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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11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공(空)은 충만하다★ 253~288p
<.명상이란 무엇인가? (1)-현재에 대한 순수한 감응(response)이다.> 252~260p
▷ 일 시 : 불기2568(2024)년11월18일 (월)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보광-조철주
2024년11월18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자매 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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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생활법문 및 교리를 전하였으며,
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했다.
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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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리내용- 라즈니쉬 오쇼의 가르침<반야심경 The Heart Sutra> ★공(空)은 충만하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1)-현재에 대한 순수한 감응(response)이다.> 252~260p
▶공(空)은 충만하다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보디사트바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사념의 장막없이 안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무득(無得) 때문이니라.
사념의 장막이 없으므로
그는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顚倒)된 마음을 극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열반(涅槃)에 이르니라.
삼세(三世)에
붓다로서 출현하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완성에 귀의하였기에
최상의 옳고 완전한 깨달음을
온전히 깨우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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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이 반야심경 전체가 명상의 가장 내밀한 핵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깊이 들어가 보자.
첫째로, 명상은 집중(concentration)이 아니다.
집중 안에는 '집중하는 자기'가 있고 '집중되는 대상' 이 있다.
거기엔 이원적 대립이 있다.
그러나
명상에는 안에 있는 주체도 없고, 밖에 있는 객체도 없다.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명상에는 안(in)과 밖(out)의 구분이 없다.
안은 밖으로 흘러들고, 밖은 안으로 흘러든다.
안과 밖의 경계선, 구획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다. 명상은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의식이다.
그러나
집중은 이원적인 의식 상태이다.
집중이 피로함을 초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까닭에 오래 집중하면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동안 계속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휴식이 필요하다.
집중은 결코 그대의 본성으로 내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명상은 피곤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대를 소모시키지 않는다.
명상은 하루 24시간 내내 쉼없이 계속될 수 있다.
영원히 명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상 자체가 휴식이기 때문이다.
집중은 하나의 행위, 의지가 개입된 행위다. 255
그러나
명상은 의지가 없는 상태, 무위(無)의 상태다. 명상은 휴식이다.
명상 안에서 그대는 자신의 본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본질은 모든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집중에는 계획이 있고, 투영이 있고, 관념이 있다.
집중 안에서 마음은 단정적 결론을 통해 작용한다.
나는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단정이 있다. 집중은 과거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명상에는 결론이 없다. 그대는 특별히 어떤 행위를 하는게 아니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명상에는 과거가 없다.
과거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
또한 명상에는 미래도 없다. 미래가 개입되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가 '위무위(爲無爲)'라고 부른 것이다.
아무것도 함이 없이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선사(禪師)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앉아 있어라.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푸르러진다' 고 말했다.
이 저절로'라는 말을 기억하라.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는다.
억지로 풀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다.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돋아난다.
삶이 제 갈 길을 가도록 놔두는 것,
방향을 정하거나 억지로 조작하지 않는 것,
삶에 어떠한 규율도 강요하지 않는 것,
이것이 명상이다.
어떠한 인위성(爲도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자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일어나도록 놔두는 것,
이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순수한 현재 안에 있다.
명상은 즉시성(即時性, immediacy)의 상태다.
그대는 명상을 행할 수 없다.
다만 명상 안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집중에 대해 말한다면,
그대는 집중 안에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집중을 행할 뿐이다.
집중은 인간의 차원이요,
명상은 신적(神的)인 차원이다.
집중은 그대 안에 하나의 중심을 갖는다. 그 중심을 통해 집중이 일어난다.
집중은 그대 안에 하나의 '자기'를 갖는다.
실제로 집중하는 사람은 매우 강력한 '자기'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256
그는 점점 더 강력해지고 더 통합된 의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는 더 일관된 모습을 띄게 된다.
그러나
명상하는 사람은 강인해(powerful)지지 않는다.
그는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힘(power)은 갈등 구조를 통해 생성된다.
모든 힘이 마찰에서 비롯된다. 마찰을 통해 전기가 나온다. 물에서 전기를 얻을 수있다.
강물이 폭포를 이루어 떨어질 때 물과 바위 사이에는 마찰이 일어난다.
그 마찰이 에너지를 낳는다.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항상 싸움을 일삼는 까닭이 그것이다.
싸움은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에너지와 힘은 항상 마찰을 통해 존재한다.
세상에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힘'이라는 개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이 없으면 강력해질 수 없기 때문에 싸움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명상은 평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평화에는 고유의 힘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힘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마찰에서 비롯된 힘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며 남성적이다.
그러나 평화에서 나온 힘은..
나는 달리 마땅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힘(power)'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평화에서 나온 힘은 여성적이다. 이 힘에는 우아함이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힘이다. 하나의 수용성이며 개방성이다.
이것은 마찰에서 나온 힘이 아니다. 그러므로 폭력적이지 않다.
붓다는 강력하다.
침묵과 평화 안에서 그는 강력하다.
그는 장미꽃만 큼이나 강력하다.
원자폭탄처럼 강력한 게 아니다.
그는 어린아이의 맑은 웃음처럼 강력하다.
매우 섬세하고 여린 강력함이다.
그는 칼처럼 강력한 게 아니다.
그는 어두운 밤을 밝혀 주는 작은 등불처럼 강력하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이다.
이 힘을 우리는 '신성한 힘(divine power)'이라고 부른다.
이 힘은 마찰이 없는 상태에서 나온다.
집중은 마찰 현상이다.
집중할 때 그대는 자신의 마음과 싸운다.
마음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
특정한 관념,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려고 한다.
마음을 한 점에 고정시키려고 강요한다.
그러나
마음은 계속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도망치고,
그럴 때마다 그대는 우격다짐으로 마음을 다시 원점으로 끌어당긴다.
