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17
ㅡ 잊혀진 왕국들 2ㅡ
('임나일본부' 존재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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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도 흐른다>를 쓰다보니 제가 쓴 글도 고대사처럼 흘러 버렸나 봅니다.
어제 올린 편에서 오늘 편에 '부여'에 관해 자세히 정리하겠다 했는데 '부여'는 이미 <고대사도 흐른다 11편>에서 자세히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 뒤 조금 오랫동안 <지금도 흐른다> 편만 쓰다보니 저도 이미 쓴 것을 깜박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올린 제 글을 읽고 '부여'에 관해 이미 정리해서 올려었다고 상기시켜주신 분들이 아무도 없더군요. 저도 까마득히 잊고 다시 쓰려고 했으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제 글을 읽어 오셨던 모든 분들도 내 글이 고대사가 되어 흘러 가 버렸나 봅니다.
내용이 생각 안 나시고 궁금하신 분들은 <고대사도 흐른다 11편>을 다시 한 번 찾아 읽어 보십시오.
오늘 편 부터는 한반도 남방 쪽 '삼한' 특히 '마한'과 '임나일본부'에 대해 정리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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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남방부에 '삼한'(마한, 변한, 진한)이 존재했다.
이 '삼한'이 존재했던 시기는 '고조선'이나 '부여'가 존재했던 시기와 일부 겹친다.
우리는 학창시절 '삼한'에 대해서 북방 쪽 부여 옥제 동예등과 같이 부족연맹체로 있다가 '진한'은 신라로 발전해 고대국가로 형성 되었고, '마한'은 '백제'에게 흡수 통합 되었고, '변한'은 '가야'로 발전해 통합 되었다가 다시 '신라'로 흡수 통합 되었다고 배웠다. 이와 더불어 삼한의 농사의례제식 행사나 특산물에 대해서만 몇 줄 더 나왔을 뿐이었다. 이 뿐이었다. 그리고 곧 바로 '삼국시대'로 넘어 갔다.
역사 기록 자료가 없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학문적 방법론을 통해 '삼한'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다각적인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삼한의 실체와 그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이해가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특히 '마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마한에 대한 논의는 국가적이라기 보다는 '마한'이 존재했던 지역인 광주 전남 전북 '호남지자체' 가 발 벗고 나서고 있다.
현재 전라도가 <전라도 천년사> 논쟁으로 뜨겁다.
<전라도 천년사>는 2018년부터 5년간 광주시, 전라남도, 전라북도가 213명 필진을 모아 24억원을 들여 전라도 땅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꺼번에 정립하겠단 의욕으로 시작된 사업이다.
편찬을 끝내고 책을 발간하려는 순간 전라도 천년사 중 고대사 부분이 '식민사관과 역사왜곡으로 점철되었다고 주장하는 단체' 와 갈등을 일으키며 <전라도 천년사> 발간 자체가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
반대 시민단체나 재야 역사학자들이 반대하는 이유로 주장하는 것은 ‘임나일본부’ 설의 근거로 쓰인 ‘일본서기’ 기술 내용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삼한'이나 '삼국'이 존재했던 시기에 '임나일본부'도 같이 존재했다는 논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전라도 천년사>가 이 문제에 불을 더 지핀 것이다.
<전라도 천년사>가 식민사관과 역사왜곡에 불을 더 지핀 자세한 이유는 바로 고대사 부분 중 현 전북 남원지역에 있었던 '가야' 지명이 '임나일본부'에 관련 된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 '기문국' 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편찬위원들에 따르면
40년 전 고속도로 공사 도중에 남원에서 5~6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부장품들이 대거 출토 되면서 이 유물 때문에 남원쪽에도 가야가 존재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서야 전라도 내 가야연구 시발점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대가야', '금관가야'처럼 이름붙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북 남원 쪽 '가야'를 어떻게 불러야 할 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일본 역사기록을 비판적으로 활용했다 한다. 이것만으로 <전라도 천년사> 일부내용이 임나일본부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은 민족주의 사학관점에서만 보고있는 지나친 과대확증이라고 주장한다.
이 들 공방은 날로 가열되다가 국회로까지 이어졌다.
