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츠빙글리 사후 4년 만인 1535년에 바젤로 피신해 옴으로써 츠빙글리의 신학과 역사적 접촉점을 갖게 되었다. 열렬한 츠빙글리주의자였던 기욤 파렐이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칼빈을 자신의 사역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칼빈은 바젤에 오기 전에도 볼마르 교수를 통해서 루터의 서적들을 소개받아 외콜람파드나 츠빙글리의 성례전 사상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칼빈은 이때까지만 하여도 그들의 책을 외면하고 오랫동안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1529년에 마르부르크회담에 참석하면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논쟁을 판정할 정도가 되었고, 가장 힘들게 느꼈던 문제들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경험을 하였다. 칼빈은 파렐을 비롯한 츠빙글리주의자들과의 접촉을 함으로써 보다 츠빙글리에게 가까워졌고, 츠빙글리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츠빙글리와 칼빈의 관계에 대한 글을 구분선 아래에 타자쳐 올린다.
결과적으로 츠빙글리는 개혁교회 역사와 전통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별, 이에 입각한 우상숭배, 즉 미신 타파라는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 칼빈을 비롯한 수많은 개혁파들은 이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고 이에 근거하여 모든 신학사상을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츠빙글리가 주장한 섭리 성화, 성찬론 등은 개혁교회 신학적 전통의 근간을 이루며 개혁교회 신학의 핵심적 특징을 제공해주고 있다. 츠빙글리의 모든 저서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명백한 차이' 를 다양한 관점에 따라 해명하는 주석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읽으며 이해할 때 이 원칙을 숙지하며 읽으면 별다른 무리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루터의 신학을 그의 학문적 동역자인 멜랑히톤을 통하여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수용한 츠빙글리의 신학과 더불어 비판적인 관점으로 소개하고 있다.
1536년 바젤에서 출판된 「기독교 강요」 초판은 칼빈과 츠빙글리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기독교 강요」 초판은 1536년 3월에 출판되었지만, 초판 헌정사는 정확하게 1535년 8월 23일로 기술되어 있다). 칼빈은 프랑스에서 추방된 이후 「기독교 강요」 초판의 출판을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기독교 강요」는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변증으로서, 프랑스 왕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는 그의 서문 표제는 '신앙고백적인 의미를 지니고 헌정하는' 이라는 언급과 함께 시작한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하여 일곱 회에 걸쳐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츠빙글리의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해」(1525)와 유사하게 「기독교 강요」 초판은 하나님 인식, 인간의 자기인식, 기독교를 주제로 전개된다. 동시에 칼빈은 인문주의와의 논쟁을 시도한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가 강조한 바와 같이 '율법과 복음' 의 순서를 수용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츠빙글리와 칼빈의 신학사상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츠빙글리의 ‘하나님 예배와 우상 숭배의 근본적 구별, 즉 참된 경건과 미신의 근본적 구별'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루터의 글보다는 츠빙글리의 글이 논리적인데, 칼빈의 글은 츠빙글리보다 더 논리적이다. 그 이유는 칼빈이 법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습득한 법률적 논리전개를 통하여 그의 고유한 신학사상을 표현한다. 칼빈은 몽테규 대학에서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와 함께 사제준비과정인 대학예비과정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수했고, 이후 오를레앙(Orlean)과 부르지(Bourge)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오를레앙대학의 레투아르(Pierre de L' Etoile) 교수는 중세 시기의 관습적인 법조문 해석방식을 강조하였고, 부르지 대학의 안드레아 알키아토(Andrea Alciato, 1492~1550) 교수는 원문을 중심으로 고대 법조문을 연구하는 인문주의적 방식을 주장했다.
칼빈은 알키아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양자 간의 진지한 학문적 논쟁을 통하여 논리적 사유방식을 배우게 된다. 그때 훈련된 인문주의적 사고방식은 대립된 신학적 논쟁의 해법을 모색하는 논리적 사유능력을 배양시켰으며, 이는 이후 「기독교 강요」를 비롯한 다양한 책을 저술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의 신학적, 신앙적 족보를 역으로 추적해볼 때 한국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도움이 컸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647년 영국 성공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할 수 있게 만든 영국 청교도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칼빈은 츠빙글리와 함께 이해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와 츠빙글리는 깊은 관련이 있다 하겠다.
