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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무한, 레비나스, 2000, 다산글방
성서는 사람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 꼭 이야기 되어야 할 제일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는 책이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석을 통해 그 심오함이 드러나도록 개방된 형태의 이야기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마디로 말해 성서는 책 중의 책이다. 성서에 들어 있는 풍부한 윤리성 그리고 신비할 정도로 다양한 주석의 가능성, 나한테 초월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역시 그렇다. 풍요로운 해석을 엿보고 느끼는 것은 과연 종교요 제의라고 할 만하다. 한편 큰 철학가들이 쓴 책을 읽고 해석하면서 내게는 철학이 성서와 반대된다기보다는 성서에 가깝게 보였다. 27,8
내가 두 전통[성서신학과 철학언어]을 일부러 일치시킨다거나 화해시키려고 한 적은 결코 없다. 일치되었다면 그것은 철학이 철학 이전의 체험에 바탕을 두기 때문일 테고, 내게 있어서 그런 기본 체험이 성서를 읽으며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내 방식으로 철학을 해나가는 데 아주 중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 나름의 철학방식이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29
모든 것이 결국은 철학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최초 의미의 자리거나 생각이 시작되는 자리는 아니라고 본다. 30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뜻을 알게 된 것은 훗설을 통해서다. 굳어진 이론체계 안에 갇히지 않고 그렇다고 혼란스런 직관에 의존하지도 않고 철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훗설에게서 발견했다.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뚜렷한 방법론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적절하면서도 정당하게 물음을 묻고 건너뛰지 않고 치밀하게 철학한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처음 찾은 훗설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35
그건 그렇고 하이데거 사상이 가져온 또 하나의 공헌을 지적해야겠다. 철학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가져온 점이다...... 하이데거는 직접 철학자들과 대화하여 위대한 고전들에게 현실의 가르침을 요청하는 새로운 방식을 마련했다. 물론 과거의 철학자들과 곧바로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화를 실현하는 데는 해석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해석이라는 것이 고물들을 맘대로 주무르는 것이 아니다.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으로 이끌어 ‘하는 말’로 끌어내는 것이다. 51,2
여하튼 ‘홀로 있음’이란 ‘존재’의 사건 그 자체다. 사귐(le sociale)은 존재론 너머에 있다. 71
하이데거에게서 있음이 맺는 기본관계는 다른 사람 또는 다른 것과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과의 관계다. 여기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란 대수롭지 않게 된다. 사람은 혼자 죽기 때문이다. 72
앎이란 지금까지 누가 보더라도 동화작용이다. 아무리 깜짝 놀랄 발견이라 해도 결국은 ‘이해(comprendre)’를 통해 ‘손에 넣은(prendre)’ 모든 것과 엉켜 흡수된 것이다. 아주 과감하고 새로운 앎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정말 다른 것과 교통하도록 해주지 못한다. 앎은 사귐을 대신할 수 없다. 앎이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홀로다. 75,6
사귐이란 앎을 통하지 않고 있음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다. 77
<시간과 타자>에서 나는 남성과 여성을 중립의 상호성 속에서 보지 않았다. 상호성이란 혼자들 사이의 거래일뿐이다. 어쨌든 그 책에서 주체된 나를 남성으로 보고 여성의 존재론적 구조를 찾아 나선 결과-그런 노력이 정말 시대착오일까?-여성은 ‘원래 다른 것(le de soi autre)'으로 결론이 났다. 타자성의 원조가 된 셈이다. 82
상대방의 가능성을 원래 자기의 가능성으로 보는 사실, 그리고 꽉 막힌 자기의 정체성과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면서도 자기의 것인 무엇을 향해 갈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아버지됨이다. 나의 있음을 넘어 선 미래, 시간을 구성하는 그 미래성이 아버지됨 안에서 뚜렷한 내용을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갖지 못한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생물학에서의 자식은 자식의 일차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학 차원의 아버지가 되지 않아도 사람끼리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아버지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식으로 보는 것, 그것이 내가 ‘가능성을 넘어’라고 부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90
