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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7강
* 근본불각(根本不覺)-근본적인 깨닫지 못함
所言不覺義者 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 不覺心起而有其念 念無自相 不離本覺 猶如迷人
소언불각의자 위불여실지진여법일고 불각심기이유기념 염무자상 불리본각 유여미인
依方故迷 若離於方則無有迷 衆生亦爾 依覺故迷 若離覺性 則無不覺 以有不覺妄想心
의방고미 약리어방즉무유미 중생역이 의각고미 약리각성 즉무불각 이유불각망상심
故 能知名義 爲說眞覺 若離不覺之心則無眞覺自相可說
고 능지명의 위설진각 약리불각지심즉무진각자상가설
[번역] 말했던 불각(不覺)의 뜻이란 이른바 있는 그대로 진여(眞如)의 법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서 그 염(念, 분별)이 있다.
염(念)은 자성이 없어서 본각(本覺)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방위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된 것과 같다.
만일 방위를 여읜다면 미혹이 없을 것이다.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각(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하게 된다.
만약 각성(覺性)을 여읜다면 깨닫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각이란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미만으로 알기에
진각(眞覺)을 설하게 된다.
만약 불각의 마음만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自相)이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해설] 여기서는 근본불각(根本不覺)에 대해 총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진여(眞如)의 법이 하나인 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서 분별망상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중생과 중생이 되는 이유와 고통의 근본 요인을 밝힌 것이요, 역으로 불난 집인 화택(火宅)에 비유되는 세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본 이유도 밝힌 것입니다. 이 깨닫지 못한 불각(不覺)은 곧 고통이요, 중생이며 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각이란 최초의 알지 못함인 근본무명을 말합니다. 진여(眞如)의 법은 허망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 하나된 진리입니다. 연기(緣起)·공(空)·무아(無我)·열반(涅槃)이 그러합니다. 일체 모든 존재가 연기라는 하나의 진리로 설명되어집니다.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무아이며, 본질적으로 공(空)이며, 해탈한 열반을 업감연기(業感緣起)·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법계연기(法界緣起)·육대연기(六大緣起) 등의 연기라는 진리 하나로서 설명될 수 있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여(眞如) 또는 여래장(如來藏)연기입니다.
이 진여(眞如)는 말과 대상의 인식을 떠나 있기에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말과 생각은 곧 주관이 객관을 상대했을 때 일어납니다. 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影像)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여름에 피는 장미는 바람과 땅·물·태양·기후 등 모든 조건들과 연관되어 피어 있지만, 장미라는 말 한마디로 규정할 때에는 장미를 존재하게 하는 모든 조건과의 연계성이 보이질 않습니다. 장미는 장미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연기관계에서 상호 포섭하고 소통하면서 전체 속의 조화된 일원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렇듯 장미라는 개체를 표현하는 말이 장미 자체와는 별개이듯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의 영상일 뿐입니다. 말과 생각은 개체를 독립된 실체로서 고정시키는 것이지만, 말과 생각을 떠난 진여는 어우러진 연기세계로서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합니다. 한 겨울 모진 바람 속에서 매화는 봄바람의 기운을 느끼고 꽃을 피우지만, 기실 매화는 봄바람을 모르고 봄바람 또한 매화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진여의 연기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아(無我)는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독립체가 아닌 것은 서로가 원인이 되고 조연이 되어 조화를 이룬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조화로움은 변화하는 무상(無常)이요, 집착으로 나타나면 고통이요, 집착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중도(中道)적 실상의 열반입니다. 곧 싹이 나고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시들고 지는 그대로입니다. 왜냐하면 현상계의 그 무엇도 고정된 것이 없어 무상합니다. 무상하여 서로 영향을 받아 살아 움직이고, 살아 움직이는 것은 독립된 실체가 없어 공(空)인 연기이며, 텅 빈 연기이므로 서로 용납하며, 서로 용납하는 것은 자아를 세울 수 없어 무아(無我)로서 같은 성품이라 서로 알지 못합니다.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은 진여법(眞如法)이 하나인 중도(中道)입니다. 그렇다면 서로가 알아본다는 것은 곧 말과 생각에 의해 파악하는 것으로 순간적인 대상은 영상이며 파악하는 마음은 망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아는 것은 무분별(無分別)의 반야지혜(般若智慧)요, 그렇지 못한 것은 무명(無明)입니다. 무명도 진여의 다른 모습인데 왜 진여의 모습을 무명이라고 할까요? 진여는 하나의 모습인 일상(一相)이며 또한 하나라고 하는 것마저 용납할 수 없는 무상(無相)인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연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더라도 서로가 같은 무성(無性)이므로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르는 데에서 알려고 하는 마음이 홀연히 일어나니 곧 망념(妄念)이며 근본무명입니다.
