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저녁의 구애/편혜영
- 김은 누구나 이기적이므로 누구에게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40p)
-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지 겨우 40여 분이 지나 있었다. 시간은 드문드문 이어지는 어른의 숨처럼 더디게 흘렀다. 김은 난생처음으로 누군가 죽기만을 기다린 40여 분에 대해 생각했다. 40여 분간 생이 더 이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고 죽음이 지연될수록 희박해지는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멍하니 식당의 유리문 밖을 보았다. (49p)
- 이대로 어른의 삶이 계속된다면 오늘 밤 약속은 아예 지킬 수 없을 거였다. 김에게 어른의 죽음은 비통하고 엄숙한 세계를 떠나 정체되고 지연되는 시간의 문제로 남았다. (53p)
- 행위에 담긴 예술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는 신체를 활용하는 예술가들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몸은 단지 하나의 매체나 표현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귀하게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롱받고 위협받는 대상이었으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였다. 그는 여러 형태로 훼손된 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의 몸이 별로 아름답지 않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71p)
- 그는 책을 덮었다. 결국 타인과의 완벽한 친밀감이란 동경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타인과 최소한 2미터 이상의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73p)
- 구내 식당의 정식 A세트를 기준으로 그의 하루는 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오전과 오후뿐만이 아니었다. 자정을 기준으로 하면 어제와 오늘이, 주말을 기준으로 하면 지난주와 이번주가, 연말을 기준으로 하면 작년과 올해가 같았다. 그러므로 모든 미래는 과거와 동일한 시간일 것이다. 현재와 과거가 같듯이 미래는 현재와 같을 것이다. 언제나 같다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언제나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거둬들였다. (83p)
- 멧돼지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는 좀 멀게 느껴졌다. 소리의 거리감이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125p)
- 숲은 어둠을 습자지처럼 빨아들여 대지로 뿜어내고 있었다. (144p)
- 숲에서 나는 소리에 비하면 도시의 소음은 종류나 내용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직했다. (146p)
- 도시는 유적을 가졌다기보다는 폐허를 방치하고 있는 듯했고 노쇠한 과거를 유지하느라 미래를 유예시키는 느낌이었다. (166p)
- 골목길은 여전히 어두웠으나 어디든 가지 않을 수 없어서 그는 이제껏 헤매온 길이었을지도 모를 그곳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176p)
- 비라도 쏟아진다면 좋을 텐데. 서가 차창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 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날일수록, 진이 대꾸했다. 비는 내리지 않는 법이야. (181p)
- 벨트 앞에 서서 그저 익숙한 각도대로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돼요. 몸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거죠. 왠지 뿌듯해요.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223p)
- 전원이란 억압된 자연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것은 문명에 의해 관리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문명에 맞서 언제든 복수를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야만이란 사실을 그는 묵과했다. (해설/동일성의 지옥에서/김형중,24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