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버지
이주혁
색이 바랜 신문 한 장이 곱게 접혀있다. 연말이라 서랍 정리를 하면서 눈에 띄었다. South Dakota 주(州), Brookings 시(市)의 지방 신문, ‘Brookings Daily Register' 1978년 5월 8일자 첫 면에, ’나와 아들‘을 근접 촬영한 4단 크기의 사진기사가 실려 있다.
‘What's that, Dad?'라고 굵은 글씨체로 제목을 붙인 졸업식 광경이다. 아들이, 졸업식 날 학사 가운을 입고 사각모자를 쓰고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서, 학사모에 달린 테슬을 만지고 있는 사진이다. 약 850명의 South Dakota 주립대학 졸업식에 약학대학을 졸업하는, 32살 먹은 아버지와 그를 따라온 6살짜리 아들과의 만남이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이 시간이 있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약사이민으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영주권을 받고 LA에 도착하였지만, 현지 사정은 상상과는 달리 만만치 않았다. 다른 의료인들은 이민 허가 조건으로 직장을 계약하고 왔으며, 그들에게는 면허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약사에게는 취업을 요구하는 조건이 없어서, 이민 절차는 쉬웠지만, 현지에서 약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면허 시험을 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며, 미국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하여야만, 약사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뉴욕 주에서만은 그 시험을 볼 자격을 주었으나 그 주(州)에만 한정된 면허여서, 내가 이민 올 때는 벌써 외국인 약사가 과 포화된 상태였다. 그곳에서는 약사 면허를 받아도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형편이라는 소문을 듣고, 날씨라도 좋은 LA를 선정하고 미지의 삶을 시작하였다.
주유소 펌프 일로부터 시작하여 빌딩 ‘밤 청소부’, 비타민 회사 ‘공돌이’, 자동차 브레이크 회사 ‘검사관(?)’ 등등을 거치며,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달보기’ 운동을 하며 달렸다. 그래도 한 손에 너덜너덜한 단어장을 놓지 않고 토끼잠을 잔 덕분에, 토플 시험을 거쳐 미 전역의 약학대학 100여 곳에 입학원서를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한 일 년이 지났다. 그 정황에 태어난 딸이 복을 가져왔는지, 채 백일도 되기 전에 South Dakota 주립대학으로부터 편입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약사 면허를 받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시험 준비에 바빴지만, 막상, 입학 통지를 받고 보니 경제적으로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세 식구가 $1,800을 갖고 이민 와서, 그동안 시간당 2∼3불의 임금으로, 늦은 시간까지 일하며 시간 외 수당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지만, 잔액은 거의 바닥이었다. 혼자서 발버둥 치며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서울에서 고학으로 4년 대학을 마친 저력이 있어서, 혼자라면 어떻게든 공부를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뿐……. 하여, 두 아이를 한국에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비행기 표 비용도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나, 돈이 될까 하여 이민 올 때 준비하여 온 인삼이며, 특산품, 개인 소장품 등등을 친구들에게 팔았고, 이들은 십시일반으로 여비까지 보태주었다. 아직 산후 건강이 회복되지도 않은 아내와 아이 둘을 LA에 남겨 두고, 그곳 사정도 알아볼 겸, 일단, 혼자서 South Dakota로 날아갔다. 다행히도 정부가 제공하는 그랜트를 신청 할 수 있었고, 은행에서 학자금을 융자받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허름하고 침침한 지하 단칸방이긴 했지만, 사과 한 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딸의 백일을 축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약사가 되는 꿈으로 가슴은 부풀었다.
이제, 사진 속의 아들을 바라보며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아버지가 33살이었으니, 사진 속의 나와 거의 같은 나이이다. 내가 수석으로 졸업하였다고, 졸업식 후에 교직원 모두를 초대하여, 식당에서 음식 대접을 하며 술기운이 올라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당신의 모습이 새롭다. 당시의 집안 사정으로 보아, 어디서 돈을 빌려서 대접하였음은 짐작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나는, “나중에 좀 더 잘해 주마.”라고 속으로 다짐하며,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한다고 자신에게 변명하며 아이들을 대하지 않았던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을 받느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잠자는 얼굴 잠깐 바라보는 것만으로 아버지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죄스럽기만 하다. 그 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고도, ‘나중에 더 크게’를 반복하며 직장 일에만 충실했다. 가정을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하는 것만이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인 줄 알고 살았던 어리석음이었다.
새해라고 손자, 손녀를 데리고 아들이 세배를 왔다. 이 사진을 보여주며 겸연쩍은 얼굴로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진에 6살이던 그가 벌써 44살을 넘어 중년 티가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다. 가끔 야간 근무를 하는 바쁜 생활 때문인지 피곤한 기색이 역역한데도, 12살 된 아들과 함께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눈다. 야구반에서 홈런을 치던 일, 고사리 손으로 월척을 잡던 일, 캠핑 가서 곰을 만나 놀랐던 일, 스키장에서 나동그라진 일, 등등 아빠와 함께했던 일을 추억하며 깔깔대며 자랑한다.
이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내 멍한 가슴이 흐뭇하게 채워진다.
“그래, 이제 너희들은 내일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그냥 재미있게 살아라.”
혼자 중얼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