근본무명도 진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즉, 망념(妄念) 그 자체가 무자성(無自性)이기에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진여본각과 무명을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여와 무명이 같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살인 강도질하는 것이 모두 진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여는 선, 또는 악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모두 용납하되 선은 행복을 악은 괴로움을 수반하기 때문에 진여인 무명을 싫어하고 벗어나려고 합니다. 수행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닦고 보면 무수(無修)요, 깨치고 보면 무각(無覺)이며, 증득(證得)하고 보면 무증(無證)이기에 진여와 무명은 다르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단지 괴로움을 유발시킴으로 무명이라 할뿐이고, 현실의 고(苦)때문에 진여와 무명의 갈림이 있습니다. 진여의 본원자리는 시공과 선악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괴로움은 무명불각(無明不覺)때문에, 불각은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 때문에 세워진 것입니다. 길을 헤매는 것은 동서남북과 상하라는 방향이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방향이 없다면 길을 잃어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괴로움이란 괴로움이 없는 각(覺)을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관조(觀照)하는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일으키는 불각의 망상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진각(眞覺)이라는 자체가 망상을 일으키는 무명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이 깨닫고 보니 중생 그대로 부처입니다.
* 지말불각(枝末不覺)-지말적인 깨닫지 못함
復次依不覺故 生三種相 與彼不覺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
부차의불각고 생삼종상 여피불각상응불리 운하위삼 일자무명업상
以依不覺故心動 說名爲業 覺則不動 動則有苦 果不離因故 二者能見相
이의불각고심동 설명위업 각즉부동 동즉유고 과불리인고 이자능경상
以依動故能見 不動則無見 三者境界相 以依能見故境界妄現 離見則無境界
이의동고능견 부동즉무견 삼자경계상 이의능견고경계망현 이견즉무경계
[번역] 다시 다음에 불각(不覺)을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양상을 내어 저 불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는다. 무엇을 셋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으로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설명하여 업이라 한다.
깨달으면 곧 움직이지 아니하나 움직이면 곧 고통이 있으니 과(果)가 인(因)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견상(能見相)으로 움직임을 의지하기 때문에 볼 수 있다. 움직이지 아니하면 곧 불 수 없다.
셋째는 경계상(境界相)으로 능견상을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망녕되게 나타나지만 견(見)을 여의면 곧 경계도 없다.
[해설] 여기서는 지말불각(枝末不覺)이 점차로 움직이는 양상을 드러낸 것입니다. 불각을 의지한다는 것은 지말불각이 근본불각(根本不覺)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근본무명에 반연하여 괴로움이 생기(生起)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있기에 지말불각이라 한 것입니다. 지말불각에는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의 작용인 삼세(三細)와 여섯 가지 거친 마음의 작용인 육추(六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의 작용이란 무명업상(無明業相)과 전상(轉相)인 능견상(能見相)과 현상(現相)인 경계상(境界相)입니다. 이 세 가지는 알려고 하는 마음이 움직이고, 이 움직임을 의지하여 보려고 하며 봄으로써 대상경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진여의 무차별 공성(空性)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객이 없어 하나이면서 무지(無知)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여에 대한 밝지 못한 무지의 성격인 '무명(無明)'에서 한 생각이 홀연히 일어나 알려고 하는 마음이 곧 세 가지 미세한 불각(不覺)입니다.
