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강에서 우리 나라의 정악과 아악을 바루는 문제와 여악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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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공자(孔子) 때에도 오히려 옛것에 가까왔고, 주례(周禮)가 또 노(魯)나라에 있었지만 그때에는 예악이 잔폐하여 공자가 바룬 다음에야 악(樂)이 바루어졌습니다. 우리 나라 예악을 보면 본디 근본이 없는데 이제는 점점 경박스럽고 더럽게 되어갑니다. 가항(街巷)의 악은 모두 정성(正聲)이 아니고 정(鄭)·위(衛)의 악(樂)018) 과 같사오니, 비록 갑자기 모두 고쳐 복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예관(禮官)은 모름지기 유의해야 합니다."
하고, 특진관 이장곤(李長坤)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악은 고의(古意)를 조술(祖述)한다고는 하지만 순수한 정악(正樂)이 아닙니다. 신이 장악원(掌樂院)의 일을 보는데, 【당시 장곤이 장악원 제조였다.】 전조 말 신우(辛禑) 때의 악이 급촉하고 비속하였는데 아조(我朝) 태조·태종에 이르러서도 미처 개정하지 못하였다가, 세종조에 이르러 박연(朴堧)이 악률(樂律)에 정하였으며 장공(匠工) 장영실(蔣榮實)도 제작하는 것이 극히 정교하였습니다. 세종도 제도를 증감하여 의물(儀物)이 비로소 이때에 마련되었습니다. 종률(鐘律) 같은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는데,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불악(佛樂) 또한 많았고, 성종(成宗)조(朝)에는 성현(成俔)이 악률에 아주 정하여 악보(樂譜)가 약간 이루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뒤에는 증수(增修)하는 자가 없어 날이 오랠수록 점점 잘못되었으니 제사에 쓰는 악 또한 어찌 순수한 정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좌방(左坊)의 악은 이와 같고 우방(右坊)은 향악(鄕樂)으로 정·위의 악과 같고, 그 사이 남녀가 서로 즐기는 악은 반정(反正)한 다음에야 모두 산거(刪去)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갑자기 옛날의 정악(正樂)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국악(國樂)이 상국에서 전해졌다지만 종(鐘)·석경(石磬)의 청탁이 착란하였고, 그 악기의 파손된 것은 주관하는 자가 고쳤으나 더욱 잘못되어 신과 정자지(鄭子芝)가 더욱 교정하였지만 어찌 모두 적의하다 하겠습니까?"
하고, 이청(李淸)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악은 음성이 심히 어그러져 세쇄한 말절(末節)도 오히려 바루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그 기본을 일으키겠습니까? 듣건대 옛적에 중국에 악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하니 이제 사신이 상국에 갈 때 반드시 질정관(質正官)을 보내어 중국의 예악 문물을 토구(討究)하도록 하소서. 중국이 비록 판탕(板蕩)했다 한다지만 유풍(流風) 여운(餘韻)이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영민한 자를 가려 뽑아 고증해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자지가 어찌 음률을 안다고 하겠으며, 율려습독(律呂習讀)을 세우는 것은 확실히 아름다운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과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장곤은 아뢰기를,
"만약 종률(鐘律)을 만든다면 미(米)의 대소와 관(管)의 분촌(分寸)은 정자지와는 만들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그러진 것을 바루고자 불악(佛樂)이나 외설한 소리는 이미 고치도록 하였지만 여악(女樂)이 있기 때문에 악이 바루어지지 않는다. 이 여악 또한 고치려 하지만 내연(內宴)에서 대신 쓸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
하매, 이청이 아뢰기를,
"아악(雅樂)을 바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여악을 없애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악을 없애는 일을 장악원에서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내연에서는 장차 무슨 악으로 대치해야겠느냐?"
하매, 장곤이 아뢰기를,
"신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내전(內殿)에서 자친을 받드는 데에는 확실히 악을 폐할 수 없으니 무엇으로 대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점이 아니라면 곧 없애버려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내전에서는 악을 폐할 수 없지만 여악이어야 자친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옛날 궁중에서 썼던 악을 널리 고찰한 것을 가지고 처리하라."