<전라도 천년사> 문제는 지난 2023. 12월 국회 문체위 국감에서까지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장과 역사왜곡을 주장하는 시민단체 대표가 증인·참고인으로 출석해 △단군조선의 부정 △일본서기를 인용한 전라도 지명 비정 △전라도 해안지방의 야마토 왜 지배설 등 친일사관 논란이 된 전라도 천년사 일부 내용에 대해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처럼 <전라도 천년사>는 고대사 부분에서 식민사관과 역사왜곡을 주장하는 단체와 극한 갈등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임나일본부' 때문이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 역사에 관한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
일본 측 전통적인 사학에서는 임나일본부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방에 존재했던 일본의 지배기구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일본서기' 등 고대 일본문헌에 근거한 것으로, 당시 일본이 한반도 남방지역을 통치했으며, '임나일본부'가 이를 관리하는 기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 측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강하게 반박한다. 한국사학계는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후대 역사왜곡으로 간주한다. 한국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같은 기록에는 일본이 한반도 남방을 통치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임나일본부' 설은 '광개토대왕비' 로 이어진다.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6년) 기사 바로 앞에 실린 다음의 기록에서 시작된 논란이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이 해석을 두고 일본사학자들은 일본이 바다를 건네 백제와 신라를 점령하고 이 두 나리를 신민으로 삼아다고 주장하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4세기 후반
진구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방지역 정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이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정인보' 및 '박시형', '이기백' 등은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백잔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로 해석하였다.
1970년대 초 재일한국인 사학자 '이진희'는 광개토대왕비 문자가 석회 도포로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바,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2020년에는 기존 주장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연구가 나왔다.
이 논문에 따라 위 문장을 해석하면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계속 조공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넘어) ▨破로 건너오자 백잔(=백제)은 왜와 연결 또는 이용해서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또는 삼으려고 했다)가 된다.
어쨌든 현재 대부분 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당시 일본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에 건너왔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이 부분 내용은 신묘년(391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영락6년 (396년) 부터 14년(404년)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논쟁은 현재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로, 양국 간의 역사적 해석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과거 고대사 이야기로만 존재했다면 지금처럼 큰 갈등이 없겠지만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해서 고대에도 일본이 한반도 남방을 차지해 지배한 적이 있었기에 한반도에 일본 영토권을 주장해 일제강점기를 정당화 시켰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은 현재에도 살아있는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겐 임나일본부설은 절대 받아 들일 수 없는 우리나라 역사 속 '가시'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전라도 천년사>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던 것을 기록한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인 '기문국' 명칭이 스무 차례 넘게 등장하게 썼으니
임나일본부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로 신민단제와 이덕일 같은 재야사학계 더 나아가 지방의회, 이 지역출신 국회의원등 정치인까지 나서서 강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난 솔직히 정확하고 객관적인 지식이 없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객관적 역사 글을 쓰려하는 내 개인적 생각 이지만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역사를 학문적입장에서 보려고 하기보다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너무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다.
심재훈 단국대 교수는 페이스북에 쓴 글을 통해 “20세기 후반 역사 연구의 대세였던 한국사 확장과 아름답게 꾸미기가 고스란히 국사 교과서에 반영되어 대중의 역사인식을 지배”하고 있다며 “21세기 들어 민족주의 경향이 엷어지고 있는 역사학계에서 유사역사학 측의 얘기가 아무리 틀렸다고 설명해도 대중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고 있다.
어제 논한 고대사 '환단고기'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내 개인적 생각도 자국 역사가 전적으로 민족화, 정치화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자국역사가 민족, 정치와 아무 상관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정도 문제이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왜 비난을 하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를 왜 못 받아 들이고 있는 가?
그들도 자국 현재 이익 국수주의에 따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역사적 팩트도 없이 말이다.
사실 나는 역사 글을 쓰면서 내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이야기들이 진실이 아니였음을 알게 되는 게 많았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그 거짓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우리 민족역사의 빛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헤이그 이준열사 죽음 과정, 김좌진 청산리대첩 과장, 안중근과 모친 조마리아에 감동적 편지에 관한 것 등 그간 과장·왜곡되어온 사실들이다.
역사에는 상상력도 필요하고,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도 절실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중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는 이 말도 민족사학자 '신채호'가 한 것으로 안다.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아직까진 누가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누가 했건 이말의 기본적 의미는 자국역사의 잘못된 과거를 잊거나 되풀이 하지 말자는 것이며, 타국이 저지른 것뿐만 아니라 자국의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 경계의 뜻도 함께 담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나에선 주로 타국, 특히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부분에 주력으로 사용되며 민족주의 사학관점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국가주의 시대에는 민족이 중요하다.
그러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아주 짧다. 최근 18세기에 들어서야 대두 되었다.
우리가 우리 민족 고대사에 대해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도 민족주의 국가주의 사학관점일 뿐이다.
솔직히 당시 사람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것이다. 부족개념 뿐이었다. 그 당시 그들은 그냥 그 땅에서 생존했을 뿐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들 후손들이 대한민국이며 어떻고 중국이며 어떠며 또 일본이면 어떨 것인가?
아무 의미없는 일일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류사나 쓰지 한국사를 쓸 이유나 명분이 없어지고 나도 할 말이 없어지니 더 깊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멈춘다.
내가 말하고 싶은 오늘의 결론은
역사에 민족, 국가,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은 팩트에 근거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한'논쟁은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음 편에서 좀 더 자세히 정리해 가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