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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란 무엇인가
1. 수필의 정의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가장 친근하게 여겨지면서 큰 부담 없이 읽고 쓸 수 있는 것이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수필에 대한 피상적인 느낌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수필의 근본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수필은 마음가는 대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특별한 글이다. 문학이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내용과 형식의 자유를 모두 그 본성으로 지닌 것이 수필만의 특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필의 형식을 무형식의 형식이라 하여 자유로움 안에 내재된 수필만의 작법이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특별한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으므로 문학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보거나, 차원 높은 예술성을 획득하지 못한 장르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쓴이의 견고한 철학이 들어가 있지 않은 수필이란 본격적인 수필에 넣을 수 없으므로 수필이라고 이름지어진 글은 심미적 가치를 지닌 개성적인 글을 지칭하는 말이다. 삶에 대한 고결한 깨달음을 담은 잘 쓰여진 글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며 인생의 방향을 일깨울 수 있다.
또한 철학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는 글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어서 의미가 적지 않다. 유창한 문장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하거나, 피상적인 인식만을 표방한다면 좋은 수필이 될 수 없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정신과 지적인 사고가 있어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고, 그런 요소들은 무엇보다도 깊이 있는 철학의 토양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여러 문학 분야에 대한 깊이 있고 지적인 인식이야말로 좋은 수필의 토대로 작용한다.
다음은 철학적 수필의 예로 장 그리니에의 『섬』 중의 「공(空)의 매혹」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 글이 감각적인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병행하여 젊은 날의 불안이 어디서 오는가를 설명하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었으며, 장 그르니에는 세상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섬세한 스승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이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밑에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삼켜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無의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부하고 충만한 생존의 인상에 바로 잇달아 느끼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그후, 나는 왜 한 가지는 다른 한 가지에 잇달아 나타나는 것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왔다. 몸과 혼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지능으로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악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현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다 더 깊고 더 심각한 문제였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든 것이 삼켜버릴 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라는 말은 적당하지 못할 것 같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하여간 내면적인 사건들은―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어느 날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게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여간 '덤으로' 살아가도록 마련된 것이다.
허버트 리드는 "수필이란 마음속에 표현되지 않은 채 숨어 있는 개념, 기분,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이라든가 정서 등에 상응하는 유형을 말로 창조하려고 하는 무형식의 시도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글이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표출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다른 장르는 나름대로의 특별한 형식으로 그 안에서 제한을 받기도 하고 그 형식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으로 표출되는 데 반해 수필은 일정한 틀이 없이 쓰여진다는 측면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수필은 길이가 짧고 일견 쓰고 읽기에 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의 결과로서의 결실이 들어있어야 한다. 이것은 수필이 자유로운 글로 보이면서도 아무나 쓸 수는 없는 특별한 글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피천득의 「수필」은 수필의 이러한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만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 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플로니우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십분지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버리는 것이다.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남송(南宋) 때의 홍매(洪邁, 1123∼1202)로 알려져 있다. "마음에 생각이나 느낌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적고, 앞뒤의 순서를 다시 바로잡지 않았으므로, 이 책에 '수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後先 無復詮次 故目曰隨筆)”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수필이란 말이 처음 보이는 것은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중 '일신수필(馹迅隨筆)'이다. 그러나 수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훨씬 전부터 수필의 성격을 가진 글들은 이미 쓰여지고 있었다. 이규보(1168∼1241)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은 수필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문장가인 이제현(1287∼1376)은 「역옹패설(翁稗說)」에서는 "처마의 낙수를 받아 벼룻돌을 삼고 벗들 사이에 왕복한 편지 조각들을 이어붙인 다음 기록할 것을 닥치는 대로 그 종이의 배면에 적고 그 끝에 제목을 붙여 '역옹패설'(翁稗說)이라고 한다."는 글을 서문에 적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문학의 형태 중에서 수필에 해당하는 글들을 찾아 새로운 인식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새로운 수필쓰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의 글은 고려시대 대문호인 이규보의 수필 「슬견설(犬說)이다.
어떤 손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에 아주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들이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 너무 참혹하여 정말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턴,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를 끼고 앉아서 이를 잡아서 그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손님이 실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들었다.
