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내면에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2) 휘장(마음, 카르디아) 안에서는 온갖 번뇌와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3) 골방 안에서는 지성소에서 나오는 하늘의 양식(아르토스)을 먹을 수 있다.
4) 기도(프로슈케)의 조건은 골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있어야 한다.
나. 본론
1) 내면에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용서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휘장(마음, 카르디아)을 찢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면으로 돌이켜 이미 와 계신 그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자신 안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어떤 모양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인 그 그리스도 예수를 구약에는 ‘베레쉬트’로 새 언약에서는 ‘엔 아르케’로 말씀하신다. 똑똑하기를 자처하는 종교인들이 오해하여 모두 태초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태초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나(예수 차원)와 하나 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파라볼레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있는 참 나(방편)인 그 근본(베레쉬트)을 드러내기 위해 허상으로 와 있는 휘장을 찢고 그 뒤에 계신 근본(베레쉬트)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근본(베레쉬트)은 대상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하난미과 하나된 나(에고 에이미)다.
2) 휘장(마음, 카르디아) 안에서는 온갖 번뇌와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휘장(마음) 안에서는 온갖 번뇌와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변화를 반복한다. 고난의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휘장은 내가 아니라 찢어야 할 대상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변화의 대상일 뿐이다. 환상으로 예수를 보더라도 그것은 사라져가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속사람인 그리스도 예수는 대상이 아니라 근본(베레쉬트, 엔 아르케)이다.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하거나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이며, 에고 에이미다. 변하거나 사라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은 원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천국에 가고 싶은 욕망이나 어떠한 소원도 없다. 그러므로 종교 행위도 없다. 만약 마음에 원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하면 아직은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갈 길이 먼 자다. 마음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3) 골방 안에서는 지성소에서 나오는 하늘의 양식(아르토스)을 먹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는 골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있기만 해도 원하는 것이 없어진다. 이 안에서는 몸과 마음을 입고 태어나는 일은 없다. 오직 아버지가 계시는 지성소 안에서 나오는 하늘의 양식(아르토스)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마 6:11).
그 양식(아르토스)을 먹을 수 있는 때가 세메론이다. 오늘날로 오역한 세메론은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욤(빛)이다. 그러므로 세메론은 그 생명의 그 빛이다. 지성소 안으로부터 나오는 양식을 먹으면 하나님과 하나 된 그 생명의 빛이 된다. 참 지혜이며 참 하나님이다. 이것을 위함이 기도(프로슈케)다. 겉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가 아니다. 종교인들에 의해 기도가 오해되고 있다.
4) 기도(프로슈케)의 조건은 골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프로슈케)의 조건은 반드시 골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있어야 기도(프로슈케)를 할 수 있다. 이 기도를 하면 하늘의 양식(아르토스)을 먹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다. 곧 하나님이 됨이다. 불교에서는, 붓다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다. 이 외의 모든 기도(원함)는 뱀(다른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다.
베레쉬트(근본)를 불교에서는 깨달음, 붓다를 무아로 설명한다. 무아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어서 어떠한 번뇌 망상도 없으며 원하는 마음도 없다. 이것을 우리는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공간을 넘어 서 있고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을 온전히 넘어 서 있다. 경험해야 할 뿐이다. 대단히 중요한 내용으로 이론과 학문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세계가 아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