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 소관, 깊이 뼈에 새기겠습니다. 신헌은 그후 쌀이나 생활용품들을 보냈으나 최대감은 받지 않았다. 신헌은 지나치게 청념결백한 나머지 곤궁한 처지가 된 최대감의 입장을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최대감을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고을에서 장래성 있는 수재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십사 간곡히 청하였다. 최대감은 보람된 일이고 소일하기에도 좋다고 여겨 문하생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최대감이 살아갈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었다. 그런데 지난밤 최대감은 꿈을 꾸었다. 한 신령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계시를 내렸다.
“그대는 내일 봉황재 쪽으로 가면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낼 우국동량을 맞으리라. 그 젊은이에게 봉황의 알을 품어 깨우는 역할을 하라. 그것은 그대의 학문과 청빈사상을 가르쳐주는 것이니라.”
비록 꿈이었지만 깨어나서도 너무나 생생하고 신기하여 이튿날 길을 나섰다. 더운 날씨에 무리하게 걷다가 고갯마루 삿갓바위 쪽에 이르러 정신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세. 그곳에서 막역지우의 아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틀림없이 자네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네. 그러니 일생을 거울처럼 청빈하고 맑게 살아야 하네. 최영 장군처럼 말일세. 나라 일을 맡은 사람이 사리사욕, 재물에 눈이 어두우면 반드시 부정 부패, 온갖 폐단이 생긴다네. 그러면 그 피해는 여러 사람에게 파급되고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맹수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고, 학은 반드시 앉을 자리를 골라서 앉는 법이네.”
황희: 어르신께서 이르신 말씀, 하늘에 두고 맹세하옵니다. 만약 저에게 나라를 위해 크게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겠습니다. 백성이 죽을 먹으면 저는 살겨를 먹겠습니다.
최대감: 정말 장하다. 참으로 장하네. 최대감의 생활은 청빈 그 자체였다. 애써 꾸민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몸에 밴 생활이었다. 황희는 최대감 문하의 수재들과 함께 한동안 공부를 하였다. 최대감이 대학자이기에 황희의 학문은 일취월장, 더욱 원숙해졌다. 수재들 가운데서도 황희는 단연 으뜸이었다. 최대감의 청빈 사상과 학문을 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그렇게 지낸 지도 세월이 꽤 흘러, 황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사제지간이 된 최대감은 황희의 아버지에게 서찰을 써서 주면서 전하라고 했다. 황희는 정중히 예를 올리고 나서 여쭈었다.
황희: 선생님! 제게 가르치신 학문과 청빈사상, 평생을 두고 실천하겠습니다. 하온대 한 가지 소청이 있아옵니다.
최대감: 어서 말하게.
황희: 제가 봉황재 삿갓바위 부근에 보니 웬 비석이 그리도 많은지요. 송덕비들이 대부분입니다. 청빈한 목민관은 송덕비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苛斂誅求(가렴주구: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를 일삼는 탄관오리들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아첨배들이 백성들의 피기름을 짜서 송덕비를 강제로 세우니 폐단이 크옵니다. 신돈의 경우도 중의 신분으로 그런 엄청난 송덕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 또는 구만 리 장천으로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는 곳입니다. 그곳에 무거운 석물을 세워 지기를 누르면 흉사가 그치지 않고 그로 인하여 비명 횡사를 당하는 예가 많습니다. 선생님께서 관찰사에게 일러 그것들을 제거하라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대감: 그래, 그 말을 들으니 과연 그렇군. 내 그렇게 하지. 부디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하네. 황희는 스승에게 작별을 고한 후 그 동안 동문 수학한 정든 벗들과도 아쉬운 정을 나누고 그곳을 떠났다. 벌써 해가 바뀌어 다시 맞이하는 가을이 되었다. 북으로 울며 나는 기러기를 보면서 자꾸만 걷기 시작했다. 황희는 오랜 나그네 길에서 부모님을 뵈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노자 한 푼 없이 여러 날을 걸었다. 어느날 지름길을 찾아서 외딴 산길에 접어들었다. 점심도 굶었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석양 무렵이었다. 뱃속에서는 꼬르륵하며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산중이라 주위에는 인가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산길 옆에 생긴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는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에는 하얀 소복을 한 여인이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있었다. 황희는 너무나 시장하여 그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인은 스물두셋 남짓해 보이는, 드물게 아름다운 용모였다. 절을 마친 여인은 음식을 차려놓은 채 잠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황희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말을 건넸다. “저 죄송합니다만 지나가는 과객인데 너무나 시장합니다. 외딴 곳이라서 따로 음식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음식 중에 남는 것을 제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비록 행색은 초라했으나 준수한 용모와 뛰어난 풍채, 정중한 말씨 등으로 단번에 귀인임을 알아챘다.
