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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제10권釋摩訶衍論 卷第十
용수 지음
벌제마다 한역
이인혜 번역
龍樹菩薩造 姚秦三藏筏提摩多奉 詔譯
여기까지 해서 삼매의 공덕을 찬탄하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여섯 번째) 양쪽 수레바퀴 같은
두 가지 수행을 동시에 갖추느냐 빼먹느냐에 따른
이익과 손실을 밝히는 문[兩輪具闕益損門]을 설하겠다.
【論】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방적으로 지(止)만을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나태한 마음을 내기도 하며
여러 가지 선(善) 닦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대비(大悲)와 멀리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관(觀)을 닦아야 한다.
관을 닦는 이는, 세간의 모든 유위법이란 오래 머물 수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고 무너지며 마음의 모든 작용도
염념에 생멸하기 때문에 고(苦)가 된다는 사실을 관해야 한다. 또한 과거에 염했던 모든 법은 꿈과도 같이 확실치 않음을 관해야 하며, 현재 염하는 모든 법은 번갯불과 같음을 관해야 하며, 미래에 염할 모든 법은 뜬구름과 같이 홀연이 일어나는 것인 줄을 관해야 한다. 또한 세간의 몸을 갖는 모든 존재는 다 청정하지 못하고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으므로 하나도 좋아할 만한 것이 없음을 관해야 한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모든 중생이 무시이래로 무명에 훈습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었다. 과거에도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무량한 핍박에 직면하고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끝이 없구나.
고통을 버리기도 어렵고 고통에서 떠나기도 어려운 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란 이렇게 매우 불쌍한 존재로다.’이렇게 사유하고 나서는 즉시 용맹심을 내서 큰 서원을 세운다.
“나의 마음이 분별을 떠나게 하여 시방세계를 빠짐없이 다니면서 모든 선한 공덕을 닦겠다.
그리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고뇌에 시달리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이 제일의(第一義)가 되는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
이러한 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갖가지 선을 닦고
배우기를 포기하지 않고 마음에 게으름이 없도록 한다. 단, 앉아서 지(止)에 전념할 때는 제외하고,
그밖에 다른 경우는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제나 관찰해야 한다.
거닐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 모두 지와 관을 동시에 닦아야 한다.
어떻게 닦는다는 말인가? 제법을 연하기는 하지만 자성이 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그에 따른 고락 등의 과보가
유실되거나 무너지는 일이 없음을 염한다.
비록 인연화합으로 선악의 업을 지어 고락의 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염한다 해도,
또한 염하는 성품[念性]은 얻지 못한다.
지(止)를 닦는 자는 세간에 머물고 집착하는 범부의 허물을 대치하고,
겁먹고 나약한 이승의 견해를 버린다.
관(觀)을 닦는 자는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좁고 하열한 이승심의 허물을 대치하고,
선근을 닦지 않는 범부의 허물을 멀리 떠난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지와 관 두 가지 문은 서로 도와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만일 지와 관을 동시에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길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釋】 윗글은 여섯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관을 결여한 채 지만 닦는 데서 오는 과실을 보여주는 문[示闕觀止輪失門],
둘째는 관륜 수행을 밝히는 문 [顯示修行觀輪門],
셋째는 중생계를 연하여 서원을 세우는 문 [緣衆生界立願門],
넷째는 지와 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는 문[兩輪俱轉不離門],
다섯째는 지와 관 두 가지 문을 통해 대치되는 것을 밝히는 문[顯示兩輪所治門],
여섯째는 결론적으로 두 가지 문을 동시에 행함을 밝히는 문[摠結兩輪俱轉門], 이상 여섯 가지다.
첫 번째 문에서는 네 가지 과실을 설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침제에 빠지는 과실로서, 일방적으로 지(止)만을 닦으면
수행자의 마음이 마지 마건가시(嚤鍵訶尸) 암실에 들어간 것처럼
어둡고 엉성해서 각료하지 못함을 말한다.
본론에서는 이를,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방적으로 지(止)만을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아서’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열심히 정진하지 않는 과실로서,
지만을 닦으면 수행자의 마음이 마치 아나비제인(阿那毘提人)럼
게을러져서 정진할 수 없다는 듯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나태한 마음을 내기도 하며’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선을 등지는 과실로서, 지만을 닦으면 수행자의 마음이
한 군데로 집중되므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지
못해서 파다가미시인(婆多訶彌尸人)처럼 된다는 뜻이다.
이를 본론에서는,‘여러 가지 선(善)을 닦기를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대비를 버리는 과실로서, 지만을 닦으면 수행자의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서
근(根)이 무너진 사람에게 더 이상 의욕이 나지 않는 경우처럼 대자비심을 일으킬 수 없다는 뜻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대비(大悲)와 멀리 떨어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을 닦는 자에게
지와 관을 동시에 행하기를 권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관을 결여한 채 지만 닦는 데서 오는 과실을 보여 주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관륜 수행을 밝히는 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세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괴로움의 모습[苦相]을 관하는 문이고,
둘째는 무상(無常)을 관하는 문이고,
셋째는 부정(不淨)을 관하는 문이다. 이상 세 가지다.
첫 번째 괴로움의 모습을 관하는 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무너지는 데서 오는 괴로움[壞苦]이고,
둘째는 흘러가는 데서 오는 괴로움[行苦]이다.
괴고(壞苦)란 무엇인가?
유위(有爲)에 속하는 모든 청정법은 청정하지 않은 모든 법을 파괴하고,
청정하지 않은 모든 법은 청정한 모든 법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또한 두 가지 세간이 서로가 서로를 파괴한다는 뜻도 있다.
무엇이 두 가지 세간인가?
하나는 구족일체세간(具足一切世間)이고,
또 하나는 망상유위세간(妄想有爲世間)이다.
이 두 가지 세간법이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괴고를 설한 것이다.
이 관을 닦으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
하나의 자(自)가 하나의 깊은 법을 성취한다.
이를 본론에서는,‘관을 닦는 이는, 세간의 모든 유위법이란
오래 머물 수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고 무너지며’라고 하였다.
행고(行苦)란 무엇인가?
모든 심행(心行)이 생각생각 이어지는 가운데 끊임없이 전변(轉變)하면서 금방 생겼다
금방 멸했다하여 여기에서 저기로 갈 수 없음을 말한다.
행고에 대해서는
『구사론(俱舍論)』의 게송에 그 뜻이 잘 나타나 있다.
터럭 하나가 손바닥에 있을 때는아픔을 깨닫지 못하다가
눈 속에 들어가면매우 불편함을 느끼듯 이어리석은 자는 터럭이
손바닥에 있는 사람처럼 행고를 느끼지 못하는데
지혜로운 자는 눈 속에 터럭이 들어간 사람처럼지극히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네.(通玄 卷4, 卍續藏經 73, 264상)
이를 본론에서는, ‘마음의 모든 작용도 염념에 생멸하기 때문에
고(苦)가 된다는 사실을 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은 괴로움의 모습을 관하는 문에 대한 설명이었다.
다음으로 무상(無常)을 관하는 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세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이미 지나간 것이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다.
지나가 버린 제법은 전에는 있었다가 뒤에는 없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꿀 때는 있었다가 깬 다음에는 없는 것처럼,
이를 본론에서는, ‘또한 과거에 염했던 모든 법은 꿈과도 같이 확실치 않음을 관해야 하며’라고 하였다.
둘째는 현재 있는 것이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다.
현재의 제법은 전에는 없었다가 지금은 있다.
마치 번갯불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번쩍이는 순간 멸하는 것처럼,
이를 본론에서는,‘현재 염하는 모든 법은 번갯불과 같음을 관해야 하며’라고 하였다.
