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문학 18호에서 (2005년 발간)
흙과 목축에서 찾아낸 모성의 섬세한 화음
- 신은립 시집 「젖은 몸에서 김이 난다」
김동원 (시인)
1. 프롤로그
한 시인의 시를 읽는 것은 하늘을 듣는 것과 같다. 땅의 품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 사이 한 인간을 만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시는 天 地 人 전적인 합일 속에서 태어나며, 시인은 우주 화음 속에서 태어나며, 시인은 우주 화음 속에서 그 시를 잘 키워 세상 밖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시인을 떠나면 순전한 독자(=우주)의 몫이다.
동양적 사유와 음양의 몸구조로 보아 어쩌면 하늘의 뜻을 가장 잘 읽는 것은 남성이요, 땅의 소리를 깊이 품은 것은 여성일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떠오르겠다. 사람의 소리는 이 우주 안에 누가 가장 잘 낼까? 그것은 아마도 가장 지극정성으로 삼라만상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는 사람이 아닐까. 현재를 최고로 열심히 사는 사람, 하루를 가장 무심히 바라보는 사람, 만지는 것, 보이는 것, 크는 것을, 제 자식처럼 키워주고 살려주고 이해하는 사람.
과연 누굴까? 아무리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이 세상에선 농부 부부보다 더 합당한 사람이 없다. 그들 부부보다 더 많이 하늘을 살피고, 그들 부부보다 더 생명 탄생의 신비와 소멸을 온몸으로 채득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우리 옛글 ``農子天下地大本``은 참으로 농부 부부야말로 우주의 근본임을 밝힌 명귀인 것이다.
2. 시의 의자에 앉아
시의 의자에 앉아 신은립의 시집 「젖은 몸에서 김이 난다」를 읽는다. 나는 이 시집의 몸을 구석구석 살핀 후, 상당한 충격과 함께 무척 난감했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여류 시에서 볼 수 없었던 독자적 개성이 시편 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농촌 체험 시를 내가 주제넘게 흠 없이 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의문이려니와, 한국 농촌 어머니가 겪어야 하는 허리 휜 노동과 농촌의 그늘과 남모를 서러운 가슴을 신은립의 시에서 모두 보아버린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밤 열두 시 너머
어미 돼지 옆에 사료포대 깔고 앉아
새끼 돼지 받는다
한 마리 낳고 한참 쉬고
또 한 마리 낳고 한참 쉰다
열두 마리 받아 놓고
졸음이 몰려와 무릎에 얼굴 묻고 자다가
흥얼흥얼 노래 부르니
귀뚜라미 귀뚤귀뚤 따라 부른다
다리에 쥐 내려 몇 걸음 걷다 다시 가니
태 보자기 덮어쓰고 나오는 늦둥이
얼른 태 보자기 벗기고
뒷다리 들고 흔드니
켁켁 양수 토한다
먼저 태어난 새끼 모두
보온통에서 꺼내어
어미 옆에 놓으니
세상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가
밀고 밀치며 젖꼭지 입에 문다
축 늘어진 어미 돼지와 갓난 돼지 쓰다듬다
돼지막 나서니
어둡던 동녘 하늘 희뿌연하다
- <새끼 돼지 받는 밤, 전문>
너무나 경건하다. 이 시는 북방 정서의 원형적 미를 보여낸 시인 백석과 60,70년대 억압된
농촌 현실을 세밀히 복원한 신경림의 시와 전혀 다른 궤를 이룬, 농촌시의 한 전범으로 남을 수 있는 신은립 만의 독특한 수작이다.
``왜냐하면 시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처음부터 누구나 충분히 쓸 수 있다. 시는 오로지 체험인 것이다.`` 고독한 사색의 시인 릴케가 갈파한 시의 정의다.
물론 사실만으로, 체험만으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시 <새끼 돼지 받는 밤>은 돼지막을 직접 쳐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체험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미 돼지의 분만의 고통과 절박한신음과 경악의 통증을 겪어 보지 않은 수컷은, 도저히 이 자연의 탄생비밀을 짐작도 못할 것이다.