관계체험은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고 궁극의 것이기 때문에 좀 더 다른 것이라 본다. 종합이 아니라 사람끼리 서로 마주하는(la face à face) 가운데 있으며 사귐(la socialité) 가운데 있다. 그게 윤리다. 그러나 윤리라는 것이 전체성이나 전체성의 위험에 대해 이리저리 추상화된 생각을 한 후에 뒤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윤리는 그보다 먼저 그리고 독립된 차원이다. 제일철학은 윤리다. 99
나와 남을 묶어 생각할 수 없다. 그냥 마주 하는 것이다. 참된 연합이나 참된 아우름이란 종합이 아니라 서로 마주하는 어울림이다. 100
두 개의 관점[삶과 이야기]은 절대로 종합할 수 없다. 종합은 공동의 영역을 전제로 하는데 사람 사이에는 그런 영역이 없다. 공동요소가 있어야 객관화된 사회가 가능하지만 거기서 사람은 사물처럼 되고 사물처럼 개별화된다. 그런 공동요소가 제일은 아니다. 참된 주체들이라면 라이프니쯔의 표현대로 그들을 따로따로 가려낼 수 없다.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은 개인이 모여 하나의 영역을 이루는 것과 다르다. 101
“역사객관성에 들어오는 것만 현실로 볼 것이 아니라 비밀스런 것도 현실로 보아야 한다. 비밀스런 현실에서는 사람 내면의 의도가 역사라는 시간의 계속성을 끊는다. 한 사회의 다원화는 그런 비밀을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_<전체와 무한> 102,3
남을 만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의 눈 색깔마저 보지 않는 것이다. 눈 색깔을 관찰할 때는 이미 남과 사귐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얼굴과의 관계를 지각(perception)이 덮칠 수도 있지만, 원래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얼굴에는 정직함이 숨어 있다. 숨김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얼굴의 살갗은 발가벗었고 헐벗은 채로 있다. 깔끔하긴 하지만 여하튼 발가벗었다. 그리고 헐벗었다. 얼굴에는 가난이 깔려 있다. 흔히 어떤 자세를 취하고 무슨 내용을 담아 그 가난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만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마치 폭력을 저지르도록 우리를 끌어들이는 듯하다. 동시에 얼굴은 우리의 살인을 금지한다. 110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인사요 다른 사람에게 인사한다는 것은 이미 그를 책임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아무 말 안하기가 어렵다.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내용이야 어떻든 이미 인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있다든지, 날씨가 좋다든지, 그밖에 무슨 말을 하든지 중요치 않다. 말을 하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요 그를 책임지는 것이다. 113
다른 사람의 얼굴의 첫 마디는 ‘당신은 살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명령이다. 마치 스승이 내게 하듯, 얼굴은 나타나면서 계명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얼굴은 헐벗었다. 그는 가난한 자요, 내가 그를 위해 아직도 무언가 할 일이 남아 있다.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누구든 ‘제일인자’로서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는 존재다. .... 그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대 전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열린 문 앞에서 ‘먼저 들어가시지요’라고 말 할 수 없다. 내가 한 작업은, 이 ‘먼저 들어가시지요’라는 말의 설명이다. 114,5
내 일은 어떤 특정한 윤리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윤리가 무엇인지 그 뜻을 찾으려 했을 뿐이다. 철학이 늘 체계를 따라야 하는 법은 없다고 본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바탕으로 무슨 윤리를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117
데카르트에게 있어 무한 개념은 이론상의 개념이요 사변이며 앎의 문제였다. 내가 말하는 무한에 대한 관계는 앎이 아니라 ‘욕망(Désir)이다. 나는 욕망과 필요(besoin)를 구분했다. 욕망은 채워질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욕망은 자체의 굶주림을 먹고 살며, 만족하면서 욕망은 더 증가한다. 욕망은 생각 이상으로 생각하는 생각과 같다. 또는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생각과 같다. 상당히 모순된 구조다. 그러나 유한한 행위 안에 무한이 모순 없이 들어 있듯이 그것 역시 모순이 아니다. 119
윤리 곧 책임성 안에서만 주체의 실마리가 풀린다. 책임성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므로 내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성이요 얼핏 보면 나와 상관없는 것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와 관계가 있고 내게 얼굴로 다가오는 것에 대한 책임성이다. 123,4
이제 얼굴이 무언지 내놓고 말해보자. 남이 나를 볼 때 나는 그에게 대해 책임이 있다. 책임을 지고 뭘 하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 그의 책임이 ‘내게로 돌아온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을 넘어선 책임성이다. 보통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존재와 달리>에서 나는 책임이란 원래 ‘다른 사람에 대한’ 것임을 밝혔다. 그의 책임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124
