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부산공업고등학교53기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James(최상진)
오늘 와이프를 따라나섰다.
어제 갑자기 화계사(華溪寺)를 가겠단다.
사월초파일 등을 미리 달기 위해서란다.
1년에 두어번 화계사 가는건 와이프의 종교적인 연례행사인줄 아는데, 예고없는 통보에 급 당황이다.
서울 시내에 가까운 절이 많이 있는데도 굳이 먼 화계사를 간다.
와이프의 깊은 뜻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가 주기로 했다.
이렇게 심한 반항(?)을 하지 않고 내가 응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오랫만에 사찰을 품고있는 산과 숲,계곡을 끼고 도는 맑은 물의 기운을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계사행 시내버스152번의 쾌적함과 안락함이 맘에 든다.
이 버스는 몇 정거장을 지나면 승객 대부분이 다 내리고 거의 텅빈 상태로 간다.
고양이 쥐 생각하자면, 이러다 버스회사 망하는 것 아닌가 싶다.
게다가 나는 버스에서 와이프와 같이 앉을 의무가 없이 따로따로 앉아 갈 수가 있다.
이것은 내가 화계사를 따라나서기 전부터 와이프에게 걸어둔 중요한 옵션중의 하나다.
그래서 누구의 간섭과 방해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즐거움과
갈라 앉게 되는 편안함을 맛볼수 있기 때문이다.
2시간 가까이 되는 꽤나 먼거리를 가야하니 그 전날 좋아하는 음악들을 다운 받아두고 이어폰도 챙겨놨다.
아침 8시 지나서 집에서 출발했다. 한번을 갈아 타고나서, 기다리던 152번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안은 예상대로 승객이 얼마 없었다.
나는 성큼성큼 뒷좌석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뒤따라 올라오던 와이프가 나를 한번 째려보곤 중간쯤 자리를 잡는다.
이내 버스는 출발한다.
차창으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을 받으며 가벼운 버스의 진동에 몸을 맡긴다.
어떤 눈치도 보지않고 가장 게으른 자세로 기대어 세상밖 풍경을 감상한다.
1년에 한두번 이용하는 나만의 전용차다. 택시부럽잖다.
그동안 지친 머리도 식힐겸 여러가지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도 뭐 나쁘진 않다.
싼티나는 방법이지만 모처럼 유식(有識)으로 포장한 사색(思索)이란걸 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노량진이다.
단종의 복위를 노리다 순절한 충절의 여섯신하, 참혹한 최후를 맞게된 사육신의 묘를 지나간다.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한 충신들이 노량진 재수생들의 천국, 학원가를 굽어보고 있다.
노량진은 대입재수생,공무원,고시 준비생등 각종 학생들을 위한 학원의 메카다.
개천에서 용나고,노량진에서 재수생난다.
불투명한 미래의 희망을 위해 불야성을 이루는 곳, 이런 청춘들 덕분에 학원은 배불러간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학원은 어찌 노량진으로 다 보냈을꼬?
버스는 이제 한강대교를 지나고 있다.
6.25때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고자 전쟁 3일만에 강제 폭파당해 많은 목숨이 희생당했다.
내가 사회 초년병시절 처음으로 이 다리를 지날땐 역사적 의미에 깊은 상념에 젖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론 한강이 흐르던 말던, 역사적 사건은 딴나라 일 처럼 무심하게 영도다리 건너듯 그렇게 지나게 되었다.
버스는 삼각지로 들어선다.
한강,이태원,서울역으로 갈라지는 세갈래 길 그래서 삼각지란다.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가수 배호.
노래하나 맛깔나게 불렀던 중저음의 가수다.' 비에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가는 삼각지 '다.
옛날 2편동시 상영하는 3류 극장에서 상영전에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그노래가 ' 돌아가는 삼각지 ' 였다.
군대있을때 외출나왔다가 이곳에 무슨 거창한 로맨틱한 사연이라도 있는가 해서,
반드시 보아야 하는 사명감으로 삼각지 역 주변을 둘러봤다.
근데 웬걸, 거리엔 횡하니 사람도 없이 을씨년스럽고 차도에 차만 쌩쌩 달린다.
대 실망감에 " 에라이 C ! " 하고 나도 모르게 탄식을 뱉어내곤,
두더지 기어 들어가듯 다시 지하철로 쑥 들어간 기억이 난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건물도 많이 들어섰지만 별볼일 없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삼각지는 보여주는 것 없이 괘씸하게 그저 남의 노래 덕만 볼려고 한다.
버스는 남대문 경찰서를 지나 남대문 방향으로 들어선다.
대한민국 경찰서중에 가장 피곤하고 힘든 곳 중 하나다.
서울역에선 거의 매일같이 자기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긴장하고, 용산 철거개발로 뿔따구난 철거민한테
얻어 맞기도 하고, 이유없이 욕도 배불리 먹는 남대문경찰서는 때론 불쌍하다.
