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백영 정병욱, 우리의 동방일사(東方一士)
이강옥
정년퇴임을 하니 ‘일과 시간’이 한가한 게 참 좋았다. 한동안 오전 중에 용지봉에 올랐다.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하는 때가 있을 정도로 산은 고적했다. 자연의 소리에 묻히는 듯한데,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퇴임 전 대학에서 겪었던 일들과 거기 등장했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특히 온갖 서사를 만들게 된 제자들의 얼굴이 더 자주 떠올랐다. 그럴 때면 으레 나는 선생으로서 그들에게 도리를 다했던가, 자문하고 또 자문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어 나의 스승님들이 떠올랐다. 놀란 것은, 학부 시절 잠시 뵈었던 그때 그분들의 모습과 말씀과 행적이 그 뒤 내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내 사유와 행위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주어왔다는 사실이다. 그중 가장 위력적이면서도 은은하게 내 곁에 계셨던 분이 백영 정병욱 선생님이시다. 백영 선생님은 판소리와 한국고전시가 연구 분야의 대석학이셨다.
관악의 도서관 앞 광장에서 망연자실해 있던 학부 시절의 어느 날 나는 백영 정병욱 선생님으로부터 당신의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연구실을 지켜 달라는 부름을 받았다. 선배들이 부동자세로 대하던 그 근엄하신 분과 매일 좁은 방에서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내려다보는 광장의 모습은 어떠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삼 년 반 동안 ‘동방일사(東方一士)’와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현판이 마주 걸린 관악 연구실에서의 기식 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생님께서 말씀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더욱 그러신 것 같았다. 하루 종일 한 방에 앉아 있어도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때가 있었다. 나도 그렇게 어려운데 연구실을 찾아오시는 분들은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내심 걱정했다. 과연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문밖에서 머뭇거리는 것 같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도 방안의 침묵에 주눅이 들어 칸막이 앞에서 우물쭈물하기도 했다. 칸막이를 돌아간 분들은 인사말을 건네자마자 으레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데, 그럴 때면 선생님은 가끔 잔기침을 하시면서 듣고만 계셨다. 나는 방문객들이 침묵의 부담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서둘러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그 침묵과 과언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칸막이를 돌아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선생님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밝은 쪽을 향해서인지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서서히 선생님의 얼굴 모습이 선명해졌다. 선생님은 아침 햇살을 후광인 양 뒤로 하고 막 들어선 손님을 향해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계셨다. 그것은 얼굴의 순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관이었다. 비로소 나는 선생님의 침묵이 그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의 조건임을 알았다. 연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뵙는 순간 주눅 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화평해져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연희전문에 다닐 때, 부끄럼 많던 윤동주를 이 세상 시인으로 만들어준 힘도 선생님의 저런 따뜻한 표정에서 비롯했을 터라 아련히 헤아렸다.
만나서 말씀을 나눌 때의 과묵함은 헤어질 무렵 작별의 말씀을 나눌 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떠나는 사람에게, 떠남의 의미를 곱씹게 할 정도로 자상한 축원과 당부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번은 지방에서 무척 아끼시는 제자 한 분이 올라왔는데, 작별의 인사를 드리자 끼니를 거르지 않는 일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사들을 자상하게 걱정해 주신 뒤, 고속버스는 안심이 되지 않으니 꼭 열차를 타고 내려가라 당부하셨다. 마치 그 제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듯 선생님의 작별사는 끝날 줄 몰랐다.