이 마음의 무지(無知)인 무명(無明)은 성(性)과 상(相)이란 두 가지 모습을 갖습니다. 성(性)은 마치 큰 허공에 일체의 세계가 이루어졌다가 파괴되는 변화를 연출하지만 허공자체는 분별이 없어서 본성이 청정하여 물듦과 어지러움, 장애가 없으며 길고 짧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겁을 다하도록 일체 세계를 유지시키는 것과 같은 무지입니다. 상(相)으로서의 무지는 일체의 세계가 허공을 본질로 하여 갖가지 차별로 자기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면서 서로가 원인과 반연이 되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무명이 이분화시키고 고정화, 실체화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인연의 바탕이 무자성(無自性)인데도 무명이 개입되면 존재가 이분화되고 실체화되어서 인과 연의 주고받는 영향으로 서로 안다 하는 것은 환(幻)이요 꿈같은 것임을 망각하고 겉모습만을 서로 알게 됩니다. 이것도 본래 진여의 무성(無性)때문에 일어나는 연기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별을 일으키는 앎으로 대표되는 지식(知識)이란 무명과 탐진치 등의 번뇌망상이 관여하여 괴로움을 동반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무명업상의 무지'는 진여의 무성을 근본으로 하여 일어나는데, 먼저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의 주관과 객관으로 분화되어 주관이 생기며 그럼으로써 객관이 나타납니다. 이후에 무명무지(無明無知)의 앎이 일어납니다. 마음의 움직임은 무명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 것으로 업(業)의 성격을 갔습니다. 이는 주관과 객관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앎은 주객이 분리되어 주관이 객관을 인식할 때 일어나므로 알려는 마음이 움직여서 주관과 객관으로 분화된 것입니다.
즉, 주관이란 전상(轉相)의 능견상은 알려는 마음이 밖으로 향한 것입니다. 진여의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없으므로 마음이 밖으로 향하여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여지는 마음은 무상(無相)이라 보는 마음이 있을 뿐 보여지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보여지는 대상의 객관인 현상(現相)의 경계상은 능히 보는 마음에 의해 나타납니다. 이 경계의 모습에 갖가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은 여섯 가지 거친 마음인 육추(六 )에 의해서입니다.
이와 같은 미세한 세 가지 불각(不覺)의 모습은 주관과 객관이 생겼지만 주객이 상대하지 않아 인식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아직 생각과 말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마음입니다. 즉, 앎이 생기기 이전의 마음이므로 이 마음은 불가지(不可知)인 제8 아리야식이라고 합니다. 알 수 없는 아리야식은 관조(觀照)하여 다섯 감각과 의식과 말나식을 관통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 불각 또한 근본무명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에 인과 연이 만나는 연기이므로 불이(不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즉부동(覺則不動)이요 동즉유고(動則有苦)'란 깨달으면 곧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곧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부동즉각(不動則覺)이요, 각즉무고(覺則無苦)입니다. 말하자면 움직임은 말과 생각에 의해서이므로 말과 생각을 떠나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깨어나게 된다는 수행의 기본원리인 법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의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동(不動)은 적멸이요 열반이며, 동(動)은 기념(起念)이요 무명(無明)입니다.
* 전변(轉變)-움직여 변화하는 양상
以有境界緣故 復生六種相 云何爲六 一者智相 依於境界 心起分別 愛與不愛故 二者相
이유경계연고 부생육종상 운하위육 일자지상 의어경계 심기분별 애여불애고 이자상
續相 依於智故 生其苦樂 覺心起念 相應不斷故 三者執取相 依於相續緣念境界 住持苦
속상 의어지고 생기고락 각심기념 상응부단고 삼자집취상 의어상속연념경계 주지고
樂心起著故 四者計名字相 依於妄執分別假名言相故 五者起業相 依於名字 尋名取著造
락심기착고 사자계명자상 의어망집분별가명언상고 오자기업상 의어명자 심명취착조
種種業故 六者業繫苦相 以依業受果 不自在故 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 以一切染法皆是
종종업고 육자업계고상 이의업수과 부자재고 당지무명능생일체염법 이일체염법개시
不覺相故
불각상고
[번역] 왜냐하면 경계의 반연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의 모습이 생긴다. 무엇을 여섯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지상(智相)으로 경계를 의지하여 마음이 일어나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으로 지상을 의지함으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내는 각심(覺心)으로
망념(妄念)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으로 상속하는 마음을 의지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해서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으로 허망한 집착을 의지하여 가명(假名)과 언설의 모습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으로 명자를 의지하여 이름을 찾아 취해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으로 업에 의지하여 과보를 받아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이 일체 오염된 법을 낼 수 있고, 일체 오염된 법은 다 불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지말불각(枝末不覺)의 여섯 가지 거친 마음의 양상인 육추(六 )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 거친 마음의 양상은 모두 아리야식의 경계상을 반연하여 생긴 것입니다. 제팔 아리야식의 미세한 세 가지 불각(不覺)의 마음이 알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여섯 가지 거친 불각의 마음은 대상경계를 분별하는 앎의 마음입니다. 경계상은 여섯 가지 거친 마음의 성격에 따라 내면의 대상으로도 밖의 대상으로도 나타납니다.