셋째는 앞으로 있을 것이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다.
미래의 제법은 자성도 없는 것이 홀연히 다가온다.마치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뜬구름이 어느 새 일어나 시방(十方)에 퍼지듯이,
이를 본론에서는, ‘미래에 염할 모든 법은 뜬구름과 같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인 줄을 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 무상을 관하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은 부정(不淨)을 관하는 문이다.
부정을 관하는 문은 갖가지 몸을 보면서 더럽다고 통찰하여 탐착을
멀리 떠난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또한 세간의 몸을 갖는 모든 존재는 다 청정하지 못하고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 되었으므로 하나도 좋아할 만한 것이 없음을 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관륜 수행을 밝히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중생계를 연하여 서원을 세우는 문을 설하겠다.
이 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중생계를 연하여 사유를 일으키는 문이고,
둘째는 서원을 세워 빠짐없이 베푸는 문이다. 이것이 두 가지다.
중생계를 연하여 사유를 일으키는 문이란 어떤 것인가?
삼계에 있는 무량무변한 중생들을 연하여 다음과 같이 염하는 것이다.
“이들은 무시이래로 근본무명에 덮이고 가리어 자신의 본각인 청정한
부처를 버리고 등져 근원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으며 무명장을 벗어나기에는 더 더욱 멀다.
내가 만일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그들을 거두어주지 않는다면 자꾸자꾸 멀리 가서
겁수(劫數)만 더할 뿐, 끝내 정각을 얻을 기약이 없을 것이다.”그리고는 한량없는 대비김을 일으킨다.
이를 본론에서는,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염해야 한다.
≺모든 중생이 무시이래로 무명에 훈습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었다. 과거에도 몸과 마음에 걸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무량한 핍박에 직면하고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끝이 없구나. 고통을 버리기도 어렵고 고통에서 떠나기도 어려운 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란 이렇게 매우 불쌍한 존재로다≻’라고 하였다.
서원을 세워 빠짐없이 베푸는 문이란 어떤 것인가?
위와 같이 사유하고 나서는 큰 서원을 세워 시방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지혜의 빛을 일으켜 시방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갖가지 심상(心相)을
통달하여 시방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번뇌와 업장의 바다를 대치하고
시방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행인(行因)의 바다를 다 채워 시방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과덕(果德)을 증득하되 남김없이 완전하게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렇게 사유하고 나서는 즉시 용맹심을 내서 큰 서원을 세운다.
≺나의 마음이 분별을 떠나게 하여 시방세계를 빠짐없이 다니면서 모든 선한 공덕을 닦겠다.
그리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고뇌에 시달리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이
제일의(第一義)가 되는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중생계를 연하여 서원을 세우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지와 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는 문[兩輪俱轉不離門]을 설하겠다.
이렇게 원을 세우고 난 뒤에 즉시 행인(行因)의 바다를 닦는다는 뜻에서 이 문을 시설한다.
만일 바다 같은 원을 세워놓기만 하고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과를 장엄하고 원만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를 수레바퀴처럼 갖추어서 치우치지 않도록 때야 한다.
지와 관을 수레의 두 바퀴처럼 닦아야 한다는 내용을 분명히 밝힌 경은 어느 경인가?
『문수사리발기십만일천종심심광대원만나라니개문문대각존익대중해계경
(文殊師利發起十萬一千種甚深廣大圓滿陀羅尼開問問大覺尊益大衆海契經)』이다.
그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두고
지와 관을 동시에 닦아서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편이라고 합니까?
저를 비롯해 바다같이 한량없고 끝없는 대중들은 모두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무명의 바다에 들어가 통달하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세존께서는 마땅히 미혹한 자식 같은 저희들 모두를 위해 분명히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잘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내 그대를 위해 풀어서 설명해 주겠다.
그리고는 세존께서 즉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한쪽 날개를 잃은 새처럼 한쪽 바퀴로 가는 수레처럼
한쪽 발로 걸어가는 사람처럼 한쪽 눈으로 달리는 말처럼
높이 멀리 날 수도 없고 원하는 대로 실어 나를 수도 없고
길을 이리저리 다닐 수도 없고
나쁜 길[惡趣]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네.
한쪽만 갖춘 수행자도 한쪽이 빠진 수행자도
그런 줄을 알아야 하니 이것은 실로
법성이라는 허공 가운데 여량지(如量智)를 타고 높이 날아서
법장(法藏)의 바다로 들어가 의리(義理)의 보배를 실어 나를 수 없으며
진여의 평등한 길[道] 가운데 빠짐없이 두루 다니며
모든 마와 외도가 내는 사견의 깊은 구덩이 가운데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다네. 그러므로 모든 행자는
두 바퀴를 동시에 굴려서 끝끝내 분리되지 않게 할지니
만일 이 두 바퀴를 동시에 갖추지 않는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끝내무상(無上)의 대각지(大覺地)를 통달할 수 없으리.’”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했는가?
삼매를 닦을 때는 고요하고 안정된[寂靜]
경계를 통달하고 지혜를 닦을 때는 흩어지고 움직이는[散動]
경계를 통달하여, 고요한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항상 움직임을 놓지 않으며
산란한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항상 고요함을 놓지 않아서 서로 떨어지지
않은 채 동시에 행하도록 한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였다.
한편 삼매를 닦아 공무(空無)한 경계를 통달하고 지혜를 닦아 있음
[在有]의 경계를 통달하여,
공에 있을 때는 유에 집작하지 않고
유에 있을 때는 무에 물들지 않는다.
유와 무 가운데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것들을 동시에 비추어 떨어지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행한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였다.
또 한편 삼매를 닦아서 평등한 이치[理]를 통달하고
지혜를 닦아서 차별된 사상[事]을 통달하여,
이(理)와 사(事) 중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그것들을 동시에 통달하여
떨어지지 않은 채 동시에 행한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였다. 또 한편은 지(止)란 관(觀)을 상대로 해야 비로소
건립되는 것이지 자기만의 독립적인 성품을 갖는 지는 없다.
관(觀)도 지(止)를 상대로 해야 비로소 건립되는 것이지 자기만의 독립적인 성품을
갖는 관이란 없다. 지라는 것도 없고 관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증하였다.
또 한편 지가 다름 아닌 관이고 관이 다름 아닌 지여서
지와 관이 차별 없는 하나의 체(體)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인용하였다.
이상과 같은 순서대고 자세히 사유하고 가려 보아야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러한 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갖가지 선을 닦고 배우기를 포기하지 않고 마음에
게으름이 없도록 한다. 단, 앉아서 지(止)에 전념할 때는 제외하고,
그밖에 다른 경우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제나 관찰해야 한다.
거닐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 모두 지와 관을 동시에 닦아야 한다.
어떻게 닦는다는 말인가?
제법을 염하기는 하지만 자성이 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그에 따른 고락 등의 과보가 유실되거나 무너지는
일이 없음을 염한다. 비록 인연화합으로 선악의 업을 지어 고락의 보(報)를
받는다는 사실을 염한다 해도, 성품[念性]은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지와 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는 문[兩輪俱轉不離]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지와 관 두 문을 통해 대치되는 것을 밝히는 문[顯示兩輪所治門]을 설하겠다.
지륜(止輪)을 닦는 행자는 어떤 과실을 대치해야 하는가?
유(有)에 집착하는 범부중생의 과실과 공(空)을 즐기는
이승중생의 허물을 대치하여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떠난다.