소복한 여인: 시장하시면 마음껏 드시지요. 저에게는 이 음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황희: 고맙습니다. 그러면 염치 불구하고 먹겠습니다. 황희는 오랜만에 정갈하고 맛깔스런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소복한 여인은 황희의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단번에 반하게 되었다.
소복한 여인: 선비님, 여기 약주도 있사옵니다. 버리기에 아까우니 음식과 곁들여 드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황희: 아, 참으로 감사합니다. 황희는 혼자 자작으로 술을 몇 잔 마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여인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갑자기 품에서 접었다 폈다 하도록 만들어진 부채를 꺼내더니 무덤 주위를 돌면서 부채질을 하며 자꾸만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벌써 추석이 지나서 부채가 필요할 만큼 덥지 않은 때라 황희는 으아스럽게 생각하며 여인의 행동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궁금하여 그 까닭을 여인에게 물었다.
황희: 부인, 왜 무덤에다가 부채질을 하는지, 그 까닭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여인: 네, 숨길 것도 없사옵니다. 저는 열여섯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몸이 약하여 자주 앓았습니다. 그래서 이곳 산골 암자에서 요양차 저와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다행히 가세가 넉넉하기에 며칠마다 하인들이 생활 필수품이나 음식을 가져다 주었지요. 그런데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홀몸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은 아직 나이가 젊으니 내 무덤에 풀이 마를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그때 다른 곳에 시집가라’고. 저는 몸이 약한 남편 때문에 독수공방에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무덤을 찾은 후 다른 곳으로 가서 재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무덤에 부채질을 한 것은 어서 흙이 빨리 마르라고 그랬던 것입니다.
황희: 부인은 아주 솔직한 성격인가 봅니다. 오늘 정말 잘 먹었습니다. 너무나 고맙습니다.
여인: 아니옵니다. 오히려 말벗을 해주신 선비님께 제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선비님께서는 오늘밤 어디서 유숙할 것인가요?
황희: 저는 세상 풍경을 겪고자 집을 나선 몸입니다. 아무 데서나 닥치는 대로 자는 편입니다.
여인: 하오면 우선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저와 동행하시면 숙소를 마련해 주고 떠날 때까지 음식을 제공하겠습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여인은 그릇을 챙겨 함지에 담았다. 황희도 그 뒤를 따랐다.
여인: 저는 이곳에 2-3일 더 머무르다가 마을로 내려가고자 하던 터에 선비님을 만났습니다. 음식은 넉넉하옵니다. 술과 안주도 있으니 양껏 드십시오. 소복한 여인은 자신이 기거하는 암자에 이르러 황희를 안으로 모셔들인 후 다시 간단한 술상을 차려왔다. 볼수록 드물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이 술을 따라 황희에게 권하였다. 거절할 수가 없어 몇 잔을 받아마신 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여인: 선비님! 이 밤에 어디로 가시려구요?
황희: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한방에서 지낼 수가 있겠소. 그래서......
여인: 정히 그러시다면 먼 길에 지치고 피곤하실 텐데 이 방에서 그냥 쉬십시오. 제가 옆방으로 건너가겠습니다. 여인은 자리를 대충 치우고 잠자리까지 보아주고 나서 수줍음의 미소를 생긋 짓더니 그 방을 나갔다. 황희는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자리에 눕자마자 그대로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황희는 피끓는 나이다. 그 동안 지우도사에게서 여색의 유혹을 이겨내는 법을 익혔던 것이다. 또한 지난날 설낭자에게 지나치게 냉정히 대했다가 자살한 일도 있었기에 조용히 타이르며 거절하고자 하였다. 여인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부끄러운지 무릎에 고개를 묻고 흐느껴 운다. 황희는 부인이 한없이 측은하게 느껴져 다정하게 부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황희: 부인,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겠소. 나도 상처한 사람이기에 이해할 수가 있소. 그러나 일시적인 춘정 때문에 윤리 도덕을 저버려서야 되겠소. 그것은 지키기 어렵지만 지킬수록 값진 것이라오. 아직은 남편의 상중이 아니오. 탈상하거든 부디 좋은 사람 만나서 아들 딸을 낳아 잘 살기 바라오.
여인: 선비님, 고맙습니다. 이 몸의 허물을 탓하지 않고 위로해 주시니.......
드디어 날이 밝고, 과수댁이 일찍 일어나 차려주는 아침 상을 대하고 황희는 맛있게 식사를 했다.
황희: 부인 덕택에 하룻밤 잘 보냈고 허기도 면했습니다. 부디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여인: 저는 선비님처럼 인품이 고결하고 너그러운 분은 처음 뵙습니다. 어느 곳에 사시는 뉘시온지, 언제 다시 뵈올 날이 있을런지요?
황희: 인연이 있으면 만나겠지요. 황희는 한없이 아쉬워하는 여인과 작별하고 그곳을 천천히 떠났다.
다음에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