떠날 때의 자상함은 선생님 스스로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1년 꼴레지 드 프랑스의 초빙교수로 가실 적 일이다. 선생님이 떠나신 뒤 나는 청소를 하려고 연구실의 구석구석을 뒤져 보고 책상 서랍도 열어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선생님의 흔적들은 이미 완벽하게 지워지거나 정돈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당신의 함자가 적혀 있거나 자필이 남아 있는 종이들을 모두 수거하여 큰 봉투에 단단히 넣어 두었거나 아예 없애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모든 집기들이나 잡동사니들도 가지런히 정돈해 두셨다. 그런 선생님의 태도가 그때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교수가 된 나는 1988년 봄 졸업반 학생들을 인솔하고 제주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가을에 열리는 올림픽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이 졸업여행을 봄에 가게 된 탓으로 이미 모든 배편과 비행기편이 매진되어 우리는 진도 청해진에서 오래되고 작은 배에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이미 폭풍주의보가 내렸음에도 배는 출항했다. 추자도를 지나자 거대한 파도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예감하며 떠나올 때를 생각했다. 그 순간 81년의 선생님이 떠올랐다. ‘아, 책상 서랍 속의 일기와 편지들을 정리하고 올 걸’하며 후회했다. 천행으로 살아 돌아온 나는 집이나 연구실을 나설 때마다 항상 다시 방안을 되돌아보며 그 모습이 나의 마지막 모습으로 부끄럽지 않을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나아가 어느 때고 찾아올 나의 마지막 모습으로부터 지금의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가장 소중한 삶의 자세이다.
나는 선생님의 품 안에 오랫동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매함 때문에 그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계승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부 2학년 때부터 석사과정까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학문하는 기본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자부한다. 지금도 ‘고전문학사’ 과목의 과제물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그 해 간행된 『한국고전시가론』(신구문화사) 을 ‘객관적으로 철저하게 비판해’ 오라는 과제를 주셨다. 막 전공 공부를 시작한 우리들은 당황했다. 우리가 어찌 한국시가 연구의 대가이시며 우리를 가르치시는 스승의 글을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대학 중앙 도서관은 물론 남산 시립도서관, 국립 중앙 도서관 등에까지 가서 선생님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 글의 얼개를 만들기는 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책의 저자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몰랐다. ‘객관적으로 철저하게’란 선생님의 말씀에 흥분하여 ‘필자’, ‘저자’ 보다는 ‘정교수는’, ‘정병욱은’이라 표현한 동기들이 더 많았으니 그 글들을 읽고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아직도 궁금하다. 제자들이 당신의 함자를 거명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비판하게 하신 선생님의 아량과 학문적 패기는 내가 교수가 된 뒤로 변함없이 지속한 내 학문의 자세가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가난한 제자의 생활에 대해 자상한 배려를 해 주셨다. 방학 때 몇 달 고향에 있다 올라올 때면 손자를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 주셨다. 그리고 그 학기의 생활을 걱정해 주셨다. 석사논문을 인쇄할 돈을 마련하려 애쓰고 있을 무렵에는 모 출판사 사장님께 나를 소개하시며 적지 않은 액수의 장학금을 주게 하셨다. ‘앞으로 많은 저서를 낼 사람이니 미리 필자로 확보해 놓으라’는 것이 그 추천의 말씀이셨다. 뒤에 알고 보니 비슷한 추천의 말씀 덕에 그 출판사의 장학금을 받은 선후배가 적지 않았다.
췌장암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신 선생님을 찾아 뵈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대수롭지 않은 병이라시며 오히려 나의 자취 생활의 어려움을 걱정해 주셨다. 그리고 병원에서 하룻동안 제공한 죽을 다 먹고 가라 강권하시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병상에서도 제자의 두꺼운 논문 원고를 정독하시고 자상한 지적을 해 주셨다. 석사논문 심사도 선생님의 댁에서 받았다.
그리고 곧 입대하게 되어 누워계신 선생님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는 논산 훈련소로 떠났다. 떠나면서 생각하니,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국문학연구> 60호로 번호가 매겨진 나의 석사논문은 간행되기 어려웠을 것이며, 내가 그동안 서울에서 살아남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나고 자대에 배치되면 그동안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편지로 올리고자 다짐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꿈을 꾸었다. 나는 아직도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잠시 나갔다 돌아오다 복도에서 검은 옷 입은 두 사나이를 만났다. 그들은 선생님 연구실의 책들을 안고 있었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왜 책을 가져가느냐고 나는 화를 내었다. 두 사나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달려가 보니 선생님의 방은 휑하니 비어졌고 창틀 위 ‘동방일사’ 현판만이 의연히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현판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그리고 깨어났다. 얼마 뒤 훈련소에 배달된 신문에서 선생님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연구실 꿈을 꾼 그날이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이었다.
