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K. 비일의 성전 신학]
비일의 『성전 신학』은 신구약 성경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가를 치밀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꼭 정독해보아야 할 책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아래에 소개하는 내용(제6장 사도행전에 나타난 새 성전의 시작)도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옛 성전이 새 성전으로 바뀌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으며, 죄악과 실패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영광스럽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오순절 성령의 형태로 묘사되는
새 성전의 지상 임재
만일 요한복음 20장에 있는 오순절 기대감이 새 성전의 초기 형태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실제의 오순절 사건도 예수와 관련된다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관찰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바벨탑의 언어들과 오순절 방언 사이의 관계
오순절의 방언(tongues) 현상은 무엇보다도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가장 잘 이해된다. "방언"의 결과로 옛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다(행 2:8). 오순절 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대표하던 다른 나라의 목록(행 2:9-11)은 다음과 같이 압축된 형태로 창세기 10장의 "민족 목록"을 암시하고 있다.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창세기 10장에 대한 언급은 누가복음 10:1-12에서 예견된 바 있다. 누가복음 9:1-6이 열두 제자(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함, 눅 22:30) 파송에 관해 설명한 후에 이 텍스트는 예수가 칠십 명(또는 칠십이 명)의 증인을 파송하셨다고 말한다. 그들은 복음화되어야 할 세상 모든 민족을 대표한다. 왜냐하면 70(또는 72) 민족은 창세기 10장에 나열된 민족의 숫자와 관련된 전통적인 숫자를 반영하기 때문이다(Scott 1995: 162-163). 이들은 "생육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가득 채워야" 하는 사명에 불순종한 민족이었다(창 1:28을 발전시키는 창 9:1, 6-7을 보라). 그들은 바벨 지역에서 힘을 합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내려오도록 만들려고 애쓴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바벨 지역에 내려오셨지만, 도리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셨다(시빌의 신탁 3:105; Josephus, Ant. 1.117, 120). 그 결과 그들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창 11:1-9). 그들은 창세기 1:28과 9:1, 6-7에 따라야 했지만 거부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담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땅에 퍼진 것은 아니었지만, 남은 자들 곧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이런 명령에 순종하기 시작했다.
이 민족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혀"(tongues, 행 2:3)와 서로 다른 "방언"(dialects, 행 2:6-8)이 있었다는 사도행전 텍스트의 언급은 창세기 10-11장과의 관련성을 한층 강화시킨다. 왜냐하면 바벨 지역에서도 서로 다른 언어가 당시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바벨에서의 신현은 사도행전 2:2와 마찬가지로 강한 "바람"(Josephus, Ant. 1.118; 시빌의 신탁 3:101-102)과 "다양한 소리들"(시빌의 신탁 3:106)을 동반했다고 한다. 왜 누가는 독자들이 창세기 10-11장과의 관련성을 보기를 원했을까? 하나로 뭉치려 했던 바벨의 죄악과 그 후의 언어 혼잡 및 사람들이 온 땅에 흩어지는 것으로 귀결된 심판은 오순절 때 역전된다. 하나님은 온 땅에 흩어져 있던 여러 민족 대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다른 언어를 이해하는 복을 받게 하신다. 마치 이 모든 언어가 본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말이다.
바벨의 역전은 "혼잡"(confusion)을 유발했던 언어들의 공통 요소에 의해 암시되기도 한다(참조. 행 2:6, "그들이 소동하여"[they were confused]). 바벨에서는 알아듣지 못할 언어 때문에 혼란이 초래되었지만, 오순절 때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 너무도 놀랍고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감탄하는 혼란 상황이 연출되었다. 통일된 이해를 갖게 하는 것의 목적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및 우주의 왕으로서 통치하기 위해 하늘 보좌로 승천하심 등에서 입증된 종말론적인 성령의 권능을 보여주는 데 있다. 예수의 왕권 아래에서,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통해 이 민족들의 대표자들은 다시 "흩어져서" 온 땅을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채움으로써 악의 세력을 굴복시켜야 했다. 칠십 명으로 구성된 예수의 더 작은 규모의 증인들이 그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그렇게 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이런 일을 행함에 있어 정확하게 성령의 권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말씀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행 1:8을 보라).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적절하다(참조. 행 2:1-2, 46). 바벨에서의 심판은 사람들이 모여 신전 탑을 건축함으로써 하나님을 강제하여 복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제의적인 탑들은 당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흔히 발견되었다. 이 탑들의 목적은 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지상의 신전으로 가는 길에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늘과 땅 사이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바벨의 신전 탑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의 지상 성전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미 이 내용이 복음서에서 예수에 의해 예언되었음을 살핀 바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성전이야말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의 배역함과 우상숭배 및 변절 등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성전을 떠나 있었다(겔 11:22-25, Tg. Isaiah 5:5; Midrash Rabbah Numbers 15:10; Midrash Rabbah Lamentations, Proem 24; b. Yoma 21b도 이 점을 가리키는 듯함. 비록 마 23:21; 집회서 24:8-34; Josephus, War 6.299, m. Sukkah 5:4; Midrash Rabbah Exodus 2:2 등이 다른 쪽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말이다. 여기 대해서는 Davies 1991: 32-36을 보라). 앞으로 보겠지만 스데반 집사는 이런 심판을 되풀이 선포하며,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 일로 인해 죽임 당한다(행 6:11-15; 7:48-50). 복음서도 예수가 친히 자신의 사역 기간 동안, 그리고 보다 극적으로는 부활의 때에 옛 성전을 대체하기 시작하셨음을 확증한다(요 2:19-22; 마 26:61; 27:40; 막 14:58, 15:29).
