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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뜻 없이 무릎 꿇는 515장 ♬. 약2:14-18
515장 '뜻 없이 무릎 꿇는' 의 찬송은 미국 인디아나주 태생의 정치가며 외교관. 변호사, 링컨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했던 '죤 헤이' (J.Hay;1838-1905)가 남북전쟁 당시 자신이 모시고 있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믿음과 용기에 감명을 받고 만든 찬송입니다.
죤 헤이는 한때 영국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미국으로 돌아온 후로는 국방장관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죤 헤이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여러 권의 저서와 많은 찬송 시를 남겼습니다.
특별히 515장 '뜻 없이 무릎 꿇는'의 찬송가는 야고보서 2장 14절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작시한 찬송으로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무기력한 신앙인 들에게 많은 도전과 경각심을 주고있는 찬송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믿음의 사람으로 정의와 평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학대하는 노예제도를 좋게 평가할 리 가 없었습니다. 좋지 않게 보는 정도가 아니라 노예제도와 같은 반 인간적인 행위는 하나님께 큰 죄가 됨을 온 세상에 알리며 노예해방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남쪽에 비옥한 땅을 많이 가지고 많은 노예를 부리며 호화스럽게 살던 이들은 노예해방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예해방을 부르짖는 링컨의 추종자 북군과 이를 반대하는 남군 사이에 1865년 역사적인 '남북전쟁'이 터졌습니다.
단 시일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남북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하였고 전쟁의 승세(勝勢)는 오히려 노예해방을 반대하는 남군의 승리로 가는 듯 하였습니다. 이렇게되자 링컨 대통령의 집무실에는 승전보(勝戰報)보다 패전보(敗戰報)가 더 많이 날라들게 되었고 따라서 분위기가 무척 침체(沈滯)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링컨 대통령에게 승전보와 패전보를 보고(報告)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링컨의 비서이자 오늘의 작시자인 죤 헤이였습니다.
죤 헤이는 패전보를 전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패전보를 받아든 링컨 대통령의 얼굴에 조금도 불안하거나 침울한 표정보다는 어떤 확신에 찬 미소와 기대감으로 인해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링컨이 연이은 패전(敗戰)소식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 웃음 꽃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패전보가 날아들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함으로 전쟁의 승패(勝敗)를 하나님께 맡기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기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링컨은 항상 밝은 얼굴과 미소를 간직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남북전쟁 북군의 승리로 끝났고, 링컨 대통령은 세계 역사 속에 길이 남을 노예해방을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감격적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죤 헤이가 링컨 대통령의 믿음과 용기를 회상하며 "뜻 없이 무릎 꿇는" 515장의 찬송을 만들었습니
다.
본 찬송 곡은 웨일즈 지방의 전래 곡을 D.에반즈가 수집하여 그의 찬송 곡 집에 수록한 것입니다.
1절)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1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운명에 복종하며 뜻 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독수리 날 듯이 희망에 넘치는 은혜의 삶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자신을 한 알의 밀 알로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몸소 베푸는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올바른 삶의 가치관과 사회관 경제관 종교관을 가지고 세상에서 등대역할, 방파제역할개척자의 역할 등을 감당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벧전2:13-17절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윗사람에게 원하시는 복종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대하여 일단은 순복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 많이 아니라 바울도 로마서 13장에서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굴복하라" 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권세를 주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신 데 만일 우리가 그 권세를 거스르면 곧 하나님의 권세를 거슬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단지 악을 행하거나 잘못을 행하였을 때만 순복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세를 받치는 것이나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므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국가의 모든 제도에 법규에 대하여 양심을 지키며 성실하게 준행(遵行)함이 필요합니다.