주체는 자기에 대해(pour soi) 있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체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 대해 있다. 125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책임성으로만 맺어진다. 그 책임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어떻게 책임을 질지 알든 모르든, 그를 위해 뭔가를 뚜렷하게 할 수 있든 없든 그렇다. 말함: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함. 줌. 사람의 영성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의 주체성이 탄생하는 데는 반드시 그런 영성이 따른다(천사들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서로 돕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서로 말하기(dialogue)전에 서로 섬김(dia-conie)이 있다. 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렇게 본다. 126
앞에서 지적하지 않았지만, <전체와 무한>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주체와 주체의 관계가 쌍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댓가를 기다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진다. 그는 내 목숨까지도 요구한다. 댓가는 ‘그의’ 문제다.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상호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종(sujetion)이다. 원래 그런 뜻으로 나는 ‘주체’(sujet)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내가 다른 모든 사람을 책임지도,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그들의 책임까지도 내 책임으로 진다. 나는 늘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진다. 127,8
주체는 인질의 처지를 감수한다. 주체란 처음부터 인질이다. 대신 속죄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진다. 129
사람답게 된다는 것은, ‘있음’들 가운데 하나의 ‘있음’으로 있지 않음을 뜻한다. 사람의 영성을 통해 있음의 범주들이 뒤집어져 ‘있음과 달리’ 된다. 단순히 ‘달리 있음’이 아니다. 달리 있음은 여전히 있음이다. 있는 자(l'etant)가 있음(être, essement)을 의문에 붙이고 사심을 버리는(dés-inter-essement)사건을 나타낼 동사가 ‘있음과 달리’ 말고는 없다. 131
사실, 참다운 나의 정체성(나됨)은 책임성에서부터 생긴다. 그런 식으로 자기 의식 안에 내가 일인자로 자리 잡는 것(position), 아니 다른 사람을 향한 책임성으로 자신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deposition) 속에서 참다운 내가 선다. 책임성은 내게만 부여되고, ‘인간적으로’ 나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 이러한 부담은 둘도 없는 자가 누리는 최고의 존엄이다. 나는 둘도 없는 자다.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다. 책임자로서 나는 나다. 책임에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을 대신할 수 있지만 아무도 나를 대신 할 수는 없다. 내가 주체로서 뗄 수 없는 나의 정체성(나의 나됨)이란 그런 것이다. 131,2
윤리란 거룩함의 요청이다. 누구도 ‘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 위선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뜻에서 어떤 제한구역을 넘어서는 개방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무한이란 그렇게 드러난다. ....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때 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말을 통해 무한이 언어로 들어온다. 그런 눈에 잡히는 것은 아니다. 무한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36
유대 신비주의의 특징 하나를 말해 주겠다. 권위 있게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기도문에 보면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시작했다가 끝날 때는 ‘그분’이라고 한다. 내가 책에서 무한을 ‘3인칭(illéité)’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며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는 말 속에 무한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방향을 잡느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주체가 무한을 ‘증언한다’. 137
윤리의 증언은 앎이 아닌 계시다. 140
“영광은 재현(repésentation)이나 말상대(interlocuteur)처럼 나를 그 앞에 세우는 식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영광은 내 입을 통해 내게 명령함으로써 내 말 안에서 영광을 받는다. 그러므로 내면성이란 내 안에 있는 무슨 비밀스런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외면성이 돌아온 것이요, 철저한 외면성이다. 그리하여 본질에 대한 무한한 예외가 나를 건드리고 에워싸며 내 목소리를 통해 내게 명령한다. 명령을 받는 사람의 입을 통해 명령이 나가기 때문에 무한한 외면성이 내면의 음성이 된다. 그러나 그 음성은 다른 사람에게 신호를 보냄으로 내면의 비밀이 분열되는 것을 증언한다. 이 신호는 은혜의 기호다. 꼬불꼬불한 길이다. 끌로델은 그의 책<사틴구두>의 표지에 포루투갈의 격언을 썼다: ‘하느님은 꼬불꼬불한 선을 따라 곧게 쓰신다.’ 위에서 내가 하고자 한 말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다.”_<존재와 다른게, 본질의 저편> 143,4
