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론
근대과학을 떠받치는 두 기둥은 원자론과 인과율이다. 모든 논리의 출발점이 된다. 인간의 사유를 밑바닥에서 규율하고 있다. 그런데 결함이 있다. 세상은 변화다. 누구나 안다. 원자론은 변화를 부정하고 인과율은 변화의 공간적 방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양자역학의 성과와 맞지 않다.
원자론 - 공간의 불변
인과율 - 시간의 변화
세상은 변화와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불변의 구슬이 변화의 실에 꿰어져야 한다. 그런데 원자론의 불변과 인과율의 변화가 충돌한다. 공간불변의 원자론과 시간변화의 인과율이 충돌하는 문제를 해소하는 궁극의 논리는 없다. 구조론의 통합이 요구된다.
공간의 변화는 방향의 변화다. 인류는 공간의 방향 변화에 대한 논리를 갖고 있지 않다. 힌트가 되는 것은 열역학 2법칙에서 말하는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에너지는 방향이 있는데 왜 원자는 방향이 없지? 원자에 방향을 부여하여 머리와 몸통과 꼬리를 다섯으로 나눈 것이 구조론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은 인과율이다. 머리가 앞서고 꼬리가 따른다는 것은 구조론이다. 머리와 꼬리 사이에는 방향이 있다. 원자론은 방향이 없어서 양자역학이나 초끈이론과 결이 어긋난다. 인간이 곧잘 빠지는 논리의 함정은 순환의 오류다. 머리와 꼬리를 헷갈리는 것이다.
원자를 꿰는 실은 구조론의 방향성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원자에 머리와 꼬리가 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은 일어난다. 비로소 구슬이 실에 꿰어져서 우주가 만들어진다. 더욱 양자역학의 최신 성과나 통일장 이론의 모색이나 초끈이론의 가능성과 결이 맞아떨어진다.
결맞음
동양의 주역사상은 변화 중심적 사고다. 불변을 중심에 놓는 원자론과 다르다. 음양과 오행은 변화를 반영한다. 기정, 유강, 동정, 허실, 음양, 영육은 변화가 앞에 온다. 동정을 살핀다고 할 때 동이 앞에 오고 정이 따른다. 노자의 이유극강은 유가 강에 앞선다.
변화가 앞에 - 기정, 유강, 동정, 허실, 음양, 영육, 출입, 신구, 발착, 출몰, 개폐, 명암
좋은 것이 앞에 - 선악, 진위, 득실, 귀천, 청탁, 주야, 미추, 상벌, 진가, 찬반, 승패, 유무
큰 것이 앞에 - 대소, 장단, 고저, 상하, 공사, 원근, 천지, 강약, 광협
변화가 먼저라는 것은 인간의 언어감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언어는 대부분 변화가 앞선다. '푸른 하늘'이라고 하지 '하늘 푸른'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어와 중국어, 영어에 공통된다. 특히 두 단어가 대칭된 중국어 어휘는 구조론과 결이 맞다.
자연의 변화는 방향이 있다. 자연은 변화가 앞서고, 좋은 것이 앞서고, 큰 것이 앞선다. 에너지의 방향성을 반영하고 있다. 에너지가 있으면 좋다. 에너지가 있으면 크다. 에너지가 있으면 변화가 일어난다. 중국인은 직관적으로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가 안정될 수는 있어도 안정된 것은 변할 수 없다. 질량보존의 법칙 때문이다. 좋은 것이 나빠질 수는 있어도 나쁜 것은 좋아질 수 없다. 큰 그릇에 작은 그릇을 담을 수는 있어도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지 못한다. 원자에 머리와 꼬리가 있기 때문이다.
정반합
우리는 세상을 대칭적으로 이해한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사이에 타협은 없다. 빛에는 어둠이 없고, 선에는 악이 없고, 진보에는 보수가 없다. 틀렸다. 우리가 세상을 비대칭으로 이해해야 한다. 총에는 총알이 들어있고, 전략에는 전술이 포함되고, 머리는 꼬리를 아우른다.