예수의 성전 예언 성취로서의 오순절
새로운 영적인 성전에 대한 암시는 사도행전 2장에서도 확인된다. 만일 요한복음 20:21-23의 오순절 예견을 예수의 성전 예언 성취에서 보는 새 성전 표현(요 7:37-39)과 동일시하는 우리의 견해가 옳다면 이런 암시는 놀랍지 않다. 요한복음 20장에서처럼, 성령 강림은 구속사의 흐름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죄 용서가 물리적인 성전 대신에 예수에게서 비롯되며, 이스라엘의 성전 제사장 대신에 예수의 제사장적 제자들에 의해 선포된다는 점이 그렇다(예. 행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레고리 K. 비일, 강성열, 『성전 신학』(새물결플러스, 2014), pp. 269-273.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갸혁주의 성전신학에서 오순절 방언 문제를 다루신 점이 이채롭습니다.
공감합니다 😁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성전의 흐름을 치밀하게 분석하며, 건물로서의 성전을 넘어 우리 안에 시작된 새 성전의 실재를 깊이 있게 깨닫게 해주는 귀한 통찰입니다.
실패한 역사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성령의 역동적인 일하심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한 소망과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 😎
"바벨탑의 언어들과 오순절 방언 사이의 관계 --- 그의 후손은 이런 명령에 순종하기 시작했다." -->
구속사적 연결: 오순절 방언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창세기 10장의 민족 목록과 누가복음의 70인 파송을 잇는 성경 전체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벨탑 심판의 역전: 인본주의적 교만으로 인해 언어가 혼잡해지고 온 지면에 흩어졌던 바벨탑의 심판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소통과 연합의 역사로 회복되었습니다.
사명의 자발적 이행: 불순종으로 인해 강제로 흩어졌던 인류가 이제는 복음 안에서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으며, 아담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을 자발적으로 완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흩어졌던 언어의 장벽을 성령의 은혜로 허무시고, 만국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회복의 섭리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좋은 내용이네요. 공감합니다.
" 이 민족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 옛 성전을 대체하기 시작하셨음을 확증한다" -->
언어의 혼잡에서 통일로의 역전: 바벨탑의 범죄로 인한 언어의 혼잡과 흩어짐의 심판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각 나라 방언이 소통되는 회복과 연합의 역사로 역전되었습니다.
성경적 신현의 연속성: 오순절의 강한 바람과 소리는 바벨에서의 신현 묘사와 유사하며, 누가는 이를 통해 오순절 사건이 인류 역사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사적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우주적 왕권 선포: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언어의 통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지나 하늘 보좌에 오르신 우주의 왕이심을 만방에 입증하는 종말론적 증거입니다.
새로운 파송과 증거의 사명: 과거의 흩어짐은 심판이었으나, 이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온 땅에 흩어져 그리스도의 통치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사명을 수행합니다.
옛 성전의 심판과 예수의 대체: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바벨탑과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그 자리를 대신하는 참된 성전이 되셨음을 확증합니다.
불순종으로 닫혔던 소통의 문을 성령의 권능으로 다시 여시고, 흩어진 열방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하나로 묶어내시는 하나님의 치밀하고도 거대한 구원 드라마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멘!
"예수의 성전 예언 성취로서의 오순절 --- 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
성전 예언의 성취와 성령 강림: 요한복음에서 예견된 새 성전의 비전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이는 구속사의 중심축이 물리적 성전에서 영적인 성전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합니다.