그대는 자신과 싸우면서 내분(分)을 일으킨다.
이런 내분을 통해서도 분명 어떤 힘이 창조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 힘은 세상의 다른 힘만큼이나 위험하고 해롭다.
이렇게 만들어진 힘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찰을 통해 생성된 힘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폭력에서 나온 것은 당연히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파괴적인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평화에서 나온 힘, 마찰과 인위적인 조작, 싸움 없이 일어난 힘은 장미꽃의 힘이다.
이것은 작은 등불의 힘이며, 미소 짓는 어린아이의 힘이다.
우는 여인네의 힘이며, 눈물의 힘, 또는 이슬방울의 힘이다.
이것은 엄청난 힘이지만 거칠지 않다. 무한한 힘이지만 폭력적이지 않다.
집중은 그대를 의지의 인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명상은 그대를 공(空)으로 만들 것이다.
이것이 붓다가 사리푸트라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Prajnaparamita)는 정확하게 '명상'을 의미한다.
저 너머의 지혜가 반야바라밀다 다.
이 초월의 지혜를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것에 대해 열려있을 수는 있다.
그것을 세상으로 가져오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대를 초월한다.
이 초월의 지혜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대가 사라져야 한다.
명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멈추어야 한다.
집중은 마음의 노력이지만 명상은 마음의 부재(不在) 상태다.
명상은 순수한 각성이다. 명상에는 어떠한 동기(motive)도 없다.
명상은 씨앗 없이 자라나는 나무이다. 이것이 명상의 기적이며 신비이다. 258
집중은 그 안에 씨앗을 갖는다.
특정한 목적이 있고 동기가 있다. 집중은 특정한 동기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에는 아무런 동기도 없다.
그렇다면,
아무 동기도 없다면 우리는 왜 명상해야 하는가?
모든 동기를 관찰해 보고 그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동기라는 것을 철저히 경험해 보고 그 허구성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명상이 태어난다.
이제 동기가 그대를 아무데로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대는 자신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기는 끊임없이 그대를 몰고 간다.
계속 새로운 욕망을 불러 일으키면서 거의 미칠 지경까지 몰고 간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대는 여전히 빈손이다.
이런 현상을 자각했을 때,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보고 모든 동기가 실패했음을 알았을 때..
지금까지 어떠한 동기도 성공하지 못했다. 어떠한 동기도 지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동기는 그저 달콤한 약속을 줄 뿐이다.
약속된 상품은 결코 배달되지 않는다.
하나의 동기가 실패하면 다른 동기가 나타나 또 약속한다.
그리고
그대는 또 속아 넘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그대는 자신이 동기에 의해 계속 속고 있음을 자각한다.
이 자각이 바로 명상의 시작이다.
명상에는 씨앗이 없다. 거기엔 동기가 없다.
만일 어떤 목적을 갖고 명상한다면
이때 그대는 집중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명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그대는 여전히 세상 속에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여전히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신을 얻기 위해 명상한다 해도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에 다름아니다.
열반을 얻기 위해 명상한다 해도 그대는 세속적이다. 명상에는 아무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목적이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는 것, 이것이 명상이다.
욕망이 그대를 아무데로도 데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명상이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259
나, 붓다, 또는 예수를 통해 믿음을 얻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대가 직접 깨우치고 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 볼 수 있다!
그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동기를 보아 왔다.
그대는 많은 혼란을 거쳐 왔으며,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했다.
그리고
이런 구분에 의해 많은 일들을 해왔다. 자, 이제 보라!
그 모든 목적이 그대를 어디로 인도했는가?
지금 나는 내게 동의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그대가 무시하고 있는 하나의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을 뿐이다
.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실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래서 그대는 이 사실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복잡한 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복잡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행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나 간단하고 명백한 현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간단한 것은 간과되고 무시된다.
간단한 것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그대는 결코 이것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대는 계속해서 복잡한 것을 찾고 있다. 복잡한 것은 도전(挑戰) 욕구를 주기 때문이다.
복잡한 문제 복잡한 현상, 복잡한 상황은 그대에게 도전 욕구를 심어준다.
그 도전 안에 에너지가 흘러들고 마찰과 갈등이 일어난다.
그대는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신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문제가 있을 때, 그대는 무엇인가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홍분에 설레게 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주 간단한 사실이지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이 간단한 사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전 욕구도 주지 않는다.
그냥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관찰할 수도 있고 아니면 회피할 수도 있다.
그것은 소리높여 외치지 않는다. 너무나 단순하다.
그것을 내면의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 라고 부르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260
그것은 속삭이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보라!
이 말은 지금 당장 보라는 뜻이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것을 보라!'고 말하는 즉시 그것을 보라!
즉시 보지 않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 찰나 지간에 마음이 들어와 알을 까기 시작한다.
마음이 사념과 편견을 가져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그대는 철학적인 사유(思惟)에 잠기게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택해야 한다.
사색이 시작된 것이다. 그대는 실존적인 순간을 놓쳐 버렸다.
실존적 순간이란 바로 지금' 이다. 그저 보라. 이것이 명상이다.
이'봄(觀)'이 명상이다.
특정한 사물이나 상황의 사실성(facticity)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에는 아무런 동기도 없다. 따라서 중심도 없다.
그리고 동기도 없고 중심도 없으므로 '자기'도 없다.
명상 안에서 그대는 하나의 중심을 통해 작용하지 않는다.
그대를 무(無)를 통해 움직인다.
무(無)에서 나오는 감응,
이것이 명상의 전부다.
마음은 집중한다. 마음은 과거를 통해 행동한다.
그러나 명상은 현재 안에서 행동한다.
명상은 현재에 대한 순수한 감응(response)이다.
이것은 반응(reaction)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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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반야심경』초판2쇄;서울:태일출판사,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