마치 신은립은 태초의 비밀이 눈앞에서 벌어지듯 이 시를 써 낸다. 자식 셋을 낳아 본 어미가 아니면 도저히 어미 돼지의 극도의 공포와 불안과 안도를 이토록 생동감 있게 시로 뽑아낼 수 없었으리라. 열두 마리 새끼 돼지를 받아 놓고 졸음이 몰려와 얼굴 묻고 잘 수 있는, 신은립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명시는 누구나 얻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비밀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고통의 자리든, 즐거움의 자리든, 놓치면 평생 두 번 다시 못 만날지 모르는 것이 시다.
3. 고법농장과 시인 신은립
마을길로 향해 나있는 언덕 위 고법농장은 날마다 시끌시끌하다. 수탉이 햇대에 서서 첫울음 울면, 돼지 막은 그야말로 초등학교 쉬는 시간 교실처럼 난장판이다. 사방에서 꿀 꿀꿀 요란스런 어미 흑돼지 밥 주랴, 새끼 돼지 돌보랴, 소외양간 보러 가랴, 간밤 개에게 인사하랴, 식구들 아침 밥상 챙기랴,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것이다. 이쯤 되면, 젖은 몸에서 김이 안 날 수 없다. 대충 바쁜 일들이 끝나 골병든 허리를 펼 때면, 어느 듯 아침 해가 산마루에 비친다.
먹는 둥 마는 둥 밥 한 술 뜨고 중학생 귀여운 아들놈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밀양문학회 모임 가랴, 대소간 일 보랴, 돌아와 새새 동네 아낙들과 함께 콩밭 매라, 발바닥에 불이 날 때쯤, 이윽고 뒷산 넘어가는 노을을 밟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밑반찬 파는 트럭에 들러 달걀 콩나물 고등어 한 손을 사들고 어둑어둑한 부엌문을 연다.
부리나케 또 여자가 해야 될 고달픈 저녁 일을 다 마치면, 달은 지붕 위 떠올라 오건만, 하도 바빠 머리가 다 어질어질한 것이다. 그 뿐이랴, 틈틈이 하루 동안 모아 둔 時景과 時情을 원고지 빈 칸에 모으고 있으면, 종일 힘들어 보이는 아내가 안쓰러워 괜스레 소리치는 ``불 끄고 그만 자자`` 는 남편 성화까지 다 삭여야 한다.
남 다 자는 한밤중에 혼자 깨서 이래라도 자신에 엉킨 그 무엇인가를 시로써 풀어놓지 않으면, 시커먼 것이 자꾸 가슴에 막혀 먹먹한 것이다. 그래서 신은립은 아무리 고달파도 시를 쓴다. 아니 써야 한다. 이럴 때는 희뿌연 새벽이 올 때까지,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고 할 것 없이, 차곡차곡 자신을 접어 시 속에 깊이 담아두는 것이다.
4. 인생, 그리고 농촌 공동체
``농부는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다른 직업보다 더 소중한 까닭은 농부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일은 농촌 사람들만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나라와 종교와 모든 단체와 백성이 함께 나서야 하는 것이다.`` 신은립 시집의 해설을 쓴 시인 서정홍선생의 농부관은 참으로 시공을 초월한 농부의 소중함을 설파한 명문이다.
사실상 아이울음이 그친 한국 농촌은 해체위기에 놓여 있다. 한동안 귀농 붐이 일었지만, 외국 농산물 개방으로 우리 영세 농가의 몰락은 초를 잰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농촌 현실 인식 부족과 젊은이들의 농업 천시 경향은 참으로 서글픈 한국 농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얼마 전 혼자 살던 할머니 먼 길 떠나고
한 집 건너 빈 집
또 빈 집
새벽안개 걷지 못한 고샅길 한참 걷다
집에 들어오면
나무 한 그루 키우고 싶다
목련나무나 동백나무 한 그루
창문에 걸어두고 말벗 삼고 싶다
나무라도 한 그루 이웃으로 맞아
니 오늘은 뭐했노
난 오늘 이런 일 했다
봄비가 왔으니
곧 감자 심어도 되겠제
어깨 토닥이며 살아야겠다
- <이웃, 전문>
한 집 한 집 비어가는 이웃 빈 집을 보고 있는 신은립의 가슴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대가족의 몰락과 농촌이 하나하나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시인은 모두 목격했으리라. 귀농했다 흙에 적응 하지 못하고 돌아서던 숱한 젊은이도 보았으리라. 왠지 이 시를 계속 읆조리고 있으면, 인간성이 허물리는 뭉클한 감정이 온다. 죽음이 너무 흔해서 존엄 받지 못하는 이 불쌍한 세대. 이 땅의 우리 조상들은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모두 흙의 자식이었다. 흙을 파서 먹고 흙이 주는 돈으로 공부하고, 울거나 웃거나 모두 다 흙빛을 닮았다.