하였다.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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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공자(孔子) 때에도 오히려 옛것에 가까왔고, 주례(周禮)가 또 노(魯)나라에 있었지만 그때에는 예악이 잔폐하여 공자가 바룬 다음에야 악(樂)이 바루어졌습니다. 우리 나라 예악을 보면 본디 근본이 없는데 이제는 점점 경박스럽고 더럽게 되어갑니다. 가항(街巷)의 악은 모두 정성(正聲)이 아니고 정(鄭)·위(衛)의 악(樂)018) 과 같사오니, 비록 갑자기 모두 고쳐 복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예관(禮官)은 모름지기 유의해야 합니다."
하고, 특진관 이장곤(李長坤)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악은 고의(古意)를 조술(祖述)한다고는 하지만 순수한 정악(正樂)이 아닙니다. 신이 장악원(掌樂院)의 일을 보는데, 【당시 장곤이 장악원 제조였다.】 전조 말 신우(辛禑) 때의 악이 급촉하고 비속하였는데 아조(我朝) 태조·태종에 이르러서도 미처 개정하지 못하였다가, 세종조에 이르러 박연(朴堧)이 악률(樂律)에 정하였으며 장공(匠工) 장영실(蔣榮實)도 제작하는 것이 극히 정교하였습니다. 세종도 제도를 증감하여 의물(儀物)이 비로소 이때에 마련되었습니다. 종률(鐘律) 같은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는데,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불악(佛樂) 또한 많았고, 성종(成宗)조(朝)에는 성현(成俔)이 악률에 아주 정하여 악보(樂譜)가 약간 이루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뒤에는 증수(增修)하는 자가 없어 날이 오랠수록 점점 잘못되었으니 제사에 쓰는 악 또한 어찌 순수한 정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좌방(左坊)의 악은 이와 같고 우방(右坊)은 향악(鄕樂)으로 정·위의 악과 같고, 그 사이 남녀가 서로 즐기는 악은 반정(反正)한 다음에야 모두 산거(刪去)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갑자기 옛날의 정악(正樂)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국악(國樂)이 상국에서 전해졌다지만 종(鐘)·석경(石磬)의 청탁이 착란하였고, 그 악기의 파손된 것은 주관하는 자가 고쳤으나 더욱 잘못되어 신과 정자지(鄭子芝)가 더욱 교정하였지만 어찌 모두 적의하다 하겠습니까?"
하고, 이청(李淸)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악은 음성이 심히 어그러져 세쇄한 말절(末節)도 오히려 바루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그 기본을 일으키겠습니까? 듣건대 옛적에 중국에 악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하니 이제 사신이 상국에 갈 때 반드시 질정관(質正官)을 보내어 중국의 예악 문물을 토구(討究)하도록 하소서. 중국이 비록 판탕(板蕩)했다 한다지만 유풍(流風) 여운(餘韻)이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영민한 자를 가려 뽑아 고증해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자지가 어찌 음률을 안다고 하겠으며, 율려습독(律呂習讀)을 세우는 것은 확실히 아름다운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과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장곤은 아뢰기를,
"만약 종률(鐘律)을 만든다면 미(米)의 대소와 관(管)의 분촌(分寸)은 정자지와는 만들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그러진 것을 바루고자 불악(佛樂)이나 외설한 소리는 이미 고치도록 하였지만 여악(女樂)이 있기 때문에 악이 바루어지지 않는다. 이 여악 또한 고치려 하지만 내연(內宴)에서 대신 쓸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
하매, 이청이 아뢰기를,
"아악(雅樂)을 바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여악을 없애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악을 없애는 일을 장악원에서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내연에서는 장차 무슨 악으로 대치해야겠느냐?"
하매, 장곤이 아뢰기를,
"신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내전(內殿)에서 자친을 받드는 데에는 확실히 악을 폐할 수 없으니 무엇으로 대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점이 아니라면 곧 없애버려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내전에서는 악을 폐할 수 없지만 여악이어야 자친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옛날 궁중에서 썼던 악을 널리 고찰한 것을 가지고 처리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