"이는 아직 작은 생물이 아닙니까? 나는 큰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하는 말인데 당신은 이를 예로 들어서 말하니 이것은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좀 자세히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흔히 생명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합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큰 놈과 작은 놈을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시오. 엄지 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 손가락은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있는 큰 마디나 작은 마디나 고르게 피와 살이 있으니 그 아픔이 같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모든 생물 중에서 어찌 저 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 놈은 좋아하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하여 보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큰 붕새와 같은 것으로 보도록 하시오. 그 다음에 나는 당신과 도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수필은 자기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럽고 꾸밈없이 써 내려가는 글이므로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기본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글은 글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단지 시작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본격적인 수필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서 확립되는 시점을 말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1580년에 몽테뉴가 쓴 「수상록(Les Essais)」을 본격적인 수필의 시작으로 본다. 물론 그 이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명상록」을 비롯하여 많은 글들이 있으나, 몽테뉴가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본격적인 수상의 결집체라는 점을 중시하여 출발 지점으로 보는 관점이다. 몽테뉴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면서 그간의 삶을 뒤돌아보며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사색하며 써 놓은 글이다.
이후 베이컨 또한 1597년에 같은 제목으로 책을 내놓았으며, 프랑스에서 시작된 에세이라는 문학의 장르가 영국에까지 전해진 것을 보게 된다. 베이컨은 "시사적으로 쓴 짧은 비망록에 나는 에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새롭지만 그 자체는 옛날부터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두 사람의 글은 수필의 두 가지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곧 몽테뉴가 인생을 관조하고 삶의 근원적인 것들에 대해서 내밀한 사색을 거치는 글을 썼다면, 베이컨은 주로 현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즉 결혼이나 직업 등을 비롯해서 극히 현실적으로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 논리적이면서도 객관적인 글을 썼다. 그래서 몽테뉴 형의 수필을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 즉 경수필이라고 부르고, 베이컨 류의 수필을 포멀 에세이(formal essay), 곧 중수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램(1775∼1834)에 이르러 비로소 서양문학에서 수필은 확고한 장르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이 장르는 동양에서는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에서는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인포멀한 에세이가 주류를 이루고 포멀한 에세이가 드물어서 수필의 다양성이 위축되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사색의 폭을 넓히고 현실에 대한 논리적이고 예리한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며, 나아가 더욱 문제적인 수필이 쓰여지고 널리 읽혀져야 수필의 독자적인 영역의 확대가 이루어질 것이다.
Ⅱ. 수필의 특성
1. 개성적인 문학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글이란 자기만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같은 빛깔의 글이 없어야 마땅할 것이다. 더욱이 수필은 그러한 자기만의 빛깔과 향기가 가장 독특하게 드러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글이 다 개성을 중시하고 개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나, 특히 수필은 생생하게 자기를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표현하는 것이 그 특성이기 때문에 글쓴이와 독자가 가장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글쓴이의 개성은 단지 외적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묵은 장과 같은 인생의 연륜을 깊이 있게 경험한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값진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필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과 경험을 가진 이가 풍부한 사색을 거쳐서 비로소 얻게 된 향기를 발산하는 글이다.
다음은 전혜린의 「홀로 걸어온 길」의 일부이다. 전혜린은 독일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성균관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31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친 수필가이자 독문학자이다. 뜨겁고 짧은 생을 마친 고독과 우수의 에세이스트인 그녀는 사후에 수필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일기집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남겼고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등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 열정적으로 완벽한 생을 구하다가 자유의 문으로 스스로 들어간 그녀의 글에서 우리는 외로움과 고통으로 가득하며 때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날 나는 부둣가에서 뗏목이 떠내려오는 것을 본 일도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큰 뗏목에는 수 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고, 모두 검붉게 탄 건강한 체구들이었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뗏목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부둣가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지 전신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동이 내 어린 마음을 찔렀다.
먼 데에 대한 그리움, 어디론지 멀리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어쩌면 내 천성에 유랑 민족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이국적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로 인해 눈뜨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인식에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대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그런 결심을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생을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하지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논리의 수미(首尾)가 일관된 생을 우리는 희구한다.
