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주에 우리만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다 끔찍한 일이다. " 아서 C. 클라크
누군들 진리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리가 인간에게 마냥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만약 인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스위치가 당신의 손에 쥐어져 있다면? 당신이 그 스위치를 누르든 누르지 않든 끔찍하다. 스위치가 없다면 역시 끔찍하다.
신이 있다면 끔찍하다. 인간은 신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역시 끔찍하다. 인간은 버려진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천국이 끔찍한 이유는 내게서 삶의 의미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지옥이 끔찍한 이유는 삶을 차단당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끔찍하다.
부족민은 족장이 외부세계와 통하는 관문을 장악하고 권력을 독점한다. 권력은 소통의 관문에서 나온다. 부족민에게 외부인은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과 같다. 지구가 외부세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도 끔찍하고 고립되어도 끔찍하다. 소통과 단절을 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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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에 고립된 부족민은 지리적인 장벽에 가로막힌다. 지구인과 외계인의 소통은 광속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장벽이 있으면 관문도 있다. 장벽을 넘어가거나 넘어가지 못하게 조절하는 스위치가 있다. 그곳에서 권력이 탄생한다. 진리는 권력의 자궁이다.
장벽을 넘어도 끔찍하고 넘어가지 못해도 끔찍하다. 부부가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근친혼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끔찍하다. 부부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면 강제결혼과 같다. 역시 끔찍하다. 장벽을 넘을 수 있으나 함부로 넘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소통을 조절하는 문이다. 문을 열고 문을 닫으며 관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원하는 권력은 그곳에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물리적 장벽과, 떨어진 것을 연결하는 도구의 장벽과, 그것을 감당하는 인간의 장벽이 있다.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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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비밀을 한 단어로 집약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이기는 힘이다. 그것은 권력이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사결정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그것은 대칭을 장악한 축이다. 그것이 상부구조를 호출한다. 그것은 차원의 힘이다.
도구는 균형이 맞아야 사용할 수 있다. 우주는 균형에 의해 작동한다. 그러나 우주는 그 균형을 넘어선다. 바퀴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축이 부러진다. 축은 균형을 필요로 하지만 균형을 깨뜨려서 바퀴를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임에 의한 균형, 곧 동적균형이다.
그것은 정靜이면서 동動이다. 명사인데 동사다. 주어인데 술어다. 그것이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메커니즘 안에 두 개의 대칭이 있다. 메커니즘은 입력에서 출력까지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그것에 앞선다. 그것이 더 차원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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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높은 차원에서 낮은 차원의 변화를 결정한다. 같은 차원에서는 의사결정이 일어날 수 없다.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더 높은 차원에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권權이다. 그것이 이기는 힘이다. 권權을 장악한 사람은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이기는 힘(권權) = 의사결정 힘 = 차원의 힘 = 메커니즘의 작동 힘 = 에너지의 차원 = 밸런스를 장악하고 변화를 통제하는 힘
생각Think은 속을 관통한다는 뜻이다. 생각은 머리 속을 관통한다. 대칭된 바퀴를 관통하는 것은 축軸이다. 축은 대칭보다 차원이 높다. 축이 대칭에 앞선다. 앞서는 것이 권權이다. 어떤 것이 있기 전에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먼저 있었다. 생각이 행동에 앞선다. 과연 그런가?
안다는 것은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여 사실을 전달한다. 언어가 사실에 앞서고 사람이 언어에 앞선다. 공자의 정명正名은 사실에 앞서 언어를 바로잡고 유교의 인의仁義는 언어에 앞서 사람을 바로잡는다. 언어에 권權이 있고 사람에 권權이 있기 때문이다.
전제는 진술에 앞서고, 전체는 부분에 앞서고, 에너지는 물질에 앞서고, 사건은 사물에 앞서고, 변화는 존재에 앞선다. 본本이 말末에 앞선다. 근본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근본이고 언어가 근본이다. 사람을 바로잡고 언어를 바로잡은 다음 사실을 따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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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칭을 중심으로 사유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과 저것은 대칭이다. 사유의 맹점이 있다. 존재가 있으면 부재가 있다. 인간이 존재는 아는데 부재를 놓친다. 공간이 있으면 시간이 있다. 인간은 공간의 대칭은 아는데 시간의 대칭을 놓친다.
존재는 보이나 부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다. 작위가 있으면 부작위가 있다. 할 일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방해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보이는 공간의 변화는 보는데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누적된 변화를 알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안다. 이것이 전제면 저것은 진술이다. 인간은 전제와 진술의 대칭을 보지 못한다. 진술은 시간이 걸린다. 시간의 대칭을 못 보기 때문이다. 더욱 전제와 진술을 통일하는 메커니즘을 놓친다. 대칭을 보지 못하므로 대칭의 축을 보지 못한다.
인간은 부재를 보지 못하고, 시간을 보지 못하고, 차원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를 통일하는 메커니즘을 보지 못한다. 바퀴는 보는데 축을 모른다. 축은 높은 차원에 있으므로 보지 못한다. 사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보지 못함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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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소통의 장벽을 넘어설 때 인간은 더 높은 단위로 올라서게 된다. 폴리네시아 섬들의 화물신앙cargo cult을 예로 들 수 있다. 부족민 입장에서 섬 바깥에서 온 외부인은 타자다. 부족민은 외부세계의 간섭에 맞선다. 거기서 권력게임이 벌어진다.