경계의 반연에 의하여 여섯 가지의 불각이 생긴 것은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곧 앎의 발생입니다. 이 앎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크게는 감각과 분별·추리·개념 등을 말하지만 자아(自我), 즐거움과 괴로움·갈등·질투·탐욕·성냄·어리석음·교만·의심·자기견해 등의 모든 정신작용도 앎의 다른 모습입니다. 말과 생각에 의해 건립된 이 세계와 역사의 흐름과 정치·문화·경제·예술·사상·철학 등도 모두 앎이 표출된 양상입니다. 이 앎의 특징은 반드시 괴로움을 동반하거나 그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에 있습니다.
첫째, 앎의 양상인 지상(智相)은 아리야식 경계의 모습을 분별하여 안으로 '나'와 '내 것'으로 삼습니다. 경계의 모습은 마음의 반영입니다. 영상이 거울의 표면을 여의지 않은 것처럼 영상이 경계라면 거울의 표면은 경계를 나타내는 현식(現識)입니다. 지(智)의 양상이란 바로 이 경계의 현식을 자아로 삼은 것입니다. 사랑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는 것도 바로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智相)을 제칠 말라식(第七末那識)인 자아의식이라도 합니다. 의식의 뒷면에 있기 때문에 잠자는 것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마음입니다.
둘째, 상속하는 양상인 상속상(相續相)이란 의식(意識)을 말합니다. 지상을 의지하여 안과 밖으로 경계의 현상을 반연하는데 의식에 의하여 색·성·향·미·촉이라는 밖의 대상으로 인식되며 안으로는 개념으로 인식됩니다. 대상인식은 종을 칠 때 먼저 울리는 소리처럼 대상에 접촉하여 거칠게 아는 첫 마음인 감각의 감수입니다. 상속하는 의식의 순간은 바로 대상과의 접촉하는 지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각심(覺心)에 의해 감수하고 추론하는 사유는 매 순간마다 생겨났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의식은 개별적인 실체가 없이 찰나적 순간들로 이루어진 연속성의 흐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속하게 하는 각심이 대상에 처음 접촉하게 되는 이유는 무지한 근본무명의 작용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또 이 지각하는 마음에 의하여 고락(苦樂)이 의식에 나타나며 망념이 일어나 의근(意根)과 의식이 상응하여 미세한 분별작용도 끊이지 않습니다.
셋째, 취하여 집착하는 양상인 집취상(執取相)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좋아하는 대상인 수순(隨順)과 거슬리는 대상인 상위(相違), 좋아하는 것도 거슬리는 것도 아닌 즉 순(順)도 위(違)도 아닌 구비(俱非)인 대상의 덤덤한 양상을 받아들여서 애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명자(名字)를 헤아리는 양상인 계명자상(計名字相)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대상에 대해 얻어진 감각적 소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구체화시키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대상의 개별적인 개념인 자상(自相)과 일반적인 개념인 공상(共相)을 세워서 갖가지 명칭을 붙여 집착하게 됩니다.
다섯째, 업을 일으키는 양상인 기업상(起業相)이란 어떤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여 한정시켜 조작하고 계속 유지하면서 선악(善惡)의 윤리가 작용하게 하는 구체적인 업을 일으킵니다. 여섯째, 업에 매어 괴로워하는 양상인 업계고상(業繫苦相)은 지은 업이 원인이 되어 받는 과보로서 육도(六道)에 윤회하는 괴로움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이는 무장무애(無障無碍)한 법(法)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업에 매이어 자유롭지 못한 과보(果報)를 받아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의 불각에 대해서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불각에는 무명의 본체인 근본불각과 무명의 양상인 지말불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근본불각이란 있는 그대로 진여(眞如)의 법이 하나임을 알지 못한 이유로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서 분별망상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말불각이란 근본불각에 의해서 세 가지 미세한 양상인 삼세(三細)와 여섯 가지 거친 마음의 양상인 육추(六 )가 전개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미세함 가운데 미세함인 무명업상과 미세함 가운데 거친 것인 능견상과 경계상이란 의식이 있고, 그리고 거친 것 가운데 미세한 것인 지상과 상속상, 거친 것 가운데 거친 것인 의식은 집취상과 계명자상·기업상·업계고상 등으로 전개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미혹한 세계로 전개되는
열 가지 중요한 순차(順次)로 보면
본각(本覺)으로부터 업상(業相)→전상(轉相)→현상(現相)→지상(智相)→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조업상(造業相)→업계고상(業繫苦相) 등으로 전개되어집니다.