헤겔의 변증법은 소박하나마 이러한 고민을 반영한다. 정과 반을 합으로 통합한다. 주는 자와 받는 자다. 받는 자의 세상은 대칭적이다. 이것을 받으면 저것을 받지 못한다. 백인의 몸을 받으면 흑인은 아니다. 그러나 주는 자의 세상은 비대칭이다. 활을 먼저 주고 화살을 나중에 준다.
우리가 받는 자의 수동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받으면 사건이 종결된다. 우승컵을 받았다면 경기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주면 사건이 시작된다. 준만큼 나중에 돌려받는다. 받으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주는 사람은 상대의 대응을 봐가면서 조절한다.
비대칭.. 주는자, 강자, 능동
대칭.. 받는자, 약자, 수동
주는 사람은 사건의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만 받는 자는 그것으로 끝이다. 농부가 밭에 물을 주면 다음날 채소가 한 뼘은 자라 있다. 받는 사람은 받자마자 도망친다. 받은 것을 도로 뺏길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받는 자의 대칭에서 주는 자의 비대칭으로 사유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
무분별
불교에 분별지라는 말은 있는데 그 반대를 가리키는 정확한 말은 없다. 구슬은 실에 꿰어진다. 구슬은 분별되고 실은 통합된다. 무분별지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구슬이 아닌 무언가다. 정확하게 실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물을 꿰는 실은 사건이고 물체를 꿰는 실은 에너지다.
사건의 머리와 꼬리를 관통하는 것은? 생태계의 포식자와 피식자를 연결하는 것은? 병사의 활과 화살을 통합하는 것은? 군대의 전략과 전술을 통합하는 것은? 그것은 에너지다. 사건이다. 변화다. 구조다. 불교도 무언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무언가를 구분하는 것으로 학습을 삼는다. 구분하므로 잘못된다. 받는자의 포지션에 서 있기 때문이다. 주는자의 눈을 얻지 않으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구조는 엮임이다. 엮이면 구분되지 않는다. 너와 나, 주체와 객체, 관측자와 피사체를 구분하므로 깨닫지 못한다.
씨름선수가 샅바를 잡고 버티며 나 -> 너로 힘을 전달하면 교착되어 이기지 못한다. 너와 나를 합친 전체 -> 부분으로 힘을 전달해야 이긴다. 너와 나의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 나로써 너를 이기려고 하면 실패한다. 너와 나를 합친 전체를 엔진으로 삼아 부분을 이끌어야 이긴다.
구조는 대칭 -><-를 비대칭 ->->로 바꾼다. 대칭에 에너지를 투입하면 비대칭이다. 기와 정, 유와 강, 음과 양, 동과 정, 허와 실, 활과 화살, 총과 총알이 모두 ->->로 간격을 좁힌다. 서양적 사고의 대칭성과 달리 동양적 사고는 원래부터 비대칭적, 변증법적 깨달음을 반영한다.
탈압박
세상을 대칭으로 보는 관점은 조로아스터교의 자라투스트라 아이디어다.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 곧 빛과 어둠의 대립논리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주는 어미는 받는 자식을 품는다. 진보는 보수를 품고, 선은 악을 품고, 능동은 수동을 품고, 주는 자를 받는 자를 품는다.
우주의 근본은 변화의 나란함이다. 변화는 나란함을 품고 있다. 변화하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나란해진다. 진보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고 충돌은 나란해질때까지 계속되며 나란하면 보수다. 선은 막힐때까지 진행하며 막히면 악이다. 변화의 엔진은 진보에 있고 선에 있다.
우주의 근본원리는 회피원리다. 우리는 동기나 욕망의 플러스 요인을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틀렸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 회피의 마이너스다. 환경의 압박을 받고 집단무의식의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밥이 먹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배고픔을 벗어나려는 회피다.
인지부조화 행동이 대표적이다. 의도나 목적은 그냥 둘러대는 말이고 인간은 환경과 집단의 압박을 받는 상태에서 압력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거나 숨는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압력을 피해서 할 수 있는게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저쪽이 막혀서 이쪽으로 몰린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다음 액션을 정하지 못해 잘못을 저지른다. 상대를 자극해서 자신의 다음 액션에 대한 아이디어를 상대로부터 조달하는게 나쁜 짓이다. 선으로 자신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려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줄 돈과, 지식과, 기술과, 에너지가 있어야 착한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