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골목책방(이사장)에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단기 4292년(서기 기준 1959) 10월에 간행한 <국사상의 제문제> 제3집(동국문화사 발행), 11월에 나온 제4집,12월에 나온 제5집, 단기 4293년 4월에 나온 6집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고문집인 목활자본<월헌집>과 금속활자본(연활자체)<삼한림연방집 권1>을 구입하였다.
청계천서점(대표 박동재)에 와서 조정형의 저서 <다시 찾아야할 우리의 술>(서해문집, 1991, 290면, 6천원), 겔라 편, 김영범, 지승종 공역, <인텔리겐챠와 지식인>( 학민글밭 3, 학민사, 1983, 263면, 3천원)을 구입하고, 일광서점(대표 김수섭)에서 <한국경제사학논총>(최호진 박사화갑기념논총, 박영사, 1974. 8. 15), <내고장의 맥(脈)(경인일보사, 1984. 4. 10, 413면, 3500원), <중구의 세시와 풍속>(중구향토사자료 제10집,서울 중구 문화원, 2007. 2. 28, 370면, 비매품)(집필자:김선풍 중앙대 민속학과 명예교수) 등 11권을 구입하였다.
월헌(月軒)은 누구의 호일까, 그 분의 문집에 흥미가 생겼다. 그 문집의 주인공은 정수강(丁壽崗)이다. 정수강은 1454년-1527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 자는 불붕, 호는 월헌, 소격서 령급의 아들, 1474년 성종 5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교서에 소속되었다. 이후 정언, 병조좌랑, 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1482년에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1499년 연산군 5년에 장령에 임용되어 성준의 불법을 탄핵하기도 하였으나, 논사를 피하기 위하여 휴가를 얻어 충청도에 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03년 직제학으로 영등포에 파견되어 지방관의 불법행위를 조사한 공으로 부제학이 되었으나,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1506년 중종 1년에 중종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원종공신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 해 강원도관찰사로 외보되었다. 이후 판결사, 대사간을 거쳐 1512년 병조참지에 이르렀다. 1516년 사유가당인(師儒可當人)으로 선발되었으며, 1518년 대사성, 대사헌을 거쳐 병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전의제조, 빙고제조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월헌집이 있다. 최근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이상보 회장, 국민대 국문과 명예교수)에서 시비를 건립한 분이다. 나주정씨 월헌문중에서 기념사업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월헌집도 국역본을 내었다.
그리고 이정암(李廷唵*)과 이정형(李廷馨)의 문집인 <사류재선생유고>와 <지퇴당고>를 합본하여 <<삼한림연방집>>을 만들어 권1에다 넣어 편저한 문집이다. 이정암은 성균관대 사학과 이장희 명예교수의 논문 <임란 해서(海西)의병에 대한 일고>(사총 14집, 1969년)에 나타나듯이 임진왜란 때는 황해도에 들어가 초토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연안성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 작업을 서둘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로 해주의 수양산성을 지키기도 하였다. 본관은 경주로 중종 36년 1541년에 태어나서 선조 33년 1600년에 돌아가신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이정형은 이정암의 아우인데 1549년에 태어났으니 8살 아래이다. 그리고 1607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조정형 저 <다시 찾아야할 우리의 술>에서 재미난 것을 발견하였는데 진도의 홍주에서 양천허씨 상우당 허종 선조의 이야기가 나온다.상우당 허종 선조가 성종 때 하루는 조정에 가는 날 부인인 청주한씨가 술을 마시게 하여 사직동 종침교에서 낙상하여 조정에 가지 못했다. 그때 마신 술이 지초로 만든 붉은 색깔의 술인 홍주였다는 것이다. 지금 종로구 내자동에는 표지석을 해놓아서 잘 알려진 곳이 종침교이다. 연산군이 집권 하면서 자신의 생모(윤씨)가 폐위될 때 참여한 모든 신하들을 처형한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나 상우당 허종과 이헌 허침 형제분은 다행히 참여하지 않아서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