본론에서는 이를, ‘지(止)를 닦는 자는 세간에 머물고
집착하는 범부의 허물을 대치하고, 겁먹고 나약한
이승의 견해를 버린다’고 하였다.
관륜(觀輪)을 닦는 행자는 어떤 과실을 대치해야 하는가?
대비심과 거리가 멀어서 중생의 갖가지 고통을 구제하지 않으려는
하열한 이승중생의 과실과 항상 태만하고 게을러 정진하지 못하고
선품을 닦지 않으며 악을 즐기는 범부중생의 과실을 대치하여이 두 가지를 동시에 벗어난다.
이를 본론에서는, ‘관(觀)을 닦는 자는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좁고 하열한 이승심의 허물을 대치하고,
선근을 닦지 않는 범부의 허물을 멀러 떠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지와 관 두 문을 통해 대치되는 것을 밝히는 문[顯示兩輪所治門]을 설하였고,
다음은 결론적으로 두 가지 문을 동시에 행함을 밝히는 문[摠結兩輪俱轉門]을 설하겠다.
즉, 위에서 설한 한쪽을 결여한 수행자가 범하는 과실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다는 뜻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지와 관 두 가지 문이 서로 도와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만일 지와 관을 동시에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길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양쪽 수레바퀴 같은 두 가지 수행을 동시에 갖추느냐 빼먹느냐에 따른
이익과 손길을 밝히는 문[兩輪具闕益損門]을 설하였다.
다음으로(일곱 번째) 열등한 무리들에게 수승한 곳으로 망상하여
물러남이 없기를 권하는 문[勸劣向勝不退門]을 설하겠다.
【論】 그런데 중생 가운데 이 법을 처음으로 공부하는 자는 바른 믿음을 구하려 해도 마음이 나약하고 겁이 많다. 이들은 이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모든 부처님을 항상 만나서 몸소 공양을 받들지 못할까 스스로 두려워하며, 신심이란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두려워해서 의욕이 감퇴한다. 이런 이는 여래께 수승한 방편이 있어 자신들의 신심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염불한 인연에 의해 원하는 대로
타방불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뵙고 악도를 영원히 떠난다.
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어떤 이가 서방극자세계에 계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오로지 염하고 닦은 선근을
회향해서 저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즉시 왕생하여 항상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 만일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하고 항상 부지런히 닦는다면 결국에 가서는 왕생하여 바른 삼매[正定]에 머물게 된다.”
【釋】 윗글은 일곱 문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수행하는 이를 가설하여 닦아서 향상해 나감을 밝히는 문[顯示趣向假人門],
둘째는 배움의 귀의처가 되는 교법을 밝히는 문[歸依所學敎法門],
셋째는 몸담고 있는 처소를 혐오하여 신심이 퇴보함을 밝히는 문[厭惡處所退信門],
넷째는 여래의 방편이 훌륭함을 밝히는 문 [如來方便殊勝門],
다섯째는 도와주시는 힘을 입어 수승하고 묘한 곳을 얻음을 밝히는 문[承力得勝妙處門],
여섯째는 훌륭한 처소를 얻어 정이 퇴보하지 않음을 밝히는 문[得善處定不退門],
일곱째는 경을 인용하여 자신이 설한 내용을 증명하는 문[引經證自所說門], 이상 일곱 가지 다.
수행하는 이를 가설하여 닦아서 향상해 나감을 밝히는 문이란,
십신위(十信位)에 이르기 전 네 가지 마음[四種心]을 갖는 자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하품(下品) 중생임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그런데 중생 가운데’라고 하였다. 배움의 귀의처가 되는 교법을 밝히는 문은,
저 십신위에 있는 하품중생이 매우 깊고 끝이 없는 대승법에 귀의하여
처음 배우고 닦는다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이것(대승법)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께서 스승으로 삼는 바로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변화에도
움직이지 않고 생주이멸하는 사상(四相)에도 변화하지 않는 자연히 상주하는 십지(十地) 이전과
십지 위에 흐르는 큰 길이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 법을 처음으로 공부하는 자는’이라고 하였다.
몸담고 있는 처소를 혐오하여 신심이 퇴보함을 밝히는 문은,
저 십신위에 있는 하품중생이 비록 깊은 법문을 몸소 들었긴 하나
마음의 뿌리가 지극히 하열하기 때문에 두 가지 큰일에 대해 공포를 느껴
전진하지 못하고 물러나려 한다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 큰일인가?
첫째는 국토이고,
둘째는 수승한 인연이다.
국토란 이 사바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장소가 열악하고 거칠며 중생이 혼탁하고 잡스럽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서
부지런히 수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째서 그런가? 저들의 마음속에 거스르는 경계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현선하여 마음에 밀고 들어와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승한 인연이란 어떤 것인가?
이 사바세계는 환경도 중생도 모두 혼탁하고 잡스럽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기가 지극히 어렵고 무량한 보살이 감응하여 달려 올 시절인연도 지극히 멀기만 하다. 부처님과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는 일은 더럽거나 깨끗한 물건을 거울에 비추었을 때와 같이, 유정의 마음이 청정하나 부정하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로, 저 수행하는 이가 수승한 인연을 만나지 못해 지극히 두려움에 떨기 때문에 물러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바른 믿음을 구하려 해도 마음이 나약하고 겁이 많다.
이들은 이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모든 부처님을 항상 만나서 몸소 공양을 받들지 못할까 스스로 두려워하며,
신심이란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두려워해서 의욕이 감퇴한다’고 하였다.
여래의 방편이 훌륭함을 밝히는 문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지극히 깊고 묘한 대방편이 여래에게 있기 때문에
저 수행자의 신심을 잘 보호해서 점점 향상하도록 해준다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어떤 것을 수승하고 묘한 방편이라 하는가?
오로지 여래만을 염하는 방편을 말한다. 어떻게 오로지 염[專念]한다는 말인가?
마음[意]을 쏟아 부어서 타방정토에 있는 갖가지 환경과 중생을 기억하고 염하되,
그 생각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기 때문에 훌륭한 방편이라고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런 이는 여래께 수승한 방편이 있어 자신들의 신심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마음을 한곳에 모아 염불한 인연에 의해’라고 하였다. 도와주심을 입어 훌륭하고 묘한 처소를 얻음을 밝히는 문은, 모든 여래의 불가사의한 방편력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즉시 묘하고 즐거운 국토에 가서 난다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원하는 대로 타방불토에 태어나’라고 하였다.
훌륭한 처소를 얻어 정이 퇴보하지 않음을 밝히는 문이란 어떤 내용인가?
저 타방분토에 왕생한 뒤에는 상호(相好)를 구족하신 여래의 모습을 눈으로 뵙고,
깊고도 묘한 법을 설하시는 성인의 음성을 귀희 들어서 악도라는 이름[惡名]을 영원히 떠난다.
정(定)에서 나와서도 움직임이 없으므로 마음 바다는 맑고 깨끗하며 신체는 밝고 희다.
과보로 받은 그곳의 환경[依報]은 오묘하고, 과보로 받은 그곳의 중생[正報]은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항상 부처님을 뵙고 악도를 영원히 떠난다’라고 하였다.
경을 인용하여 자신이 설한내용을 증명하는 문은, 설한 내용이 전체적으로 경의 말씀과 들어맞기 때문에
자신이 해석한 경문을찬탄하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인용한 경문은 내용이 명백하게 드러나므로 중복해서
풀이하지 않겠다. 이를 본론에서는, ‘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가 서방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오로지 염하고 닦은선근을회향해서 저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즉시 왕생하여 항상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 만일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하고 항상 부지런히 닦는다면 결국에 가서는
왕생하여 바른 삼매[正定]에 머물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까지 해서 수행신심분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수행을 통해 얻는 이익을 보여줌으로써 닦기를 장려하는 단원[勸修利益分]을 설하겠다.