둘째: 윗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함이 필요합니다. (17절)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부득이 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을 공경할 때는 존경하는 마음과 형제를 사랑할 때는 거짓 없는 마음으로 서로 우애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롬12:9-10)
예수님께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각박해져가기만 하는 이 시대에 봉사와 사랑의 꽃을 피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 중에는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들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한 믿음의 거인들입니다. 또한 구약성경 다니엘서 3장 16절부터 18절에 보면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므로 잡혀가 위협을 받을 때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 왕이 저희들을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풀무불에 집어넣어 우리를 사라지게 할지라도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즉'그리아니하실찌라도' 왕이 만든 금 신상에는 절대로 절하지 않겠습니다.'는 순교자적인 믿음을 가지고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은 이들을 그 풀무불에서 안전하게 건지시고 더 높은 지위와 영광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군대에 들어가면은 고참들의 행포와 박해로 또는 군 생활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나머지 신앙생활을 거의 포기하고 특별한 날에만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리한 상황에서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환경과 아픔 속에서도 주일을 성수하며 믿음의 상을 아름답게 키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낮 시간에 2003인 표어와 같이 "별같이 빛나게 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배하는 신앙 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성도는 몇 명되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의 모습을 가지고는 "별같이 빛나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네 번째: 주 뜻 외치며 사는 전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사역을 우리들에게 위임하시고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여러분들이 보시고 경험하였겠지만 예배 후에 주보 한 장 들고 나가 차량에 꽂는 것조차 부담스러움을 갖고 실행하지 못하는 성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만큼 교회가 섬기며 기도하며 전도하는 실천의 훈련보다는 이론에 치우치는 지식위주의 신앙을 키웠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국민일보 칼럼에서 『요즘 젊은 목회자들 속에는 '헝그리 정신'이 없는 것 같다. 내가 한창 전도할 때는 외판원으로 오해하고 도둑놈으로 오해하여 많은 어려움과 곤경을 당했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전도하는 것 마저 부담으로 느끼면서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데 어찌 이래서야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겠는가? 우리 모두 헝그리 정신으로 돌아가 주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하였듯이 우리 모두가 자발적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듣지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복음의 십자군병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딤후4:2, 딤후1:11-12)
운명에 맡겨 사는 성도들의 모습과 독수리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은 환경과 죽음을 초월하는 영적 힘이자 능력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열정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능히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가 참으로 구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건물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믿음 안에서 푯대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을 높이며 살아가는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아멘
작시자 죤 헤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되는 대로 살며 안주하는 수동적 체념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지정의(知情意)를 승복시키는 적극적인 삶이 되어 내 안에 '주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마 6:10)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특성은 비겁(卑怯)이나 도피(逃避)가 아니라 확신(確信)과 용기(勇氣)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順從)은 뜻 없이 무릎꿇는 맹종(盲從)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Coram Deo)결단이요 처절한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통한 개혁의 의지입니다.( 찬송가 1절)
아울러 내 안에 진정한 믿음의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권력이나 자본주의 논리에 억압되지 말고 약한 자에게 힘이 되어주며 강한 자에는 겸손과 정의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2절).
이렇듯 '뜻 없이 무릎 꿇는'의 찬송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는 무기력한 신앙인들과, 힘있고 돈 있고 강한 자들에게는 온갖 아양과 아첨을 떨지만 자기보다 힘이 없고 약한 자들에게는 갖은 핍박과 모욕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비굴한 사람들을 향하여 참 정의와 용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귀한 은혜의 찬송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당시 북군이 남군에게 밀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 평온함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요일4: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 하여도 그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없으면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能)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고전13:1-3)
그러므로 이 시대 가장 탐내야 할 믿음이 사랑의 은사입니다.
여기 정의보다 더 위대한 힘이 사랑이라는 아주 좋은 예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 아이크 밀러는 영국 북부 지방에 위치한 어느 탄광촌에서 살던 깡패였습니다. 어느 날 밤 그 탄광촌에서 찬양예배가 열려 수많은 광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이 찬양예배에서 젊은 목사인 헨리 무어하우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때 아이크 밀러는 이 예배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소리치며 단상 앞에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헨리 목사와 그 곳에 온 모든 광부들은 그가 예배를 방해할까봐 모두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해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곳은 바로 아이크의 영혼 속이었습니다. 즉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교만한 마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아이크의 영혼에 밝게 비쳐진 것입니다. 그 결과 걱정했던 찬양예배는 무사히 끝을 맺었고, 아이크도 교회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배 후 나이 든 몇몇 성도님들이 헨리 목사에게 '아이크'를 혼내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불평했습니다. 이들은 부드러운 사랑의 메시지보다 정의에 관한 말씀을 전했어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이크가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해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헨리 목사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에게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설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그를 돕고 싶었기 때문에 사랑의 설교를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헨리 목사의 말에 어느 누구도 공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아이크 밀러가 보여준 행동은 심각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같은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아이크 밀러는 예배를 마친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평소 아주 가끔씩 집에 일찍 들어오긴 했지만 이날은 너무 일렀는지..... 아내가 무척 당황해하며 "아니 당신 이렇게 일찍 웬일이세요.?" 라고 물으며 순간 아이들은 급히 방 한쪽 구석으로 몰았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아빠로부터 평소에 잦은 폭력으로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날도 본능적으로 이에 대비하는 자세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의 얼굴과 행동을 보면서 좀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지금 전혀 술에 취하지 않은 채 맨 정신으로 집 안에 들어온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남편이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를 껴안고 키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남편을 이렇게 당신 곁으로 되돌려 주셨구려." 그는 이번에는 아이들을 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하나님께서 이 아버지를 너희들 곁으로 보내 주셨단다. 자, 우리 함께 기도하자. 자비하시고 온유하시고 부드러우신 주님, 이 어린 자식들을 보살펴 주옵소서. 그리고 저의 무지를 용서하시고 당신께로 나아가게 구원하여 주옵소서."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의와 사랑' 그 어떤 것이 힘이 있습니까?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이크 밀러에게 만일 "정의"에 대한 설교를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설교가 그를 이처럼 변화시켰습니다.
2003년 우리의 소원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소원들 중에도 우리가 가장 힘써 구해야 할 소원은 바로 '사랑의 은사'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3:7)
늘찬양교회를 향한 봉사와 헌신도
직장 상사를 향한 섬김과 봉사도
이웃과 친구들을 위한 희생과 섬김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믿음으로 행할 때
주 뜻이 이뤄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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