그런 미덕과 아름다움이 숨쉬던 농촌이었지만, 신은립은 아무도 사람이 없는 이웃 빈 집을 보며, 나무 한 그루 키워 그것에게 말을 걸고, 피붙이처럼 정을 내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이 된지도 모르겠다. 도시엔 인간이 썩고 있는데 농촌은 썩을 인간도 없다. 인간은 흙을 만질 때 도덕적이 된다.
신은립의 시의 밑바닥을 잘 들쳐보라.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지구 안에 흙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 명제는 인간 존립의 물음과 해답을 동시에 포함하는 신은립이 자신의 시에서 줄곧 되풀이 말하는 인간 성찰인 것이다.
5. 에필로그
역시 신은립의 시는 현실의 땸에서 직접 뽑아 올린 체험시가 백미다. <누구 덕에 / 따쓰한 밥 먹고 / 누구 덕에 시를 쓸까?> 물론 흑돼지 덕이다. 돼지는 12지신 중 마지막 동물이다. 꿈속에 나오면 `복이 온다` ``음식을 얻는다``등 우리 겨래 삶 속의 복과 재산을 상징한다. 돼지고기만큼 사람 몸이 되는 동물이 또 있을까. 그래서 인도의 힌두교도나 회교를 믿는 아랍 사람들까지 돼지를 가장 재수 있는 동물로 보는 걸 보면, 돼지야말로 인간 문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동물이 아닐까 짐작한다.
신은립만큼 동물을 극진히 대하는 시인도 드물다. 시마다 친자식처럼 귀한 눈길로 본다. 살신성인의 고귀한 행위를 다룬 시, 「강아지 젖떼기」는 여덟 마리 새끼를 낳은 어미 개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은 채, 자식들에게 모유로 제 몸을 다 주어버리는 눈물겨운 희생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하게 한다.
첫 배인데 강아지 여덟 마리를
낳은 어미 개
큰 키와 쫑긋한 귀 날씬하던 허리 이쁘던 몸매
강아지 여덟 마리, 한 달하고도 보름
젖 빨리고 나니 엉망이 되었다
축 늘어진 젖가슴엔 강아지들의
발톱자국으로 피딱지가 앉았고
통통하던 등은 여윌 대로 여위어
등뼈가 몇 개인지 마디마디 흉물스럽다
내버려두면 어미가 죽을 것 같아
다른 집으로 옮기는데
내 두 팔에 안긴
어미 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다
목을 쭉 빼고 강아지 있는 곳 바라보며
- <강아지 젖떼기, 전문>
이혼율이 40%가 넘어버린 현대 한국사회에 사는 우리는 위의 시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마약과 살인과 가정 폭력이 난무하는 참으로 위태로운 오늘이 우리 가정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우연히 난 신은립의 이 멋진 시귀가 해답을 찾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미 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다>에서 시는 절박함에서 나오는가 보다. 두려움과 생명의 전율이 그대로 느껴진다. 명귀다. 모성은 개나 인간이나 다 같은 삶의 무게를 지닌다. 우리 인간에게 절망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 해체란 말일 것이다. 가족은 우주의 출발이요, 종착역이다. 그만큼 가족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시다. 그래서 난 마지막으로 신은립의 다음 시를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로 세상에 추천한다. 이 시 속엔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한국 농촌 어머니의 가족 사랑이 역설 속에 최고의 고움으로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개똥 치우고
돼지 사료 주고
어미 질에 팔뚝까지 집어넣어
갓난 새끼 꺼낸 뒤
쌀 씻고 설거지하고
냉이 캐고
양수 묻은 손
개똥 묻은 손
돼지 젖 묻은 손
나물 무치면
고추장 참기름 간장으론 낼 수 없는 맛
- <아무도 모르리, 전문>
김동원 시인은
경북 영덕 출생. 한국문협, 대구문협, 대구시협, 대구작가협 회원.
현, 송엔 포엠 회장.
시집 – 시가 걸리는 저녁풍경, 구멍, 처녀와 바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