하긴 대한민국 경찰서중에 어디 룰루랄라 하는데가 있겠냐마는.
남대문 시장은 내가 한국에 나왔다가 해외로 다시 나갈때면 여기 자주 들른다.
현지 직원들을 위해 한국냄새나는 기념품들을 사곤했다.
공항 면세점보단 값도 싸고 물건도 다양하고 품질도 괜찮아서 좋다.
나도 알고 보면 한류 전도사였다.
우리나라 사람 보기드문 곳에 살다가 사람이 그리울 땐 남대문시장은 북쩍대는 사람냄새를 느끼게 해주었다.
버스는 국보1호 남대문을 (숭례문)를 끼고 돈다.
남대문, 대형화상을 입고 깊은 상처를 가진 대문이다.
부실하게 복원했니 어쩌니 하면서 요즘 뉴스의 이슈가 되는 바쁘신 몸이 되었다.
명색이 국보1호인데 졸속 부실공사의 피해자로 자존심이 뭉개져있다.
게다가 복원하는데 쓴 나무가 제살이 아니고 남의 살을 썼네하고 참 말도많고 탈도많은 불쌍한 놈이다.
내가 부공시절에 화상당해 피부이식을 받아봐서 느낌아는데
자기 살로 이식해야지 남의 살은 생리적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안된다. -- 의사 말 이다.
남대문은 외상못지 않게 심한 정신적 내상을 입은 놈이다.
예전에 화재나기전, 해외바이어 부부가 출국전에 꼭 국보 남대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요청을 해 왔다.
그것도 일요일 밤에 편안하게 집에서 쉬고 있는데 말이다.
" 제기랄, 차가 다니는 데 무슨 사진이야? 사진찍기도 엿 같은데 " 하고 투덜대고 나갔지만,
두사람을 픽업해서 어렵사리 찍어준, 불타기전의 남대문 야경사진은 그 부부에겐 잊지못할 기념이 되었다.
개인적인 피곤함에 불만을 터뜨린 내가 부끄러웠다.
버스는 보물1호 동대문(흥인지문)을 살짝 옆으로 지난다.
떠 받치고 있는 석축이 이끼와 세월에 많이 퇴색되어 나이가 무척 들어보인다.
근처 동대문시장은 직장의 쫄병시절에 샘플재료 구매하러 뻔질나게도 드나들었던 곳이다.
동대문시장앞은 빼곡하게 즐비했던 오토바이택배, 리어카택배, 심지어 지게꾼택배에 각종 노점상까지
그야말로 돗떼기시장의 대표주자였다.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이 치열하게 살아가던 삶의 현장속에서 나는 바쁘게 살았고,
그렇게 요동쳤던 흔적들이 이젠 아름다운 청계천으로 시장앞을 장식하고있다.
당시 손바닥 손금 보듯이 동대문 종합시장을 꿰뚫고 있던 나는,
시장 빌딩안의 숱한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청운의 꿈으로 무장한, 화려했던 쫄병시절이 꽃피던 시절이었다.
당시엔 얼마나 바쁘게 싸돌아 다녔는지 근처의 ' 흥인지문 '에 미안하지만 눈길 한번 줄 수가 없었다.
동대문시장은 직종과 업종은 달라도 그속에서 샘플용 자재를 체크하러 다니던
여러 회사의 개발 관련 직원들이 서로 만나서 정보도 교환하고 커피도 함께 나누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내 나와바리를 휘젓고 다니던 나는 좋게말해 해외영업의 첨단에 섰던 개척자정신을 가진 선봉자였고, 그냥말해 시키는대로 하는 심부름꾼이며, 막말로는 그저 해외영업의 머슴꾼이었다.
그래도 가끔씩 점심으로 때웠던 근처 평화시장의 청국장찌게가 이 청춘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버스가 어느새 구불구불 산이 높아지는 성북구로 접어든다.
여기를 지날때면 시인 김광섭님의 시 ' 성북동 비둘기 '가 생각난다.
내가 아직도 감성이 남아있던 무렵에 이 시는
어릴적 내고향 영도 '산만디' 하꼬방 사람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쯤해서 이런 시 한편을 올려놓는 이 친구의 센스에 박수를 보내다오.
- 성북동 비둘기 -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버스는 이제 한많은 미아리고개로 올라간다.
미아리고개, 옛날에 중국되놈들이 한양으로 쳐 들어올때 이 고개를 넘어온다해서 되너미고개라 했다.
영화 ' 최종병기활 '에서 보듯이 청나라 되놈들이 한양을 쑥대밭 만들려고 몰려 들어오던 고개가 바로 이 고개다.
6.25때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끌려갈 때 한 많은 이 고개로 넘어갔다.
'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못뜨며...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고개 '를
나는 드디어 신발까지 벗어놓고 양반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아무생각없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안방이 따로없구나.