【論】 이러한 마하연의 법이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런 창고[秘藏]임을
내가 이미 총괄해서 설명하였다. 만일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에 대해 바른 믿음을 내서
비방을 멀리 떠나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하는 중생이 있다면, 이 논을 수지하여 사유하고 닦아야 한다.
그러면 결국에는 위없는 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이 법을 듣고 나서 나약한 마음이나 겁먹는 마음을
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런 이는 반드시 부처될 종자를 이어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어김없이 수기(授記)를
받을 것이다. 가령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해서 그들에게 십선(十善)을 닦게 한 자가 있다고 치자.
그래도 이들은 밥 한술 뜰 사이만큼 이 법을 바르게 사유한 사람보다 못하다. 뒷사람의 공덕을 앞 사람의 공덕과 비교할 때,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하루, 혹은 하룻밤만이라도 이 논을 수지해서 관찰하고 수행한다면, 그렇게 해서 얻어진 공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가령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 각각 무량무변한 아승기겁 동안 그 공덕을
찬탄한다 해도 다 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법성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법을 수지하고 닦은 사람의 공덕도 마찬가지로 한계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 논을 비방하고 훼손하면서 믿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 죄로 얻는 대가는 무량겁을 지나도록 큰 고통과 시달림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면 이 법을 우러러 믿기만 해야지 비방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을 심각하게 해칠 뿐 아니라 남에게도 때를 끼침으로써
삼보의모든종자를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여래가 다 이 법에 의지하여 열반을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을 바탕으로 수행해서 부처의 지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지하여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였으며,
현재의 보살도 지금 이 법에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성취하고 있으며,
미래의 보살도 이 법에 의지하여 청정한 신심을 성취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중생이라면 응당 이 법을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
【釋】 윗글은 여덕 문으로 나된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앞에서 설한 내용을 들어서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문[擧前所說摠結門],
둘째는 이익을 제시해서 수행하는 이에게 닦도록 권하는 문[擧益勸人令修門],
셋째는 의심을 떠나 믿음을 내는 데서 공덕을 밝히는 문[顯離疑信功德門],
넷째는 다른 공덕과 비교해서 더 낫다는 것을 보여 주는 문[比類爲對示勝門],
다섯째는 수지하는 공덕을 들어서 찬양하는 문[擧受持功讚揚門],
여섯째는 비방하는 죄과를 들어서 두려운 마음을 내게 하는 문[擧誹謗過令怖門],
일곱째는 수승함을 널리 설하여 비방을 떠나게 하는 문[殊勝廣說離謗門],
여덟째는 전체적으로 결론지으면서 사람들에게 수행하기를 권하는 문[摠結修行勸人門], 이상 여덟 가지다.
앞에서 설한 내용을 들어서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문이란,
총(摠)이라는 하나의 글자로 여덟 가지 마하연법을 전체적으로 결론 내린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것을 제시함으로써 지말적인 것까지 포함했으므로 나머지 법은 결론에서 생략했다는 뜻이다. 이를 본론예서는, ‘이러한 마하연의 법이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런 창고[秘藏]임을 내가 이미 총괄해서 설명하였다’고 하였다.
이익을 제시해서 수행자는 이에게 닦도록 권하는 문은,
바다 같은 행인(行因)을 모아서 법신의 과(果)를 장엄하려면, 이 논을 받아 지니고 그 이지를 사유해서 끊임없이 항상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만일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에 대해
바른 믿음을 내서 비방을 멀리 떠나 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하는 중생이 있다면,
이 논을 수지하여 사유하고 닦아야 한다. 그러면 결국에는 위없는 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심을 떠나 믿음을 내는 데서 얻는 공덕을 밝히는 문은 무슨 뜻인가?
어떤 중생이 매우 깊고 지극히 묘한 이 마하연의 광대한 법문을 듣고 나서도 마음에 의심이나 두려움이나
나약함이 없고, 법문을 경시하거나 비방하지도 않고,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마음[決定心]과
확고한 마음[堅固心],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과 아끼고 믿는 마음을 낸다면. 그런 이는 법(法)의 종사를 끊지
않고 승(僧) 의 종자를 끊지 않고 부처[佛]될 종자를 끊지 않는다. 삼보의 종자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여 미래가
다할 때까지 점점 자라나게 하며, 모든 부처님에게서 직접 수기를 받고 무량한 모든 보살이 보호하고 생각해 준다. 이런 뜻에서 이 문을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만일 이 법을 듣고 나서 나약한 마음이나 겁먹는 마음을 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런 이는 반드시 부처될 종자를 이어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어김없이 수기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공덕과 비교해서 더 낫다는 것을 보여 주는 문이란 어떤 내용인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남김없이 잘 거두고 교차하여 십선(十善)을 닦게 한 사람이 있고, 한편 밥 한술 뜨는 사이에 이 깊은 법에 대해 관찰하고 사유한 중생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 두 사람의 공덕을 비교해 보자.
첫 번째 사람이 얻는 공덕은 겨자씨를 백 쪽으로 쪼갰을 때 백분의 일만큼이나 지극히 미소한 반면,
두 번째 사람이 얻는 공덕은 시방세계를 쪼갰을 때 티끌 수만큼이나 지극히 광대하다.
이를 본론에서는 ‘가령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해서 그들에게 십선(十善)을 닦게 한 자가 있다고
치자. 그래도 이들은 밥 한술 뜰 사이만큼 이 법을 바르게 사유한 사람보다 못하다.
뒷사람의 공덕을 앞 사람의 공덕과 비교할 때 ,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라고 하였다.
수지하는 공덕을 들어서 찬양하는 문은 어떤 내용인가?
이 논을 수지하여 그 이치를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하루를 하든 하룻밤을 하든 그 사이에 얻는 공덕이 한량없고 끝없어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가령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시방삼세의 모든 보살들이 시방세계의 티끌만큼이나 많은 혀를 가지고 각각 다 시방세계의 티끌만큼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그 사람이 얻은 공덕을 찬양한다 해도 다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법신진여의 공덕은 허공계와 같아서 한계나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범부와 이승이 그 공덕을 다 찬탄할 수 있겠는가. 하루나 하룻밤도 못 되는 사이에 수지한 사람이
얻는 공덕도 불가사의한데 하물며 이틀 사흘 나흘, 나아가 백 일 동안 수지독송하고 사유관찰한 공덕은
불가사의한 가운데서도 가장 불가사의하며 불가설한 가운데서도 가장 불가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하루,
혹은 하룻밤만이라도 이 논을 수지애서 관찰하고 수행한다면,
그렇게 해서 얻어진 공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가령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이 각각 무량무변한
아승기겁 동안 그 공덕을 찬탄한다 해도 다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법성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법을 수지하고 닦은 사람의 공덕도 마찬가지로 한계와 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비방하는 죄과를 들어서 두려운 마음을 내게 하는 문은,
이 논의 가르침에 대해서 불신하는 마음을 내서 파괴하고 비방하면서 행하지 않는 중생이 있다면,
이런 이는 죄의 대가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겁을 지나도록 고통 중에서 가장 무겁고 큰 고통을
받는다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반면 이 논을 비방하고 훼손하면서 믿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 죄로 얻는 댓가는 무량겁을 지나도록 큰 고통과 시달림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이라면 이 법을 우러러 믿기만 해야지 비방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구절은, 위에서 결택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결론 맺으면서 행자에게 수행하기를 권하는 내용이다. 이 아래로는 비방해서는 안 되는 이유[因緣]를 대면서 중대한 과실임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법을 믿지 못하고 비방하면 자신의 선근(善根)을 잃을 뿐 아니라 남의 공덕까지도 훼손함으로써 삼보의 모든 종자를 끊어 계속 이어지게 할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왜냐하면 자신을 심각하게 해칠 뿐 아니라 남에게도 해를 끼침으로써
삼보의 모든 종자를 끊어버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수승함을 널리 설하여 비방을 떠나게 하는 문은 어떤 내용인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 다 마하연으로 자신의 근본을 삼아 정각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시방삼세의 모든 보살이 모두 다 마하연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아 인(因)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이 깊고 깊은 마하연의 법에 대해 불신하고 쟁론을 일으켜 비방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를 두고모든 부처를 끊고 모든 보살을 끊고 자기 여래장의 본각불을 끊는 중생이라고 하겠다.