그러나 생의 테제와 안티테제는 논리에서처럼 당연한 일의적 단계를 밟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생은 너무나 혼돈적이고 어두운 밤의 측면과 꿈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고 그와 객체 관계가 지양되는 투명한 순간은 우리에게 그렇게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분열된 의식과 전 우주에 대한 고독감에 앓고 있다. 인식과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와 합하는 노력만이 우리를 고독에서 구출한다.
그러나 우주선이 달세계로 가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영혼의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된다. 사랑도 변형된 호기심인 경우가 많고 사랑의 행위에서도 지적인, 너무나 지적인 것이 현대인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 감금되어 있다. 자아에 망집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공관 속을 꿰뚫는 것은 현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기적 같은 희귀한 몇 개의 순간에서만 우리는 변신을 한다. 헌신과 희생이 가능해진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생은 다시금 어두운 것, 무표정한 것으로 된다. 그 속에서 아무 관련도 없이 제각기 인간은 산다. 고독한 탐구를 계속한다. 죽음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몽상한다.
생은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회한, 모든 후회는 결국 존재의 후회로 귀결한다.
태어났음의 비극은 피조물성 속에 있는 균열, 즉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일정 기간 생명이 신비한 힘에 의해서 우리의 의식 없이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불가시성 속에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짧은,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지루하게 긴 우리의 생에서 그래도 진주빛 광채를 지닌 기간이 있다면 그것은 유년기이리라.
유년기―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낙원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어떤 시인은 말했다. 어린 시절은 의외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그리고 우리는 몇 살이 되어도 그 장을 펼쳐보고 싶어진다.
영원한 그리움―그것은 고향에 대한 것이다. 원류에 대한 동경… 영원의 고향에 대한 거리감에 앓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귀향하려는 노력을 플라톤은 향수라 했다.
어릴 때 우리는 모두 초시간적이고 불사신이었다. 존재의 상처를 모르는 이상주의자, 즉 영원한 현실과 부딪칠 때 늘 생사를 건 모험을 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어린애로서, 즉 이데알리스트로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뿐더러 종종 파국을 가져온다.
생에 조초한 어린애들 위에 디디고 서서 개가를 울리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영원한 속물들, 인간을 목적으로 알지 않고 수단으로 아는 바리새인들, 현명한 준법자들, 투철한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이데아가 없다. 따라서 유년기가 없다.
2. 무형식의 문학
시는 가장 압축된 문학적 표현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세계를 서사적 수법으로 길게 묘사하고 서술하며 일정한 플롯을 거느린다. 희곡은 두 시간이라는 시간의 제한된 무대라는 공간의 제약, 그리고 등장인물의 수 등 많은 제약이 있지만 인생을 시처럼 압축해서 표현한다. 시나리오 역시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의 제약과 신(scene)이라는 장면 단위의 구분에 철저하게 따라야 하고 영상으로 옮겨질 것을 생각하면서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장르는 각기 제한된 형식의 한계 내에서 쓰여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한 형식의 제약은 그 장르만의 고유한 특성이며, 바로 그 제약이야말로 그 작품을 특정한 장르의 작품이라고 분류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곧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이란 도저히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유기적 결합이야말로 좋은 작품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수필 또한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혹은 수필이라고 명명하게 하는 형식이 있음직하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특정한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 바로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점이 될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다른 장르의 모든 형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수필은 시적인 암시와 상징, 은유와 알레고리 등의 다양한 기법을 이용할 수 있으며, 소설적 플롯을 차용할 수도 있다. 희곡처럼 인물을 등장시켜 대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장면을 구성할 수도 있으며, 시나리오와 같은 영상적 기법도 가능하다. 곧 수필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게 글에 맞는 형식을 사용할 수 있는 열린 형식의 장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시인 유치환이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연인 이영도 시인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편이다. 두 사람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편지로 주고 받았으며, 그 편지들은 유치환의 사후에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서간집으로 출간되었다. 서간문은 수필의 형식 중의 한 형태로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가장 인간적인 향기를 전하는 글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던 유치환은 진솔한 사랑의 마음을 숨김없이 전하는 이 편지들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고통과 외로움을 절절하게 쓰고 있고, 그것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감동으로 전해진다. 39세부터 60세까지 20년 간 계속된 편지는 단순한 개인적 애정 서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한 인간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깊이와 진실을 느끼게 함으로써 절실한 감동을 준다. 나아가 청마 문학의 가장 근본적인 세계로서 자리하고 있는 이 서간들이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근간이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열렬한 애정은 그의 시가 허무 의지를 표방하게끔 이끌었던 것이다.