이 부분을 다시 이해하기 위하여 츠빙글리와 칼빈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509년 프랑스 노용에서 태어난 칼빈은 오늘날처럼 신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몽테규 대학에서 신학준비과정을 이수했고, 이후에 오를레앙과 부르지 대학에서 법학을, 파리의 프랑스 대학에서 인문주의 연구에 열을 올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교육과정을 이수하면서 프랑스 로마 가톨릭의 개혁적 소장파였던 성서인문주의자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성서인문주의 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사상과 성경원문연구를 지향한 에라스무스의 기독교 인문주의 운동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새로운 신학운동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스위스 바젤로 피신하며, 이후 제네바의 개혁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제안으로 제네바 종교개혁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535년 칼빈이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을 무렵 스위스는 이미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운동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칼빈의 동역자 파렐이 열렬한 츠빙글리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성서인문주의자 칼빈은 자신이 망명지로 선택한 스위스에서 츠빙글리 후예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종교개혁사상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2세대 개혁자로서 1세대 개혁자 루터와 츠빙글리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통합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인식'을 서두로 시작하는 1559년 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칼빈주의가 츠빙글리주의를 대체, 완성했음을 알리는 대표적 상징이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식'은 1525년에 출판된 츠빙글리의 대표적 저서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해」의 서두에 등장하는 문구로서 츠빙글리주의를 상징하는 중요한 모토이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은 1549년 츠빙글리의 공식적인 후계자 불링거와 함께 취리히 합의신조를 체결한다. 이 합의신조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교회의 공재설 비판에 집중하며, 이분화된 취리히와 제네바 개혁교회의 성찬론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칼빈주의가 이미 츠빙글리주의를 대체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문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츠빙글리주의는 칼빈주의의 기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츠빙글리주의는 다양한 개혁신학의 흐름 중 하나일 뿐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 이후 독일에 설립된 개신교회를 루터교회라고 지칭하는 것과 달리, 개혁교회는 칼빈교회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루터교회는 루터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16세기에 선언된 신앙고백을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개혁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시대적 질문에 응답한 신앙고백문들을 모두 신앙고백으로 인정하고 있다. 단지 개혁신학의 중요한 이론적 틀을 칼빈이 제시했기 때문에 칼빈주의가 개혁신학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성 강조,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에 대한 전적인 강조, 언약에 근거한 신·구약의 통일성 강조, 성화와 윤리적 실천의 강조, 교회의 일치와 교회의 자유옹호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하나로 정형화하여 설명하기보다 츠빙글리의 개혁신학, 칼빈의 개혁신학, 존 녹스의 개혁신학,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혁신학 등으로 세분화하여 표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에 의하면, 16세기 개신교회의 형태는 구프로테스탄트주의(Altprotestantismus)로, 17세기 이후에는 신프로테스탄트주의(Neuprotestantismus)로 구분, 정의된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국가교회와 비국가교회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관철된 독일과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관철된 스위스의 경우 중세 시기 가톨릭과 같은 국가교회 체제를 유지했다. 칼빈도 마찬가지이지만 칼빈의 경우 국가교회에서 비국가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제후의 영향권 안에 존재했던 루터교회, 시의회의 통제를 받았던 츠빙글리의 개혁교회와 달리, 칼빈은 국가교회 체제를 수용하면서도 교회의 독립과 자유를 강하게 주장했다.
여기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면에서만큼은 국가교회 체제를 강하게 거부한 재세례파가 신프로테스탄트주의의 최초의 선구자라고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서울: 익투스, 2014), pp. 73~80.
첫댓글 아주 좋은 글입니다. 도입부분에 쓴 내용에 공감하고 구분선 아래 조용석 저자가 쓴 글에서 큰 유익을 얻습니다. 칼빈과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이 유사하다는 것과 주요 종교개혁자들 중 칼빈의 논리력이 거장 뒤어나다는 서술에 특히 공감을 합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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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 Basel
요약 스위스의 행정구역. 비르스 강과 비제 강의 어귀에 라인 강을 끼고,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이 만나는 스위스 라인란트 입구에 있다. 1501년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으며 네덜란드의 학자 에라스무스가 이곳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인문주의와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종교개혁을 피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숙련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18세기에 이르러 길드가 정치권을 쥐게 되었다. 유통 중심지로서 스위스 총관세 수입의 1/3이 이곳에서 얻어지며, 국제결제은행이 있다. 스위스 화학 및 석유화학 산업의 중심지이며, 전기공학, 금융업, 기계류·견직물 제조업 등의 산업도 중요하다.
이하 Daum 백과 링크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8b3219a
에라스무스가 교수하며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역사에서 지리와 지정학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칼빈이 스위스로 망명하여 츠빙글리의 후예들과 교제하고 상호작용 하며... 더 업그레이드 된 개혁주의를 일구어냈음을 알게 하는 좋은 포스팅입니다.
네, 공감해요. 핵심을 요약해 주신 갓 같습니다.
기욤 파렐( Guillaume Farel)
기욤 파렐(프랑스어: Guillaume Farel; 지역 방언: Fareau)은 종교개혁가로 1489년에 도피네(Dauphiné) 지방 가프(Gap) 근처에 있는 레 파로(Les Fareaux)에서 태어나서 1565년 9월 13일 스위스 뇌샤텔(Neuchatel)에서 죽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며 종교개혁 사상이 불어권 스위스 즉 로망드 스위스 지역에서 확산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장 칼뱅 (프랑스어: Jean Calvin)을 강하게 설득하여 주네브 (프랑스어: Genève)에서 종교개혁 활동을 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렐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C%9A%A4_%ED%8C%8C%EB%A0%90
칼빈을 개혁주의적 종교개혁의 중심으로 불러들인 분이 파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필자 조용석님의 신 프로테스탄트주의라는 용어 사용은 참신합니다. 그런데 재세례파는 이미 급진 종교개혁, 좌파 종교개혁 또는 과격 종교개혁이라는 용어가 있으므로 그것들을 잘 활용하면 되겠습니다. 신과 구를 나눈 16세기에 이미 재세례파가 있았다는 점도 유념해야 합니다.
오히려 17세기에 일어난 정통 개신교를 '후기 개신교', '개신교 후기'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개신교 후기 종교개혁의 대표주자는 청교도운동입니다.
네, 좋은 댓글과 분별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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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견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