이를 본론에서는,
‘모든 여래가 다 이 법에 의지하여 열반을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을 바탕으로 수행
해서 부처의 지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지하여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였으며,
현재의 보살도 지금 이 법에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성취하고 있으며,
미래의 보살도 이 법에 의지하여 청정한 신심을 성취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이라면 응당 이 법을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고 한 구절은
전체적으로 결론지으면서 사람들에게 수행하기를 권하는 문이니, 자세히 사유하고 가려보아야 한다.
이제까지 권수이익문(勸修利益門)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회향하여 빠짐없이 베푸는 문[迴向遍布門]을 설하겠다.
【論】 여러 부처님께서 설하신 매우 깊고 크고 넓은 이치를 내 지금 힘닿는 대로 총지(摠持)를 설하였으니
이 공덕을 법성과 동일하게 회항하여 일체 중생계를 널리 이롭게 하리라.
【釋】 이 하나의 게송은 세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세 가지 문인가?
첫째는 앞에서 설한 내용을 다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결론 짓는 문[攝前所說摠結門]이고,
둘째는 공덕을 더욱 펼쳐서 넓히는 문 [展舒功德令廣門]이며,
셋째는 중생에게 베풀어 널리 이익을 주는 문 [施於衆生普利門]이다.
이것이 위 게송의 세 가지 내용이다.
첫 번째 문은 두 가지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앞서 설한 내용을 통괄적으로 정리하는 문[通摠攝前所說門]이고,
둘째는 능설의 자상을 밝히는 문 [顯示能說字相門]이다.
이상의 차례에 따라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여러 부처님께서 설하신 매우 깊고 넓은 이치’란 구절은
앞서 설한 내용을 통괄적으로 정리하는 문에 해당한다.
즉, 이 구절이 서른세 가지 본수(本數)의 법을 통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게송에서 ‘제불’이라고 한 것은 불이(不二)의 마하연법을 뜻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 不二의 법은 저 부처를 그대로 본따[形] 덕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대본화엄계경(大本花嚴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원만원만한 성품바다는 제불의 수승함을 얻었기 때문이며
일체 부처님은 원만원만한 성품바다의 열등함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만원만한 바다[圓圓海]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역시 『환원관』에서 두 가지로 풀이하였다.
첫째는 앞의 원(圓)자를 인분(因分)으로, 뒤의 원자를 과분(果分)으로 보는 것이다.
즉, 행인(行因)을 원만히 갖춘데서 나오는 과덕(果德)의 원만함을 뜻한다.
둘째는 현지우현(玄之又玄)에서처럼
원지우원(圓之又圓)의 강조용법으로 풀이할 수 있다.(通玄 卷4, 卍續藏經 73, 267하)
그렇다면 『분류화엄계경(分流花嚴契經)』에서는어째서 다음과 같이 설하는가?
“노사나불(盧舍那佛)은 세 가지 세간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삼았다.
일체법은 삼종 세간에 남김없이 포섭되니, 저 노사나불의 신심(身心)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란 없다.”
노사나불은 삼종 세간을 포섭하지만 포섭하는 것도 있고 포섭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대본화엄경』을 인용한 데에는 오류가 없다.
‘매우 깊다’고 한 것은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여덟 가지 마하연의 법을 뜻한다.
무슨 뜻으로 매우 깊다고 하는가?
이중구조를 갖는 마하연의 능입문(能入門)이 지극히 깊은 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로 매우 깊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니, 자세히 사유해서 가려 보아야 한다.
‘넓고 큰 이치’란 이중구조 입문의 근본이 되는 법을 뜻한다.
무슨 뜻으로 넓고 크다고 하는가?
이중구조를 갖는 능입문의 법 모두가 각각 자기 법[自法]을 넓히고 자기 법을 크게 하여
자기 법이 된다는 뜻에서 그런 명칭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넓고 크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이제까지 앞에서 설한 내용을 총괄적으로 거두어들이는 문을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능설(能說)의 자상(字相)을 밝히는 문을 설하겠다.
‘내 지금 힘닿는 대로 총지(摠持)를 설하였으니’라고 한 구절이 바로
이 문에 해당한다. 즉, 총(摠)이라는 글자 하나가 갖가지 모든 설을
통괄적으로 지닌다[持]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입의분(立義分)에서 ‘마하연(摩訶衍)이란 총(摠)이니’라고 한 구절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한 글자가 모든 설을 통괄적으로 지니는가?
『마하연론』이 여의론(如意論)의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밝히기위함이다.
이제까지 앞에서 설한 내용을 다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공덕을 더욱 펼쳐서 넓히는 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자신이 지은 공덕을 세 곳에 회향(廻向)한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무엇이 세 곳인가?
첫째는 진여,
둘째는 일심법,
셋째는 본각불성,
이상이 세 가지 회향처다.
무슨 이유로 세 곳에 회향하는가?
자신이 지은 공덕을 평등하게 하기 위해 진여에 회향하면,
자신이 지은 공덕을 광대하게 하기 위해 일심에 회향하며,
자신이 지은 공덕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본각에 회향한다.
응당 이렇게 알아야 하고 이렇게 관해야 한다.
이렇게 회향하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많은 이익이 있다. 무슨 뜻인가?
마치 하나의 티끌을 대지에 두었을 때 놓인 티끌과
저 대지가 차별 없이 동등하듯이, 회향법문도 그러하다.
또한 마치 한줄기 물을 큰 바다에 두었을 때 흘러들어가는
물과 저 큰 바다가 차별 없이 동등하듯이, 회향법문도 그러하다.
또한 하나의 작은 물건을 파괴하면
즉시 대허공과 차별 없이 동등해지듯이, 회향법문도 그러하다.
이제까지 공덕을 더욱 펼쳐서 넓히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중생에게 베풀어 널리 이익을 주는 문을 설하겠다.
‘일체 중생계를 널리 이롭게 하리라’라는 구절이 바로 이 문에 해당한다.
이 문은 광대하고 원만한 공덕을 들어서
중생계를 빠짐없이 이익되게 한다는 뜻에서 시설한 것이다.
환희심을 낸 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권하노니
바다같이 무량한 불자들 가운데
내 이미 모두(毛頭)와 삼각(三角)을 초월하고
생사의 네 가지 근[四根]을 극복하여
첫 번째 무수겁을 채운 뒤
두 번째 아승기겁에 비로소 무(無)에 들어갔네.
그대들 불자들은 마땅히 왼쪽과 오른쪽 두 손으로
거울같이 밝은 이 석론(釋論)을 잡고서
칠식(七識)으로 산란하게 사려하는 얼굴에 갖다 대
육진경계(六塵境界)의 때[垢]를 보고
법집과 인아(人我)의 허물을 씻어내야 하네.
