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수상자 : 이전리
수상년도 : 2022년
수상작 : 경청
경청
소파 옆 액자 위치를 바꿔야겠어 하는 남편의 말에 액자를 쳐다 본다. 벽에 걸린 액자에 화초 잎이 닿을 듯하다. 해피트리가 쑥쑥 자라더니 액자가 자리를 내어주게 생겼다. 남편은 최근에 화초 바라기가 되었다. 간밤에 여린 새잎이 얼마나 자랐는지, 목말라 하지는 않는지 화초에 눈길이 자주 간다. 해피트리는 삼 년 전부터 키우던 화분인데 요즘 부쩍 잎에 윤기가 흐르고 키도 컸다. 해피트리만이 아니다. 거실의 화초들이 저마다 키크기 경쟁을 하고 덩치를 부풀린다. 거실이 생명의 열기로 가득 찼다.
화원에 가면 키우고 싶은 식물이 많아 고민에 빠진다.탐나는 화초도 여럿이고 공기 정화 식물이니 전자파 차단 식물이니 하는 설명에 이것저것 손이 간다. 하지만 집에 들이자마자 이리저리 옮기고 수선을 떨다가 시간이 지나면 습관적으로 물을 주는 일과의 대상이 된다. 물주는 주기마저 놓칠 때도 있다. 나에게 그들은 붙박이 가구나 다름이 없다. 그냥 예쁘게 자리를 지키기만을 바랄 뿐이다. 결국은 해피트리가 응애 벌레에 점령당했고 당황한 나는 그제야 찬찬히 살펴보았다. 보일 듯 말 듯 작은 점 같은 붉은 벌레가 잎과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잎을 지탱하는 줄기가 하나둘씩 몸통에서 떨어져 잔해로 나뒹굴었다. 다른 화초들도 건강하지 못했다. 물이 부족한 마삭줄 화분 아래에는 마른 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고 수경재배 중인 아이비에서는 썩은 내도 났다. 뿌리가 상했으니 중심이 다친 건데 오죽이아팠을까 미안하다. 천천히 지속해서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몰랐다. 경고장을 받고 나니 이제야 보인다.
코로나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남편이 나섰다. 자료를 검색해 화초마다의 특성을 알아내고는 그에 적당하게 물을 주고 영양제와 구충제를 뿌리고 분갈이도 하면서 일대일 맞춤 대응에 들어갔다. 햇볕을 좋아하는 오색마삭줄은 볕 좋은 곳으로 옮기니 이름대로 오색으로 잎을 달아 잎이꽃이 되었다. 잎끝이 잘 마르는 아레카야자는 매일 스프레이로 아침이슬을 만들어 주었다. 연둣빛 새순이 공작새의 접힌 꼬리처럼 뾰족이 올라오다가 문득 꼬리를 활짝 펼치듯 잎을 벌려 우리를 놀라게 했다. TV장을 지키는 산세비에리아는 또 어떤가. 새순이 여러 촉 올라와 화분이 비좁더니 처음으로 도톰한 잎뒤에서 수줍듯 꽃을 피웠다. 거실에 향기가 가득하다.
찬찬히 지켜보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자 화초들은 연이어 싹을 내고 반짝이는 잎을 뽐내고 꽃까지 선사했다. 붙박이 가구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반려 식물로 자리를 잡았다. 생기 있는 초록으로 가득 찬 거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잘 관찰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준 경청의 결과는 풍요롭다. 경청이란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이나 정서에 귀 기울이고 이해한 바를 상대방에게 피드백하는 것이라 한다. 즉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듣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건성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제대로 움직이기란 쉽지 않지만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몸의 중심인 허리로부터도 경고장을 받았다. 두 달 전부터 허리가 조금만 걸어도 빠질 듯이 아프고 아침에 깨면 말라빠진 나무토막처럼 뻣뻣 해져 살살 풀어줘야만 일어날 수 있었다. 피곤할 때마다 반복되던 요통이 더 자주 더 심하게 아픈 것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찜질로 허리를 달래는 일이 허다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러다 나으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시에 찌르는 듯한 엉덩이 통증이 엄습했다. 허리 디스크라는 의사의 말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유달리 피곤한 날 저녁 무렵이면 허리가 말을 걸어왔었다. 척추가 무너지고 있어요. 디스크가 찢어져요. 애타게 보내는 SOS였다. 척추 디스크의 부담을 줄여야 하는데 구부정한 자세로 운전을 하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거나 무거운 짐을 허리힘으로 들며 허리를 배려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비로소 떠올랐다. 다음 날 도착하는 요통이라는 경고음이 내게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총 맞은 것처럼 꼼짝 못 하고 누워서 지나쳐버린 신호를 뒤쫓는다.