사랑한 당신!
제야를 당신과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이 해로 탕자의 허랑에서 벗어난 정결한 당신의 영혼에 씻기움을 받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지요?
사랑한 나의 芸!
이렇게 불러 봄이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오랜 세월을 당신에게서 떠나 있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떠나 있었음으로 하여 한결 한시 반시도 떠나지 않았던 나의 당신에게의 향수는 골수까지 사무쳐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값진 시절을 갈구에 사무치던 영혼의 반려! 오직 당신에게의 이 사모만은 어떠한 경우 어떠한 고비를 겪을 때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가슴을 다가들기만 했습니다.
사랑한 나의 芸!
내 영혼의 고향이 오늘 따라 이렇게 마음 저리게 그립습니다.
먼 세월 속 당신의 모습 앞에 얼마나 목놓아 흐느껴 울어온 馬의 목숨이기에 말입니다.
여기는 학교입니다. 한참 바다빛이 슬프게 물들어 있습니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를 그 빛을 앞에 두고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의 앞날이 얼마나 하겠기에 오늘날 서로의 가슴에 어색한 베일을 쳐 옳겠습니까?올해는 정녕 악몽 속의 한 해만 같았습니다. 뉘우칩니다. 못나게도 눈물이 나는구먼요. 이렇게도 못난 馬임을 알고 당신은 용납한 것 아닙니까?
나의 슬픈 芸!
오늘 제야를 당신과 같이 지내며 당신의 높은 영혼의 자락에 묻히고 싶습니다.
이 글이 당신의 손에 닿을 때는 새해 첫날이 되겠지요. 그러니 나중에 우선 전화로 뜻을 물을 마음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랑한 나의 芸!
목마르게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당신이 무어라 한 듯 馬는 당신의 馬요, 당신은 馬의 당신인 것입니다.
그렇죠? 대답해 보십시오.
새해에는 둘이서 어디나 가서 우리의 편지들을 정리합시다. 긴 세월 얼마나 아프고 서럽던 사연들을 다시 펼쳐 읽음으로 우리는 서로가 깊은 애정을 도릴 수 있고 더욱더욱 사랑하게 되리라 믿어집니다.
우리의 편지를 정리해 곱게 책을 냅시다요. 진정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목숨해 왔음을 세상에 증명할 때가 왔습니다.
아아, 세상이, 세속들이 얼마나 우리의 애정을 부러워하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을 부끄러운 죄나 되는 것처럼 가슴속에만 숨기려 하는 당신이 요즘 들어 「애정서한집」을 내는 데 동의하는 것을 보아 한편 어쩌면 당신이 죽으려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이 미치니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그럴 리 없어야지요. 우리가 진정 어느 하나를 잃고 당신이나 내가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나의 芸!
새해엔 올해 한 해의 손해를 때로 보충하는 사랑을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이며 나는 더욱 다짐하는 바입니다.
새해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들어가겠습니다.
거기 가서 불도에 귀의하여 더욱 슬프게 당신 그리움을 맑히여 여명하기로 이미 내 안에 작정된 것입니다.
당신도 멋 뒷날 해인사로 오십시오. 작은 암자를 짓고 우리는 어린애같이 여생합니다.
芸! 바다가 곱습니다. 못나게도 눈물이 납니다. 당신 부여잡고 흐느껴 울던 그 눈물이 잠시 나들일 갔다가 또 이렇게 오는가 봅니다.
사랑한 내 芸!
그럼 전화하리다. 오라 하여 주십시오. 馬와 같이 제야를 보내며 종소리를 들읍시다요.
나의 芸! 그럼 안녕.