그대들 불자들이 이렇게 한다면
법신ㆍ응신ㆍ화신의 세 부처님께서
이(伊)자를 펴서 원(圓)이 현전하듯
상락아정의 네 가지 덕이
통달한 지위에 들었을 때처럼 모두 나오리라.
내가 사천왕의 자재처에서 나와
밑으로 큰 바다의 용궁에 들어가
힘닿는 대로 갖가지 경전의 바다를 엿보니
다해서 백 낙차(洛叉)만큼이 있었네.
이러한 갖가지 경에서 설하는 진실한 법은
한량없고 끝없는 차별된 이치를 담고 있는데
마하연론에서는 이 이치를 건립하면서[立義]
총괄하고 정리하여 빠짐없이 설했다네.
자신의 손으로 이 논을 받드는
선남자 선여인이 있다면
백 낙차의 경을 받드는 자라고 부를 만하며
자신의 입으로 본론을 두루 송하면
백 낙차의 경을 송하는 자라고 이름하리라.
이러한 사람이 얻는 공덕은 시방세계의 티끌만큼이나 많은
모든 부처님과 대 보살의 무리가 각각 티끌 수만큼의 설상(舌相)을 내서
티끌 수만큼의 겁 동안 쉬지 않고 칭찬해도 다하지 못하리.
하물며 그 이치를 관찰하고 글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사유하는 것이랴?
이 논을 불신하고 비방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있다면
이런 이가 얻는 죄업은 시방세계의 티끌만큼이나 많은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의 무리가 각각 티끌 수만큼의 설상을 내서
티끌 수만큼의 겁 동안 쉬지 않고 허물을 말해도 다하지 못하리.
이런 사람의 지난 죄업은 멸할 것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네.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원(本原)에 돌아가려면
이 논을 의지해서 수행해야 하네.
불신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되며
깊고 깊은 대승법을 비방해서도 안 되며
이 논이 말할 수 없이 중중무진한 국토에 두루두루
멀리 퍼지도록 권하기를 기원해야 하네.
已說讚歎三昧功德門,次說兩輪具闕益損門。
本曰:‘ 復次,若人唯修於止,則心沈沒,或起懈怠,不樂衆善,遠離大悲,是故修觀。
修習觀者,當觀一切世閒有爲之法,無得久停,須臾變壞,一切心行,念念生滅,以是故苦。
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
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浮雲,忽爾而起。
應觀世閒一切有身,悉皆不淨,種種穢污,無一可樂,如是當念。
一切衆生從無始世來,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已受一切身心大苦。現在卽有無量逼迫
未來所苦亦無分齊,難捨難離,而不覺知。衆生如是,甚爲可愍,作此思惟:卽應勇猛,立大誓願,
願令我心,離分別故,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盡其未來,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衆生,令得涅盤第一義樂。
以起如是願故,於一切時,於一切處,所有衆善,隨己堪能,不捨修學,心無懈怠,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若行若住,若臥若起,皆應止觀俱行。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善惡之業、苦樂等報,不失不壞,雖念因緣善惡業報,而亦卽念性不可得。
若修止者,對治凡夫住著世閒,能捨二乘怯弱之見。
若修觀者,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遠離凡夫不修善根。
以此義故,是止觀二門共相助成,不相捨離。
若止觀不具,則無能入菩提之道。
’ 論曰:就此文中,卽有六門,云何爲六?
一者示問觀止輪失門,
二者顯示修行觀輪門,
三者緣衆生界立願門,
四者兩輪俱轉不離門,
五者顯示兩輪所治門,
六者摠結兩輪俱轉門。是名爲六#就第一門中,
卽有四過失。云何爲四?
一者沈淪過失,其心昧略,不能覺了,如入嚤鍵訶尸闇室中故。如本‘復次,若人唯修於止,則心沈沒’故。
二者不勤過失,其心懈怠,不能精進,如阿那毘提人故。如本‘或起懈怠’故。
三者背善過失,其心專一,不能分別應作不應作,如婆多訶彌尸人故。如本‘不樂衆善’故。
四者離悲過失,其心安寂,不能發起大慈悲心,如壞根人,所自欲中,更不增故。如本‘遠離大悲’故。
是故修觀者,卽是勸俱轉。已說示闕觀止輪失門,次說顯示修行觀輪門。就此門中,卽有三門。
云何爲三?
一者苦相觀門,
二者無常觀門,
三者不淨觀門。是名爲三。
就初苦相觀門中,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壞苦,
二者行苦。言壞苦者,
一切有爲之淸淨法,能壞一切不淸淨法,亦一切諸不淸淨法,能壞一切淸淨法故。
復次二種世閒互相破壞故。云何爲二?
一者具足一切世閒,
二者妄想有爲世閒。如是二種世間之法相破壞故。
是故說言壞苦而已。若修此觀,當得何利?所謂成就一自作一甚深法故。如本‘修習觀者,
當觀一切世閒有爲之法,無得久停,須臾變壞’故,言行苦者,一切心行於念念中,
常恒遷轉,速生速滅,不能從此處,至於彼處故。
如本‘一切心行念念生滅,以是故苦’故,已說苦相觀門,次說無常觀門。
就此門中,卽有三種。
云何爲三?
一者已過無常,過去諸法前有後無,譬如彼夢熟眠時,有已,
乃覺悟時,無有故。如本‘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故。
二者今有無常,現在諸法古無今有,譬如電光,卽時便滅,不能夂停故。如本‘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故。
三者當有無常,未來諸法無有自性,而忽然至,譬如浮雲不知有所,而忽然起,遍十方故。
如本‘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浮雲,忽爾而起’故。已說無常觀門,
次說不淨觀門,言不淨觀者,緣種種身,作不淨解,遠離貪故。
如本‘應觀世間一切有身,皆悉不淨。種種穢污,無一可樂’故。
已說顯示修行觀輪門,次說緣衆生界立願門。
就此門中,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緣衆生界思惟門,
二者建立誓願遍布門。是名爲二。
言緣衆生界思惟門者,所謂緣三界中無量無邊一切衆生,
作如是念:從無始來,根本無明所覆藏故,
棄背自本覺淸淨佛,歸原無日,出無明藏,更復時遠,我若不發悲心,不攝取者,又之又之,唯過劫數,
取正覺期,實無其齊發起無邊大悲心故如本如是當念一切衆生從無始世來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
已受一切身心大苦,現在卽有無量逼迫,未來所苦亦無分齊,難捨難離,而不覺知。衆生如是甚爲可愍’故,
言建立誓願遍布門者,所謂作如是思惟已訖,則立大誓願,
起十方世界之微塵數光明般若,
達十方世界之微塵數種種心相,
對治十方世界之微塵數一切諸煩惱業障海,
圓滿十方世界之微塵數行因海,
證得十方世界之微塵數果德,皆悉令無餘故。
如本‘作此思惟:卽應勇猛立大誓願,願令我心,離分別故,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盡其未來,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衆生,令得涅盤第一義樂’故,
已說緣衆生界立願門,次說兩輪俱轉不離門。
所謂起如是願已訖,卽直修習行因之海故。
若起願海,不勤修行,不能莊嚴圓滿果故#若爲修行當如何耶?謂具兩輪,令無偏故,具兩輪相,何契經中,
分明顯示?謂文殊師利發起十萬一千種甚深廣大圓滿陁羅尼,開問問大覺尊,益大衆海契經。
彼契經中,如何說耶?所謂彼契經中,
作如是說:爾時,文殊師利卽白佛言:世尊,云何名爲止觀俱行不相離門?