허리 주사를 맞고 나서 더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걷기 운동은 몇 분이나 해야 하나요? 안 아픈 정도로만 하세요. 수영은 하는 게 좋을까요? 해보고 아프면 그만두세요. 병원에는 그만 와도 되나요? 통증이 있으면 다시 오세요. 당연하게도 모든 기준은 요통이다. 아프면 하지 말고 안 아프면 하고. 허리가 보내는 신호를 예민하게 감지해서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경청하고 밀당 해야 한다. 나 하고 싶은 대로 해선 좋아질 수 없다. 어제보다 좀 나았나? 오늘은 좀 더 걸을 수 있나? 오늘도 허리한테 묻고 또 묻는다. 함께 내 삶을 가꾸어나가야만 한다.
경청이란 주도권이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심히 관찰하고 미루어 짐작하고 적절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동식물 그리고 내 몸까지도 일방적 이기심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주의 깊게 살피고 알맞게 대응해야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가꾸는 세상이 시작되지 않을까. 남편의 정성이 담긴 거실의 화초처럼, 이제야 살살 걷게 된 내 허리처럼.
화분에 물 주는 김에 베란다 대청소까지 마친 남편이 피곤한 듯 소파에 눕더니 잠이 들었다.평소에 화초에 관심이 없다가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이낯설다. 여유 시간이 생겨서만은 아닌 것같다. 호르몬의 변화인가. 내가 지나친 신호는 없는지, 마음대로 해석한 사인은 없는지, 조용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기운을 되찾은 해피트리가 매끈한 잎을 훈장처럼 총총히 달고 소파 옆에서 가만가만 잎을 흔들며 자장가를 부른다.
수상 소감
은행잎 황금물결 아래에서
은행잎이 황금 물결치는 어느 가로수 길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단한 지 얼마 안 되어 글밭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인데, 신인작가상 수상이라는 단어가 얼떨떨합니다.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제 앞으로 상을 받은 것이 얼마 만인지요. 아마도 중학교 이후로 처음인 것같습니다. 게다가 다름 아닌 작가상이라니 이제껏 잘 살아왔다고 칭찬을 받은 느낌입니다.
어릴 적부터 문학의 길을 동경했습니다. 가지 못한 길이지만 늘 마음이 향하던 길입니다.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선생님과 문우님들 덕분에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많이 배우고 느끼고 열심히 쓰며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행복한 오후입니다. 미진한 작품에 힘을 실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전리 ljr221@daum.net
『한국수필』 등단(2021. 12).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졸업. 한일 통역 · 번역가. 한국수필가협회 · 한국수필작가회 · 솔샘문학회 회원.
심사평
심사위원|김혜숙ㆍ은종일ㆍ김선화
『한국수필』 제322호(2021.12)부터 제332호(2022.10)까지 게재된 신인 작품 가운데 1차 추천위원으로부터 추천된 작품 가운데 중복 추천이 된 이전리「경청」, 이윤정 「아버지와 병실마을」, 진연화 「커튼」, 성의제 「장작을 패면서」, 김시은 「벌레 먹은 복숭아」, 이은원 「별똥별 비」, 이영숙 「부부 반상기」, 이유인 「16년의 아름다운 동행」, 김영관 「무의미에서 의미 찾기」,강향순 「우연한 감동」, 김동극 「오분대기조」, 이종극 「흑백사진과 성적표」 등 12편을 대상으로 3명의 본심 심사 결과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1위로 뽑힌 ‘사물과의 교감 상상력 세계를 창작’한 이전리 「경청」이 영예의 신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한국수필가협회 창립 50주년을 지낸 수필 문단의 종가, 처음도 끝도 작품으로 말하는 장년 『한국수필』의 올해의 작가상과 우수작품상, 신인 작가상의 영예를 차지하신 수상자 여러분께 축하를 드리며 수상에서 빠진 여러분께는 다음 기회를 응원합니다.
- 은종일(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