죄 용서의 근원 변화: 과거 성전 제사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지던 죄 용서가 이제는 참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권능을 통해 직접적으로 베풀어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적 사명의 전이: 특정 혈통의 제사장들이 독점하던 직무가 성령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그들이 세상 속에서 죄 사함과 복음을 선포하는 새로운 제사장 공동체로 세워졌습니다.
건물에 갇혀 있던 종교적 형식을 넘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성령과 함께 죄 사함의 은혜를 직접 선포하고 누리게 하신 복음의 역동성이 참으로 귀합니다.
바벨탑의 교만으로 흩어졌던 인류가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이고, 건물에 국한되었던 성전의 개념이 우리 삶과 공동체 속으로 확장되는 구속사의 거대한 반전이 경이롭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실패로 점철된 역사를 도리어 회복의 도구로 삼아,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노래하게 하신 성령의 세밀하고도 역동적인 일하심에 깊이 매료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 속의 작은 성전이자 제사장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죄 사함의 은혜를 온 땅에 충만하게 흘려보내는 사명자로서의 부르심을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네,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방문과 공감 감사합니다.
바벨탑 사건과 오순절 사건이 대칭 구조를 이루며 실패했던 역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와 영광의 사건으로 새롭게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 깃대어서 그와 더불어 살아갈 때 영광의 길을 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멘!
바벨탑의 교만으로 흩어졌던 인류가 성령 안에서 다시 하나로 묶이고, 건물에 국한되었던 성전의 개념이 우리 삶과 공동체 속으로 확장되는 구속사의 거대한 반전이 경이롭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실패로 점철된 역사를 도리어 회복의 도구로 삼아,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노래하게 하신 성령의 세밀하고도 역동적인 일하심에 깊이 매료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 속의 작은 성전이자 제사장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죄 사함의 은혜를 온 땅에 충만하게 흘려보내는 사명자로서의 부르심을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아멘!
물리적 장소에 머물던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는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의 심령과 공동체 속에 새 성전으로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깨우쳐 줍니다.
바벨의 심판을 오순절의 축복으로 역전시키신 것처럼, 우리 인생의 혼란과 파편화된 모습들까지도 복음 안에서 온전한 연합과 소통으로 빚어가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특정한 제사장만이 아닌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가 세상 속에서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에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벅찬 영광을 느낍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적절하다"는
그레고리 K 비일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신약교회는 성전에 있던 12 사도들에게 성령세례가 임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부분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 9-11절에 기록된 사람들을 여러 민족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행 2:9-11절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 . .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이 말씀만을 보면, 마치 여러 다른 민족들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앞인 행 2:5-8절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라는 말씀을 보면
위에 열거된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모두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의 "우리"는 5절의 "천하 각국으로 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위에 열거된 나라들은 이들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나라들로 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10절), 곧 개종한 이방인들도
모두 "경건한 유대인들(5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이들도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경건한 유대인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면
각국에서 왔지만 서로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이들의 말을 베드로가 알아들었고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이들이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말이 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의 역전이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바벨탑사건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게 된 경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바벨탑의 역전이라고 하려면
말이 통하지 않던 사람들이 말이 통하게 되는 경우여야 하는데
이들은 모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이들 모두에게는 소통하는 언어(히브리어 또는 아람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방언은 바벨탑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 인간의 언어, 곧 외국어방언을 말하게 된 경우가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과 같은 방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방언통역의 은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은사가 동시에 있었으므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표적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때 참여하였던 이들 "경건한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귀기울여 듣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벨탑에서 시작된 인간의 반역과 언어의 혼잡이라는 비극적 심판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구속사적 회복과 소통의 역사로 역전되는 과정이 매우 경이롭습니다.
지상의 물리적 성전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영적 성전으로 그 중심이 이동했음을 치밀한 성경적 근거로 증명해 내는 통찰력이 압권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새로운 제사장이 되어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 땅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는 사명자로 세워지는 대목은 신앙의 본질을 일깨워 줍니다.
신구약을 관통하는 성전이라는 주제를 통해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드라마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독자로 하여금 성경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드는 최고의 역작입니다.
실패한 인류의 역사를 영광스러운 승리의 역사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를 발견하게 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된 성전 된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바벨탑사건으로 인한 언어의 혼잡과 오순절의 방언을 연결시켜
오순절의 방언이 바벨탑사건의 역전이라고 위와 같이 주장하는 글이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데 신학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나뉘었습니다.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사건의 역전이라고 하려면
말이 통하지 않던 사람들이 말이 통하게 되는 경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15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유대인들은, 방언을 말한 사람들, 곧 사도들과도 공통의 언어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방언을 바벨탑 사건의 역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신학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것입니다.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