부족민이 공항을 만들고 부두를 건설하면 외부세계와 통하는 관문이 된다. 권력 탄생의 현장이다. 족장은 관문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주술을 구사하여 외부세계를 호출하거나 차단한다. 부족민들은 족장에 의해 심리적인 가두리 양식장에 갇혀버린 것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과 오류가 여기서 비롯된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우리는 문명중독에 걸려서 본질에서 부족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 제 발로 가두리 양식장에 들어간다. 관문이 차원이다. 차원의 벽을 넘어가라고 가르친 사람은 공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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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지식을 전수해 준다면 그들은 소통의 장벽을 의식하고 신중하게 말할 것이다. 역사 속의 철인들 중에는 공자가 홀로 우뚝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소리를 했다. 맞는 말도 더러 섞여 있지만 대개 준엄하지 않았다. 옥을 돌 속에 숨기고 있다.
외계인이 아무말 대잔치를 벌인다면 그들이 지구인을 얕본 것이다. 공자는 지구인을 얕보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얕보지도 않았다. 어리광은 자신을 얕보는 행동이다. 어리광은 소통의 장벽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행동이다. 정면돌파가 아니면 안 된다.
인류 최고의 지식은 언어다. 언어의 장벽을 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언어는 공동작품이다. 언어의 결함과 언어의 주인인 인간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석가의 시대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석가는 제대로 된 소통을 포기했다. 소통의 장벽을 우회하려고 했다. 승려가 출가한다거나 한쪽 어깨를 드러낸다거나 하는 것은 지식의 본질과 아무 상관이 없다. 소통의 장벽 앞에서 당황하여 상징과 비유와 꼼수에 숨는다.
노자는 책을 쓴 적이 없다. 도덕경은 다른 사람이 대신 기록한 것이다. 노자가 암시와 비유에 의존한 것은 석가와 마찬가지로 지구인을 얕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통의 문제를 제기할 뿐 답을 말하지 않았다. 플라톤이 투덜댄 것은 자신을 얕보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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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말 중에 허튼 소리는 없지만 온고이지신과 술이부작은 해석하기에 따라 문제가 될 수 있다. 온고이지신은 확실한 것에 기초하여 불확실한 것을 규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연역법이다. 주장은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하며 근거는 옛것일 수 밖에 없다.
술이부작은 귀납법의 폐해를 지적한다. 지식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주체인 자신의 입장을 배제하고 객체 내부의 자체 운동 메커니즘을 따라야 한다. 객체 안에서 동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객체 안에서 옛것과 새것의 연결을 찾아내야 한다.
왜 공자가 홀로 바른 말을 했을까? 그의 직업이 교사였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지구인 앞에서 허풍을 칠 수는 없다. 소통의 장벽을 극복하려면 준엄한 자세가 아니면 안 된다. 공자의 말은 한 마디로 연역이다. 연역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이다. 차원의 장벽이 있다.
공자의 제자 안회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고 했다. 옛것 하나와 새것 열은 차원이 다르다. 선 하나를 잘라 여러 점을 얻고 면 하나를 잘라 여러 선을 얻는다. 그것은 복제되는 것이므로 준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제의 원본을 다치면 안 되는 것이다.
공자는 알고 있었다. 소통의 장벽이 차원의 벽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권력문제라는 사실을, 동력문제라는 사실을. 공유문제라는 사실을, 공사구분이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준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소통의 장벽을 넘는 데서 진정한 지식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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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다. 높은 차원에 올라서 낮은 세계를 내려다본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계는 체를 보고, 체는 각을 보고, 각은 선을 보고, 선은 점을 본다. 높은 차원에는 에너지가 걸려 있다. 주는 자와 받는 자는 같은 차원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권력이다.
병사는 암호를 정하고, 컴퓨터는 프로토콜을 정하고, 상인은 가격을 정한다. 의사결정은 동력의 연결에 근거한다. 집단의 의사결정은 권력에 근거한다. 흔히 선악을 근거로 삼지만 그것은 결과 측이며 원본이 아니라 복제본이므로 실패한다. 선악논리는 가짜고 이기는 힘이 진짜다.
온고지신, 술이부작은 지식의 출발점이다. 온고지신은 연역을 긍정하고 술이부작은 귀납을 부정한다. 술述은 원본의 복제다. 과학은 자연의 복제다.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있다. 전제 다음 진술, 근거 다음 추론, 옛 것 다음 새 것, 에너지 다음에 결정한다. 옛것이 복제의 원본이다.
소통의 장벽이 있다. 차가 없는데 운전부터 하라고 한다. 내릴 승객이 내리지 않았는데 타라고 한다. 주어가 없는데 말을 알아들으라고 한다. 우주의 첫 번째 지식은 머리가 꼬리에 앞선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변화에 앞선다. 본이 말에 앞서고 권력이 선택에 앞선다. 규칙이 먼저다.
인간다움의 본질은 선악이 아니라 대응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상대의 행동에 맞대응한다. 힘이 있어야 맞설 수 있다. 집단의 권력을 긍정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동력을 획득할 수 있다. 호르몬과 무의식과 본능의 지배를 극복하는 것이 극기복례다.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