이와 반대로 본각의 세계로 회귀하는 열 가지 역차(逆次)로 보면 각돈오(覺頓悟)하고서 포고발심(怖苦發心)하여
삼심개발(三心)인 진심(眞心)·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을 개발(開發)하여 육도(六度)를 수행하여 아공(我空)을
증득하고 법공(法空)을 증득하여 색자재(色自在)를 얻고 심자재(心自在)하여 이심(離心)하고 성불(成佛)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삼세육추(三細六 )인 지말불각(枝末不覺)은 근본무명에 의해 비롯된 것이므로
모두 불각의 양태입니다. 그러나 이 지말불각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지말불각은 자성(自性)이 없어 진여의 모습이라는 것이며,
둘째, 자신과 세계는 무명에 의해 주객이 상대하여 생긴 앎에 의해
채색된 것이므로 환상이며 꿈이며 허공과 같으므로 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셋째, 실체가 없어 허망한 것이므로 고정되어 있지 않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각(覺)과 불각(不覺)의 동이(同異)
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 云何爲二 一者同相 二者異相 言同相者 譬如種種瓦器 皆同微
부차각여불각유이종상 운하위이 일자동상 이자이상 언동상자 비여종종와기 개동미
塵性相 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 皆同眞如性相 是故脩多羅中 依於此眞如義故 說一切衆
진성상 여시무루무명종종업환 개동진여성상 이고수다라중 의어차진여의고 설일체중
生本來常住 入於涅槃 菩提之法 非可修相 非可作相 畢竟無得 亦無色相可見 而有見色
생본래상주 입어열반 보리지법 비가수상 비가작상 필경무득 역무색상가견 이유견색
相者 唯是隨染業幻所作 非是智色不空之性 以智相無可見故
상자 유시수엽업환소작 비시지색불공지성 이지상무가견고
[번역] 다시 다음에 각(覺)과 불각(不覺)이 두 가지 양태가 있는데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동상(同相)이요,
둘째는 이상(異相)이다.
동상(同相)이란
비유하면 갖가지 기와와 그릇이 모두 동일하게 가는 티끌의 성품인 모습과 같다.
이러한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갖가지 업의 환영이 모두 동일한 진여의 본성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경전 가운데 '이 진여의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중생이 본래 상주하여 열반에 든다는 것과
보리의 법도 닦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며 지을 만한 모습이 아니어서 마침내 얻을 것이 없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색상을 볼 수 없는데 색상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오직 오염을 따른 업의 환상인 짓는 것일 뿐이요,
지색(智色)은 불공(不空)한 성품이 아니므로 지상(智相)도 볼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해설] 앞에서 아리야식에 각(覺)과 불각(不覺)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각과 불각의 같고 다른 것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구분하는 이유는 고통의 해결을 위해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오류를 시정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각과 불각이 같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흔히 무명과 번뇌망상으로 가려진 불각은 우리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원인이자 괴로움 그 자체이므로 잘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과 불각은 같은 진여로 현실의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진여성품의 모습을 무명불각이라고 할뿐입니다. 무명과 번뇌망상을 소멸시키고 보면 소멸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각과 불각이 본질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진여(眞如)의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데서 번뇌를 끊으려는 잘못된 수행방법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곧 번뇌가 보리요 각과 불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끊고 없애고자 여러 작위적인 방법을 쓰는 예가 그것입니다. 혹간에는 벽에 원을 그려서 그 안에 번뇌를 던져 넣거나 용광로를 연상하면서 번뇌를 태워버리는 상념(想念)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번뇌망상이나 기억을 없애려는 시도는 일시적인 심리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정신이상도 혹 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없애려는 의도는 그 이면에 구하려는 마음을 동반합니다. 그런데 진여의 실상이란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수행자가 상념(想念)으로 영상화(映像化)하는 것은 우선 의도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고, 특히 인연의 법칙을 무시한 방법으로 반복 지속된다는 속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무명과 번뇌망상이란 인과 연이 만나서 생긴 것이며 인과 연은 동시성으로 시작과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아리야식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생(生)의 기억은 주객의 인과 연이 상대하여 끊임없이 경험되었던 것으로 지금 현재 대상을 인식하는 한 계속 쌓이기만 할 뿐, 그에 따라 반복될 수밖에 없는 소멸방식으로는 근원적인 치유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인연이란 불가피한 것이며 번뇌망상 또한 인연(因緣)이니, 인연을 잘라내고 없애려는 것은 진여인 연기실상을 부정하게 되어버립니다. 오로지 일어나는 많은 현상이 인연이고 공임을 관조하면 무명과 번뇌망상이 모두 여래의 장으로 바뀌며 관조하는 마음도 보리(菩提)로 깨어나므로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되고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그대로 보리로 전환되어집니다. 관조하여 아뢰야식에 이른다면 아뢰야식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업종자(業種子)가 일시에 진여실상의 법으로 전환되어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증득하게 됩니다.
