 켜지고
잦아든 눈발 아래 트럭 한 대가 멈춘다
달리는 기분
주문하시겠어요?
할리데이비슨으로 2인분 주세요
배기량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알레르기성 비염 10년 차 정도가 무난해 보이네요
대포통장은 너무 아담하더라고요
리어램프는 3시 방향 우회전 깜빡이로 확실하게 고정해 드릴까요?
네, 브레이크 패드는 빼 주시고
공깃밥 한 그릇 추가해 주세요
빗길 내리막길 스키드마크 아드레날린 3스푼은
기본옵션으로 넣어 드렸고요
어린이보호구역 지하차도 제17보병사단 연병장
제한속도 110km 안개다발지역도 서비스로 넣어드렸어요
참, 경로 이탈과 신호위반 행사 중인데 어떤 게 좋을까요?
칫! 대신 안전벨트 안 맨 돼지부속찌게로 충전 가능할까요?
알았습니다 공매도, 아니 공회전 67마력으로 기간 연장해드렸고
공중 2회전에다 과속단속구간 300m까지 적립해드렸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색깔은, 하! 이놈의 치질 때문에……
중간 맛보다는 매운맛이 좋겠네요
아, 현금카드로 결제하시겠습니까?
영수증은 야간주행과 주간주행 화끈하게
이중으로다가 처리해드렸습니다
흥미로운 식사 되시기를 바랍니다
돼지를 위하여
찜통 같은 무더위였어요 양돈축사 앞길 모서리
되똥되똥 어깨 부딪히며 모인 여름돼지들이
3.5t 등유트럭에 소란히 탑승할 채비를 해요
도축되기 직전 열두 시간은 예외 없는 금식이래요
배고픈 돼지들, 라마단도 아닌데 금식이라니요
맵시 있게 해체가 된 뒤
폼나게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가기 위해서
위장과 대장은 속수무책 비워놓아야 한대요
쇠뜨기 미국자리공 괭이밥 닭의장풀 따위
여름 잡풀들이 하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비포장도로의 길섶 이리저리 밀리며
트럭을 기다리며 도열한 배고픈 돼지들
입국 심사대 앞에 선 시리아 난민들 같기도 하고
롤러코스터를 타려고 줄 맞춘 학생들 같기도 해요
삼겹살 뒷다릿살 사태 갈매기살 안심
좀 있으면 부위별로 차곡차곡 발골된 채
혹은 쇠갈고리에 멱살과 등짝을 찍힌 채
새벽배송될 돼지들이 단체로 탑승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긴 연분홍 속눈썹으로 반쯤 가린
소매단추 같은 눈알이
또랑또랑 터무니없이 맑은 그늘을 지어요
6개월짜리 눈록(嫩綠)의 연한 돼지들이
대서(大暑)를 갓 지난 쨍쨍한 햇볕 아래에서
집단으로 예행연습을 하는가 봐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돼지국밥 속 건더기가 되어
모락모락 쟁반 위에서 김을 뿜는 수육이 되어
푹푹 무르익고 있잖아요
기다리던 3.5t 하늘색 트럭은 오지 않고
애먼 차들만 비포장도로에 훅훅 흙먼지를 날리네요
6개월짜리 시한부, 배고프고 어린 생애들이
여름 차들을 피하려 뒤죽박죽 몰리며
꿀꿀 꾸르르, 마을운동회 플래카드처럼 나부끼고 있어요
양돈축사 한쪽에선 입안이 캄캄해지도록
어금니 송곳니 모조리 드러낸 어미돼지 한 마리
검고 쓰린 젖꼭지가 달린, 비닐 지퍼백 같은
뱃가죽을 철렁! 늘어뜨린 채
어쩌면,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는지 누가 알겠어요
당선소감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여느 때처럼 토스터기에 식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에 던져진 한 통의 전화, 내 이름을 묻고 투고자 본인임을 확인한 뒤 당선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내 이름이 그날따라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똑같은 식빵과 똑같은 커피였지만 그날의 아침 식탁 풍경은 한순간, 나를 평범한 일상에서 무언지 안타까우면서도 따뜻하게 가슴 저미는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공간으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얼핏, 그날 아침 주방 타일 한 장이 깨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일상의 나에게서 특별한 한순간의 나로 바꾸어 놓은 습격 같은 사건, 한 장의 스틸사진처럼 남아있는 그 특별함은 마치 익숙한 사물에서 나를 멀리 떼어 놓듯 고유한 나, 홀로의 상태인 나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긴 여름과 가을을 홀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에게로의 ‘투신’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섞이지 않은 내가 살아가는 곳. 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렇게 일상의 틈을 벌려 낯선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나를 낯선 세상으로 데려다줄 격렬한 시의 습격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문득 페르난도 페소아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도망치려는 순간마다 불러 세워주신 오태환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언제나 따뜻함으로 보듬어주신 종각 문우님들, 한 분 한 분의 얼굴이 새삼 떠오르는 밤입니다. 오리무중의 외딴길을 환하게 비춰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와 함께 앞으로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시산맥의 거대한 줄기와 함께 할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용기를 준 친구들과 함께 조금 오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언
1970년 서울출생.