我及一切無量無邊大衆之海,皆悉入於不知不覺無明之海,
不能通達,不能出離,如宜世尊,爲欲我等諸迷士女,分明顯示。
爾時,世尊卽告文殊師利言:諦聽諦聽,善思念之。我當爲汝分別解說。
於是世尊卽說伽陁言:譬如闕翼鳥 及一輪之車 一足人同分闕眼嶮之馬。
無有高遠翔 隨所應運載其道路遊行不墮惡趣坑。
若具足一輪闕一輪行者 亦復如是知 以其實無有。
法性虛空中 乘如量智翔 入於法藏海運載義理寶。
眞如平道中 周遍通遊行一切魔外道 邪見深坈中。
不倒墮坑故是故諸行者 兩輪具足轉 終不可捨離。
若有修行者 不具此兩輪 終不能通達無上大覺地。
今此經文爲明何義?謂爲顯示修習三昧,達寂靜境,修習智慧,
照散動境,在寂靜中,常不捨動,在散亂中,常不捨寂,而不相捨離,俱行俱轉故。
復次,爲欲顯示修習三昧,達空無境,修習智慧,照在有境,
在空不著有,在有不染無,有無雙照,無有偏邊,而不相捨離,俱行俱轉故。
復次,爲欲顯示修習三昧,達平等理#修習智慧,照差別事,理事雙達,無有偏邊,而不相捨離,俱行俱轉故。
復次,爲欲顯示止當待觀,方得建立,非自性止,觀當待止,方得建立,非自性觀,亦無有止,亦無觀故。
復次,爲欲顯示止,則是觀觀,則是止止,觀一體無差別故,如其次第,應審思擇。如本‘以起如是願故,
於一切時,於一切處,所有衆善,隨己堪能,不捨修學,心無懈怠,唯除坐時,專念於止。若餘一切,
悉當觀察應作不應作,若行若住,若臥若起,皆應止觀俱行。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善惡之業、苦樂等報,不失不壞。雖念因緣善惡業報,而亦卽念性不可得故。
已說兩輪俱轉不離門,次說顯示兩輪所治門。若有行者,修習止輪,當爲對治何過失耶?
謂爲對治凡夫衆生著有過失,二乘衆生樂空過失,俱絕離故。如本‘若修止者,對治凡夫住著世閒,
能捨二乘怯弱之見’故。若有行者,修習觀輪,當爲對治何過失耶?謂爲對治二乘衆生遠離大悲,
不救衆苦#下劣過失,凡夫衆生常恒懈怠,不能精進,不修善品,樂惡過失#俱出離故。如本‘若修觀者,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遠離凡夫不修善根’故。
已說顯示兩輪所治門,次說摠結兩輪俱轉門。所謂摠結如上所說,輪闕行者大過失故。
如本‘以此義故,是止觀門共相助成,不相捨離,若止觀不具,則無能入菩提之道’故。
已說兩輪具闕益損門,次說勸劣向勝不退門。
本曰:‘ 復次,衆生初學是法,欲求正信,其心怯弱,以住於此娑婆世界,自畏不能常値諸佛,
親承供養,懼謂信心難可成就,意欲退者,當知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謂以專意,念佛因緣,
隨願得生他方佛土,常見於佛,永離惡道。如修多羅說。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陁佛,
所修善根迴向,願求生彼世界,卽得往生常見佛故,終無有退。若觀彼佛眞如法身,常勤修習,
畢竟得生住正定故。
’ 論曰:就此文中,卽有七門。
云何爲七?
一者顯示趣向假人門,
二者歸依所學教法門,
三者厭惡處所退信門,
四者如來方便殊勝門,
五者承力得勝妙處門,
六者得善處定不退門,
七者引經證自所說門#是名爲七。言顯示趣向假人門者,所謂顯示得十信位,前四種心,更不勝進下品衆生故。
如本‘復次,衆生’故。言歸依所學教法門者,彼十信位下品衆生,歸依甚深無極大乘,初學習故。
所謂一切諸佛、所師。三世不動,四相不遷,自然常住地前地上大道路故。如本‘初學是法’故。
言厭惡處所退信門者,彼十信位下品衆生,雖親聽受甚深法門,而其心根極下劣故,
怖二大事,不能勝進,爲欲退故。云何爲二?
一者國土,
二者勝緣。言國土者,卽此娑婆世界處所麤惡,衆生濁亂,發起淨心,爲勤修行,甚極切難故。
所以者何?於彼心中,違逆境界,於一切時,於一切處,常恒現前,進心面中,不捨離故。言勝緣者,
於此世界,依正濁亂,一切諸佛出世極尟,無量菩薩赴感時節極遠,諸佛菩薩出現於世,隨順情心之鏡,
淨不淨故。以此義故,彼修行者不値勝緣,極怖畏故,發退意耳。如本‘欲求正信,其心怯弱,
以住於此娑婆世界,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懼謂信心難可成就,意欲退者故。
言如來方便殊勝門者,謂諸佛如來有不可思議之甚深極妙大方便故。
能善攝護彼人信心。轉勝進故,
云何名爲勝妙方便?所謂專念如來方便。
云何專念?謂專注意,憶念他方淨土種種依正。其念相續,令不絕故。
如本‘當知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謂以專意念佛因緣’故。
言承力得勝妙處門者,以諸如來不可思議方便力故,
隨自所願,卽得往生妙樂土故。如本‘隨願得生他方淨土’故。
言得善處定不退門者,生彼土已,眼見如來具相好像,耳聞聖者說深妙音,
永離惡名,從定不動,心海澄淨,身體明白,依妙正淸故。
如本‘常見於佛,永離惡道’故。
言引經證自所說門者,所謂該攝說相屬當經本之辭,贊自所說解釋文故,所引經文說相明故,
不須重釋。如本‘如修多羅說,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陁佛,所修善根,迴向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常見佛故,終無有退。
若觀彼佛#眞如法身,常勤修習,畢竟得生住正定故’故。
已說修行信心分次說勸修利益分本曰 如是摩訶衍諸佛秘藏,我已摠說。
若有衆生,欲於如來甚深境界,得生正信,遠離誹謗,
入大乘道,當持此論,思量修習,究竟能至無上之道。
若人聞是法已,不生怯弱,當知是人定紹佛種,必爲諸佛之所授記。
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令行十善,不如有人,
於一食頃,正思此法,過前功德,不可爲喩。復次,若人受持此論,
觀察修行,若一日一夜,所有功德,無量無邊不可得說。
假令十方一切諸佛,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歎其功德,亦不能盡。
何以故?謂法性功德無有盡故。此人功德亦復如是。
無有邊際。其有衆生,於此論中,毀謗不信,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
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以深自害,亦害他人,斷絕一切三寶之種,
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盤故。一切菩薩因之修行,入佛智故。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
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是故衆生應勤修學。
’ 論曰:就此文中,卽有八門。
云何爲八?