나는 예언자 정신을 사람답게 되기 위하 조건이라고 본다. 다른 사람을 책임지는 것은 무한의 영광을 증언하는 길이요 계시 받는 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예언자 정신과 계시가 있다고 봐야 하리라. 다른 사람에 대한 응답은 그가 정확히 뭘 요구하는지를 알기 이전의 문제다. .... 그런데 이 예언이 무한한 윤리 요청과 별도로 구체화된 형태로 해석되면 어떤 문서나 책으로 된다. 그렇게 구체화된 형태가 종교인데, 거기서 사람들이 위로를 얻는다. 147,8
현대의 역사비평에 따르면, 수세기 전의 믿음과는 달리, 성서의 저자가 여려 명이며 서로 다른 시대에 활동했다고 하지만 그런 사실이 우리의 신념을 흔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성서의 기적을 여러 문서의 기원이 같은 데서 찾지 않고, 오히려 서로 다른 문서가 같은 내용을 향해 모이고 있다는 데서 찾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한사람이라는 것보다 서로 합류한다는 것이 더 큰 기적이다. 그런데 그 합류의 푯대가 윤리다. 말할 나위 없이 그 윤리가 성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149
성서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읽으며 깨우친 것과 주석한 것들 그 모든 것을 통하여 말한다. 성서는 ‘무거운 단절을 명한다.’ 거기서 우리의 현존재(Dasein) 의식은 의문에 부쳐진다. 성서의 거룩성이 거기에 있다. 성스러운 의식(儀式)에 있지 않다. 153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란 결국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본다. 다른 사람을 똑바로 보는 것은 노출(exposition) 바로 그것 아닌가? 그리고 그 노출은 죽음을 향한 노출 아닐까? 정직한 얼굴이란 솔직히 말해서 죽음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죽음을 염려하는 것, 그것이 책임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154
하이데거는 독일어에서 감정을 나타나는 동사가 늘 재귀동사로 쓰리고 있음을 강조했다. 감동하다, 무서워하다, 슬퍼하다는 동사가 다 그렇다. 그런데 불안은 그 ‘을’과 ‘에 대한’이 일치하는 특별한 느낌이라고 했다. 유한성‘을’ 불안해하는데 알고 보면 내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모든 감정은, 그것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한, 불안으로 모인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다른 사람을 위한 두려움만은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해 염려한다는 관념이, 시기하는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끊고 그 의미를 다시 찾는 것도 그 두려움 안에서 아닐까? 155
여러 기능을 따라 움직이는 사회 안에서 죽이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적어도 다른 누구의 죽음을 예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결국 존재의 의미물음은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하이데거가 주석한 라이프니쯔의 물음-라기보다 ‘있으면서 나는 남을 죽이지 않는가?’이다. 157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곧,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철학전통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과 달리, 있음이 곧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른바 conatus essendi(존재의 충동)를 모든 권리와 의미의 근거로 볼 수 없다. 158
첫댓글
1. 곰TV언니께서 우시암에 보내주신 책들 가운데, 제일 먼저 레비나스를 읽는다. 도서관과 학교를 버리니, 도서관과 학교가 걸어와 주시는구나. 곰TV언니의 귀한 책들을 잘 보존하는 일을 2012년의 화두로 삼겠다는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내년이 될 수 있길.
2. '레비나스를 굳이 철학자라 할 것도 없다, 그냥 신학자다'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작 종교와 철학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제 몸 뉘일 곳을 제대로 틀지 못하곤 한다. 종교와 철학을 양 어깨에 들쳐 매고, 그 두 전통의 무게만큼이나 자신들의 삶과 공부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면서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의 눈치 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선생들이 더 귀하고 존경스럽다.
레비나스. 그의 한문장, 한문장은 그의 철학의 얼굴이다. 그는 나에게 한명의 위대한 감독이다.
그가 성서를 비롯한 고전들을 읽고 해석하고, 재서술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프랑수아 트뤼포와 같은 모습,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에세이 영화들의 나레이션에 중독되어 존대말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