아리야식이라면 근본무명이 진여실상으로 나타나면서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할 것입니다.
법이란 곧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열반(涅槃) 등의 한가지 모습이며 무상(無相)인 진여(眞如)입니다.
본래 진여이며 공이므로 지(地)·수(水)·화(火)·풍(風) 4대(大)의 몸을 없애어 공함을 깨닫는 것은 없앤다는 의도로 하기 때문에
마음이 만들어 낸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속지 말아야 하며 본래 공하여 불생불멸하기에 번뇌망상을 없애 불생불멸의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본래 공인 진여, 즉 각과 불각이 다르지 않다는 이치에 맞는 수행방법은 버리거나 취하지
않고 단지 관조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진여의 한 모습인 무명과 번뇌망상을 여실히 관조하면 저절로 사라지고
진여실상이 체득되고, 체득하고 보면 본래 얻을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각과 불각은 다르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각과 불각이 다르지 않기에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을 얻거나 닦아서 깨달음의 경지를 만든다는 것은 수행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진여의 법은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버려서 얻는다거나 소유를 버려서 무소유를 얻는다는 것은 조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이라도 마음이 조작한 것은 마음의 허상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매순간 생사를 초월해 늘 깨어있는 것이지만 만약 조작된 깨달음이라면 지속되지 않습니다. 구경의 깨달음이란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깨달음의 내용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입니다.
한편 '색의 모습'은 본래 경계상(境界相)인 마음입니다. 이것이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에 의해 색깔이나 형태가 나타나며 자아의식인 말나식에 의해 색의 모습이 의미가 달라집니다. 감각과 의식, 잠재의식인 말나식은 모두 무명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오염되어 있고 오염된 마음은 그것이 감각이든 의식이든 잠재의식이든 대상을 임의대로 조작하는 업력에 의존합니다. 그러기에 수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냥 형상으로 보여지고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빠져버립니다. 의도적으로 하는 잘못된 수행은 의도한 결과로서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르지 못한 깨달음을 얻어 자신이 부처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반면에 바른 수행을 하는 구도자에게는 바른 지혜인 정지(正智)와 바른 깨달음인 정각(正覺)의 경계가 나타나는데 최종에는 경계가 마음이므로 마음이 마음을 모르고 볼 수 없는 진여의 자리로 복귀합니다. 그리하여 주객이 허공과 같이 공적(空寂)하여 닦을 법과 닦는 행위와 닦는 자(者)가 따로 없기 때문에 깨달은 지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일심진여(一心眞如)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회광반조(回光返照)하거나 구원을 요청하면 그에 응하여 지혜는 법의 성(性)과 상(相)이 상주(常住)함을
관통하며 불·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지혜가 색(智色)을 띠는 공덕으로 나타나므로 공하지 않는 불공(不空)의 본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言異相者 如種種瓦器 各各不同 如是無漏無明 隨染幻差別 性染幻差別故
언이상자 여종종와기 가각부동 여시무루무명 수염환차별 성염환차별고
[번역] 이상(異相)이란 갖가지 와기(瓦器)가 각각 같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이 오염된 환영의 차별을 따른 것이며 오염된 환영의 차별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각(覺)과 불각(不覺)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고(苦)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苦)가 없고 불각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은 또한 기와와 그릇이 각각 다른 모습이듯이 각과 불각도 오염된 환영의 차별을 기준으로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오염에 환영이 붙은 차별은 변하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염이 없는 무루(無漏)는 본각과 시각으로 몸과 마음을 반조하여 사라지는 업(業)의 정도에 따라 깨달음의 경지가 나타납니다. 그에 반해서
무명은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으로 모든 차별이 본성이므로 행하는 업의 정도에 따라
근본불각을 의지하여 삼세육추(三細六추)의 지말불각이 나타나므로 모두 차별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입의분(立義分) 가운데 생멸하는 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삼세육추(三細六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생멸(生滅)의 인연(因緣)에 대해서 공부할 것입니다. ..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