一者擧前所說摠結門,
二者擧益勸人令修門,
三者顯離疑信功德門,
四者比類爲對示勝門,
五者擧受持功讚揚門,
六者擧誹謗過令怖門,
七者殊勝廣說離謗門,
八者摠結修行勸人門。是名爲八。
言擧前所說摠結門者,謂以一摠字,摠結八種摩訶衍故。何故餘法略不結焉?所謂擧本攝其末故。
如本‘如是摩訶衍諸佛秘藏,我已摠說’故。言擧益勸人令修門者,所謂集成行因之海,而爲莊嚴法身之果,
受持此論,思惟義理,常恒相續,不斷絕故。如本‘若有衆生,欲於如來甚深境界,得生正信,遠離誹謗,
入大乘道,當持此論,思量修習,究竟能至無上之道’故。言顯離疑信功德門者,
謂有衆生聞此摩訶衍之甚深極妙廣大法門已,卽其心中,亦不疑畏,亦不怯弱,亦不輕賤,亦不誹謗,
發決定心,發堅固心,發尊重心,發愛信心,當知是人實眞佛子,不斷法種,不斷僧種,不斷佛種,
常恒相續,轉轉增長,盡於未來,亦爲諸佛親所授記,亦爲一切無量菩薩之所護念故。
如本‘若人聞是法已,不生怯弱,當知是人定紹佛種,必爲諸佛之所授記故。
言比類爲對示勝門者,謂若有人,能善攝化三千大千世界中,遍滿衆生,皆悉無餘,令行十善,或有衆生,
於一食頃,於此甚深法,觀察思量,若校量,此二人功德,彼第一人所得功德,甚極微少,
譬如芥子碎作百分一分之量,此第二人所得功德甚極廣大,譬如碎十方世界微塵數量故。如本‘假使有人,
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令行十善,不如有人,於一食頃。正思此法,過前功德不可爲喩’故。
言擧受持功讚揚門者,謂若有人,受持此論,觀察義理,若一日,若一夜中閒所得功德,無量無邊不可言說,
不可思量。若假使十方三世一切諸佛,若十方三世一切諸菩薩,以十方世界微塵數舌,
各各皆悉於十方世界微塵數之量,不可說劫讚揚其人所有功德,亦不能盡。所以者何?法身眞如之功德,
等虛空界,無邊際故
,
何況凡夫二乘之人,能稱歎之?一日一夜不多中閒受持人,尚所得功德不可思議,何況若二日,若三日,
若四日,乃至百日中,受持讀誦思惟觀察,不可思議,不可思議不可說中,不可說故。如本‘復次,
若人受持此論,觀察修行,若一日,若一夜,所有功德無量無邊,不可得說。假令十方一切諸佛,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歎其功德,亦不能盡。何以故?謂法性功德無有盡故。
此人功德亦復如是。無有邊際’故。
言擧誹謗過令怖門者,謂有衆生,於此論教,生不信心,破謗不行,如是衆生,所得罪報,
於諸不可說不可說劫中,受苦中之重大苦故。如本‘其有衆生,於此論中,毀謗不信,所獲罪報,
經無量劫,受大苦惱’故。
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者,卽是摠結上說決擇,勸請行者。自此已下,作其因緣,
示重過失。謂此法中,不信誹謗,失自善根,損他功德,斷絕一切三寶之種,無續期故。
如本‘以深自害,亦害他人,斷絕一切三寶之種’故。
言殊勝廣說離謗門者,謂十方三世諸如來,
一切皆悉以摩訶衍爲其根本,成正覺故,十方三世無量菩薩,
一切皆悉以摩訶衍,爲其根本,具因海故,如是重深摩訶衍法,若有衆生,
生不信心,諍論誹謗,如是衆生,亦名斷伐一切諸佛,亦名斷伐一切菩薩,
亦名斷絕自如來藏本覺佛故。如本‘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盤故,
一切菩薩因之修行,入佛智故,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
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故。
是故衆生#應勤修學者,
卽是摠結修行勸人門應審思擇。已說勸修利益門,次說迴向遍布門。
本曰:‘ 諸佛甚深廣大義,我今隨分摠持說,迴此功德#如、法、性,普利一切衆生界。
’論曰:就此一頌中,卽有三種門。云何名爲三種門耶?
一者攝前所說摠結門,
二者展舒功德令廣門,
三者施於衆生普利門。是名爲三。就初門中,卽有二種。
云何爲二?
一者通摠攝前所說門,
二者顯示能說字相門。
如其次第,應審觀察。諸佛甚深廣大義者,卽是通摠攝前所說門。
所謂通攝三十三種本數法故。
此義云何?言諸佛者卽是不二摩訶衍法。所以者何?此不二法,形於彼佛,其德勝故。
大本花嚴契經中,作如是說:其圓圓海,得諸佛勝故,其一切佛不能成就圓圓海劣故。
若爾,何故分流花嚴契經中,作如是說?
盧舍那佛三種世閒,爲其身心。三種世閒攝法無餘。
彼佛身心亦復無有所不攝焉。盧舍那佛雖攝三世閒而攝不攝故。
是故無過。言甚深者,卽是兩重八種摩訶衍之本法。以何義故,
名爲甚深?如是兩重摩訶衍法,能入門望,極甚深故。以此義故,
立甚深稱,應審思擇。言廣大義者卽是兩重能入門法。以何義故,
名廣大義?如是兩重能入門法,皆悉各各能廣自法,能大自法,
能爲自法,作名義故。以此義故,建立廣大義名字焉。已說通摠攝前所說門,
次說顯示能說字相門。
言我今隨分摠持說者,卽是顯示能說字相門。謂以摠字,通持一切種種說故。
立義分中,摩訶衍者,摠卽是此焉歟。何故一字通持諸說?
爲欲顯示摩訶衍論如意論故#已說攝前所說摠結門,
次說展舒功德令廣門。言迴此功德如法性者,
卽是展舒功德令廣門。謂自所作之功德,迴向三處故。
云何爲三?
一者眞如,
二者一心法,
三者本覺佛性。是名爲三。
以何義故,迴向三處?謂爲欲自所作功德,令平等故,
迴向眞如,或爲欲自所作功德,令廣大故,
迴向一心。或爲欲自所作功德,令明了故,迴向本覺。應如是知,應如是觀。
如是迴向有何利益?謂衆多故。
此義云何?譬如用一微塵置大地中,所置微塵,與彼大地等無差別,迴向法門亦如是故,
又譬如用一注水,置大海中,所置水注,與彼大海,等無差別,迴向法門,亦如是故。
又譬如破一小有,卽便與大虛空,等無差別。迴向法門,亦如是故。
已說展舒功德令廣門,次說施於衆生普利門。言普利一切衆生界者,
卽是施於衆生普利門。謂擧廣大圓滿功德,周遍利益衆生界故。
歡喜大士至心勸 無量佛子衆海中我已超毛頭三角 過於生花之四根。
第一無數粗滿訖 第二僧祇始入旡如宜汝等諸佛子 以於左右之兩手。
捧於本釋之明鏡 臨七識散慮之面見六塵境界之垢 洗法執人我之咎。
汝等佛子若如是 法身應化之三身如舒伊字圓現前 常樂我淨之四德。
如入達池具出生 我從四王自在處下入大海龍宮殿 隨分窺諸契經海。
摠有一百洛叉數 如是諸經眞實法無量無邊差別義 摩訶衍論立義中。
該攝安立具足說 有善男子善女人若自手捧斯論卷 名捧百洛叉經者。
若自口經誦本分 名誦百洛叉經者此人所得之功德 十方世界微塵數。
諸佛及大菩薩衆 各出微塵數舌相如是微塵數劫中 不息稱說不能盡。
何況觀察其義理 思惟文下之所詮有善男子善女人 生不信心謗斯論。
此人所得之罪業 十方世界微塵數諸佛及大菩薩衆 各出微塵數舌相。
如是微塵數劫中 不息說過不能盡是人往罪滅無所 一切諸佛不能救。
是故行者歸本原 當依斯論應修行實不可生不信心 誹謗甚深大乘教。
當願此勸遠流布 遍於重重不說剎。
釋摩訶衍論卷第十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석마하연론』 10권(ABC, K1397 v37, p.1073a01-1078a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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