버스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나와 눈이 마주쳤다.
" 그래서 어쩌라고..? "
얼마후 드디어 종점이다. 저멀리 인수봉이 보인다.
북한산 836M. 인수봉은 암벽 등산가들의 교과서적인 모델,그리고 83년 대형 인명사고로 유명한 곳.
얼마전 뉴스에서 바위가 떨어져 또 다시 인명사고가 발생한 곳이다.
심심찮게 발생하는 암벽사고다.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르는데 댓가는 공짜가 아니다.
용광로 산악회가 문득 생각난다.
친구들, 등산다닐때 몸 조심들 하거라.
마음은 날다람쥔데 몸은 방바닥 친화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산은 주요 산봉으로 인수봉,백운대,만경대로 이뤄져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다.
병자호란때 김상헌 선생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남긴 싯귀중에
교과서에도 나오는 ' 가노라 삼각산아 잘있거라 한강수야 (중략)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에 나오는 그 삼각산이 북한산이다.
김상헌선생이 조선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비통함에 눈물흘리며 지은시다.
선생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며, 타협을 하지 않는 선비의 상징으로 청나라와 끝까지 맞장뜨자고 주장하다가
결국 청나라로 압송되어 심양으로 끌려가셨다.
기사모 친구들중에 안동김씨 친구는 조상님의 프라이드(Pride)를 잊지말거라.
종점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안걸려 화계사에 도착했다.
와이프는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나는 사찰내 수라간부터 찾았다.
이시간이면 공양을 시작할 때다.
절구경은 그 다음이다.
널찍한 식당에서 인심좋은 보살님들한테 산채비빔밥 한그릇과 된장국을 받아들고 맛있게 먹었다.
역시 절밥은 화계사가 최고다.
가볍게 웰빙식으로 때우고 나서 경내를 쓰윽하고 둘러본다.
매년 와서 특별한 감흥은 없지만 사찰내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눈도장을 찍고 다닌다.
경내에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외국인 스님들도 제법 보인다.
사찰이라해도 내가 둘러 보는데는 5분이면 족하다.
화계사는 중생들한테 많이 베푼다.
외국인 스님들도 많이 찾고, 해외 포교활동도 활발하고 템플스테이(Temple Stay)도 한다.
어려운 사람도 보살피고 화계사에 오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정을 베푼다.
그래서 나같이 종교가 불교가 아닌 사람이나 노숙자, 등산객차림의 중생들에게까지도 부처님의 자비를 베푼다.
매년 찾아 오지만 사찰은 변함이 없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휙휙 바뀌지만 절은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찰 지붕의 곡선기와와 법당의 전통적 문양양식 그대로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건축의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걸까.
요즘세상에 바뀌지 않는 모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가.
오래전 일이다.
제3국 가공무역 협의차 스리랑카 출장을 간적이 있었다.
불교 발상지나 다름없는 불교국가라서 모처럼 시간을 내어 수도 콜롬보에서 가장 큰 사원을 가 보았다.
사원의 외형적인 형태가 우리완 전혀 달랐다.
그때는 우리나라는 인터넷이 거의 안됐고, TV를 통해 해외 문물소개도 없었던 때라
스리랑카의 불교에 사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늘 보아왔던 우리 불교건축과는 양식이 판이하게 달랐던 점이 놀라왔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의 사찰과는 시쳇말로 스타일이 달랐다.
따지고 보면 스리랑카 불교가 인도에 이어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 건축양식은 오리지날을
닮지않고 동북아 삼국 각각의 전통적인 건축문화를 계승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계사의 역사는 고려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 광종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란 분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에 보덕암(普德庵)을 창건하여 이어져 오다가,
1522년(조선중종 17)에 신월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화계사라고 이름지었단다.
중간에 불도 한번 나고, 오래 지나다보니 낡아서 새로 고쳐 짓고해서 지금까지 왔단다.
사찰의 역사는 보험약관 만큼이나 골치아프다.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화계사를 자주 들렀다 한다.
그래서인지 전각 여러군데에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많다.
그중에 이분이 쓴 명부전(冥府殿)의 간판을 유심히 올려다 보았다.
글씨는 세월만큼이나 바래졌다.
저 정도면 썩 잘쓴 것 같진 않다.
흥선대원군이 명필은 아닌듯하다.
사찰옆은 좁은 계곡를 가로질러 북한산 둘레길로 이어져서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다.
53기사모 용광로 산악회가 좋아할만한 코스일 것 같다.
마침내 와이프가 행사를 마치고나온다.
나는 기다렸다는듯이 이번엔 국수 한그릇으로 배를 마저 채웠다.
떠나기전에 마지막 만찬이다.
화계사는 변함없는 게 또 하나 있다.
메뉴 코스다. 비빔밥에 이은 잔치 국수.
밥만 먹고가도 화계사는 자애로운 부처님미소를 띈다.
역시 절밥은 화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