인하대학교 철학과 졸업.
(현재) 서울의 대안학교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있음.
2024년 문학뉴스 & 시산맥 신춘문예로 시 등단.
hudie70@hanmail.net
심사경위 및 심사평
2024년 문학뉴스 & 시산맥 신춘문예에 5300여 명이 응모하였다. 2023년보다 50여 명의 응모자가 늘었다. 일일이 작품을 읽고 예심위원들은 좋은 작품들을 매의 눈으로 낚아 올렸다. 총 20명의 응모작이 1차 예심을 통과하였다. 그중 6~7명의 응모작을 최종심에 올리기 위해 다시 한번 예심위원들은 옥석을 골랐다. 그 작품은 아래와 같다.
1번 이 언 「눈사람 구조하기」 외 7편
2번 이열매 「터미널의 유령」 외 9편
3번 이화윤 「보믜」 외 4편
4번 김수수 「야영」 외 9편
5번 윤 루 「침투」 외 4편
6번 장은미 「반쯤 열린 서랍들의 세계」외 9편
7번 송다효 「자이로드롭」 외 4편
평론부분은 올해 10여 편의 응모작이 들어왔으나 아래 두 편이 본심에 올랐다
1번 조서정 「기후 위기 극복, 신유물론에서 촉발된 일원론적 관계 복원으로」
2번 김시홍 「기예적 평론 비판 - 벤야민을 넘어」 외 1편
위의 응모작품을 본심 심사위원 앞으로 무기명으로 보냈다. 심사위원은 시부문은 시산맥 편집위원 신정민 시인과 최연수 시인, 평론부분은 김효숙 평론가가 맡았다. 아래는 심사위원의 수상작 선정과정이다.
시 부문 심사위원들은 무기명 응모작품을 읽고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작품성이 있는 수준작을 뽑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예심위원 4명에게 4표를 받은 1번과 3표를 받은 2번이 최종본심에 거론되었다. 두 심사위원은 상반된 상향의 작품을 추천하였으나 조금 더 밀도 있는 작품 세계를 끌고 가는 1번이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의 선정 사유는 아래와 같다.
신정민 심사위원은 1번의 작품이 “한 편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무엇보다 점수를 줬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가 될 필요는 없지만, 독자로서 행간을 빠져나올 때까지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시인이 대상을 끌고 가는 힘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한편 최연수 심사위원은 1번 응모작품에 대하여 “상상의 범위가 넓으며 언어를 구사하는 자유로움의 폭이 넓다. 그리고 상상의 발랄함 속에 현실의 비애가 녹아들어 시적 유희로만 그치지 않는 효과를 얻고 있으며, 경쾌한 삶에서 체득한 묵직한 의미의 발걸음에 기대감이 크다고” 평하였다.
평론 부문에서는 김효숙 심사위원은 1번 작품에 대하여는 기후환경의 트렌드에 맞는 소재는 좋으나 아직은 소논문의 구조에 그치고 있어, 이론적인 강화를 위한 공부를 한다면 차기에 충분할 것이라 하였으면 2번 「기예적 평론 비판」에 대해서는 “현시대의 비평을 ‘기예적 평론’이라는 경향성으로 진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방법적 일신을 제안한 주제 비평이다. 서양 이론 일변도의 관념 철학에 기반한 비평을 당차게 비판하는가 하면, 이론 적용의 방법론을 문제 삼는 신진 세대 비평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고 평하였다.
응모작품 중에는 실제로 아직 시와 평론으로 영글어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으면 단단한 내공을 갖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는 습작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고 모두 입을 맞추어 말하였다. 서정시는 마음이 흘러가면서 대상을 통과하는 지점을 참신하게 자기만의 시어로 적어내는 것이다. 이미 익숙한 표현이나 상투적인 내용 그리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성에 머문다면 좀 더 퇴고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꾸준히 열정을 가지고 계속 도전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당선된 두 신인은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고 참신성을 갖도록 노력하기를 바라며 신인으로서 한 발자국을 나아간 것을 축하한다고 하였다.
본심 심사 : 신정민 최연수(시부문) 김효숙(평론부분)
예심 심사 : 권기만 김이응 서이교 최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