훈련소에서 나는 선친과 선생님을 며칠 사이로 여의었다. 임종을 하지 못하고 장례식에 참석도 못한 불효와 배은망덕은 어찌할 것인가. 갚지 못한 백영 선생님의 큰 은혜를 나의 학문과 교육에 되살리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다. 오히려 선생님의 그 단아한 존안은 아직도 선명하고 그 행적의 찬란함은 내 학문의 길을 밝혀주고 계시니, 나는 여전히 당신의 은혜를 받고 있을 따름이다.
백영 선생님은 학문과 일상에 있어 엄격함과 자상함이라는 상반된 덕목을 오묘하게 조화시켜 우리 시대의 사표가 되셨다. ‘도리는 스스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어느덧 길이 만들어 지네’(桃李不言 下自成蹊)라 했듯 살아 계셨을 때는 물론 돌아가시고 세월이 흘러도 그 그늘 아래 뭇 문화인들이 모여 당신을 기린다. 그런데 가끔 나는 선생님에 대한 우리의 언어들이 얼마나 당신의 깊은 마음에 닿았는지 자신이 없어질 때가 있다. 제자로서의 언어가 진실되지 못하고 언어 자체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담는 데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창가에 서서 격동하는 도서관 앞 광장 쪽을 우두커니 내려다 보시곤 했던 선생님의 뒷모습이 왠지 외롭게만 느껴졌던 기억을 아직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선생님을 기리고 칭송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 언어가 당신의 진심을 정직하게 담지 못했다면, 선생님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피하다가 도연명을 만나서야 비로소 거문고 한 곡조를 탄 ‘동방일사’이실 것이다. 그리고 동방일사가 되신 선생님의 그 모습이 어느덧 나의 모습과 겹쳐지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참고] 이익(李瀷)의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자는 이름도 성도 없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도연명(陶淵明)의 팔운시(八韻詩)에 근거하여 그런 사람이 있었는 줄 안다. 대개 유송(劉宋, 420~479년)ㆍ의희(義熙, 405~418년) 연간에 동방에 은거한 자이다.
이때 도연명은 팽택 영(彭澤令)을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그에 대한 풍문을 듣고 기뻐하여 서둘러 찾아갔다. 푸른 소나무는 길을 끼고 자라고 흰 구름은 처마 끝에 머물러 있었으니, 머나먼 땅이었다. 옷은 해져서 온전하지 않았고, 한 달에 아홉 번 식사를 하며[삼순구식] 10년에 한 번 관(冠)을 썼다. 생활이 이렇게 고달파도 항상 낯빛이 좋고 즐겁게 지내느라 가난도 잊었다.
그는 도연명이 찾아온 뜻을 알고 거문고를 가져와 연주하였는데, 별학(別鶴)과 고란(孤鸞)의 곡조[이별한 학과 외로운 난새라는 뜻으로 모두 악부(樂府) 금곡(琴曲)의 이름이다. 서로 헤어진 부부의 각별한 정을 노래함]를 타니, 애달파하고 원망하는 내용이었다.
도연명이 마침내 그와 막역한 친구가 되고자 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뒷사람들이 어찌 그들의 깊고 얕음을 알 수 있겠는가.
대저 선비가 천하에 태어나 불행한 때를 만나 사람을 피하고 세상을 피하여 조수(鳥獸)들과 함께 무리지어 살다가 묻혀서 알려지지 않은 자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느낌이 있어 기록에 남긴다.
첫댓글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도 잔잔하게, 눈에 그릴 수 있듯이 스승님을 소개하시네요. 두분 사이에 흐르는 정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석사 논문 인쇄를 앞두고 "앞으로 여러 저서를 낼 사람이니 미리 필자를 확보해 두라"라는 추천은 제자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시겠지요. 그리고 그 제자도 그렇게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