1966년 12월 31일 당신의 馬
3. 유머, 위트의 문학
인생에 대한 관조와 성찰이 담긴 수필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는 유머와 위트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유머와 위트는 잔잔한 비단에 보일 듯 말 듯 어려 있는 은은한 무늬와 같은 것이다. 위트, 즉 기지란 코믹하면서도 놀라움의 충격을 주도록 의도적으로 고안된 짧고 기교 있는 어휘의 표현이다. 여기서 놀라움이란 보통 단어와 개념 사이의 차이나 관계를 뒤집어, 듣는 이의 기대를 좌절시키고 전혀 다른 길로 기대를 만족시킬 때 얻어지는 산물이다. 또한 유머는 기지를 담은 말처럼 산뜻하고 경구적 형태를 취하지 않고 그저 웃음 자체에서 끝나는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유머와 위트는 수필을 생기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다음은 김진악의 「八不出의 辨 二題」라는 글이다. 일상현실의 삶에서 벌어지는 가정사의 일을 유머와 재치로 풀어쓰고 있다. 아내와 자식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독자에게 잔잔한 웃음을 선사한다.
① 안사람 이야기
남들도 더러 그러기에, 어느 화사한 봄날, 새색시 칠보단장을 시켜서 부부동반 나들이를 하였다.
장안에서도 한복판을 바자니는데, 유리창 속에 벌여놓은 금은보석을 구경하고, 옷가지도 들여다보는 눈요기가 할 만하였다. 청승맞게 둘이서 손을 잡고, 동서남북 기웃거리는 꼬락서니가 상경한 와룡선생, 바로 그 모양새였다. 배가 촐촐하여 아내가 소원이던 자장면을 먹고, 리어카 목판에서 구슬가방도 하나 골라 샀다. 가난한 남편의 호주머니가 달랑달랑하였으나, 예까지는 아무 탈이 없었다. 새아씨는 좋은 남편 두었다고 행복이 넘치는 듯하였다. 입가심으로 아내가 석달하고도 열흘 동안 비싸다고 되뇌이던 커피도 마셨으니 말이다.
사건은 버스정류장에서 벌어졌다. 어쩌다가 보는 옛 친구와 만났다. 서로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예까지도 별 탈은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 내 안사람을 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뚱딴지였다.
"자네는 효잘세. 자당님을 모시고 명동엘 나왔군!"
초로에 빨리 노망한 친구와 헤어진 뒤에, 나는 아내를 위로할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안사람은 한번 크게 웃고 그만이었다. 바깥양반은 안절부절하는데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마음 쓰기로 말할짝시면 남편은 남산이요, 아내는 백두산이었다.
명동사건 이후 이십 수년이 지난 엊그제에도 우리집 왕비를 서운하게 한 일이 또 일어났다. 우리 집에서 어부인을 왕비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약간의 풀이가 있어야겠다. 온 세상 사나이들은 너나없이 왕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다 왕위에 오르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제 부인을 왕후로 여기고 중전마마로 모신다면, 남편은 스스로 대왕전하가 되어 환대를 받고 영화를 누리게 된다. 천하의 못난 남정네들에게 권할 만하다.
우리 가정의 중전마마를 알아보지 못한 자는 동사무소 서기였다. 내가 주리틀고 있는 서재로 새어 들어오는 말소리를 듣자니, 무슨 용무로 왔다거니, 도장이 있어야 한다거니, 옥신각신하더니 사나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인 좀 보자고 해요."
몇 마디 말이 오가고 진정되는 기미가 있는 듯하였다. 동사무소 나리가 간 뒤, 왕비는 상감의 방에 대고 아뢰었다.
"날 파출부로 알았나봐."
남편은 동서기 멱살을 잡고 싶은데, 아내는 무사태평이었다. 생불(生佛)이 따로 없다. 역시 바깥양반이 한강이라면, 안사람은 황해바다였다.
백두산의 정기가 내리고 황해 용왕이 점지하여 중전은 두 공주를 두었다. 후사를 염려하는 여론이 들끓었으나, 상감은 여러 빈을 두지 아니하였다. 여왕이 있고 여수상이 있는 세상이다.
두 딸의 이름은 보라와 다원이라 지었다. 이 여인을 보라, 다 원하는 사람이 되라, 뜻이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딸들이 심지를 잘 뽑아서, 명문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녔으니, 귀한 따님을 용인으로, 제주도로 귀양보낸 부모님들에게 황송하다. 딸 둘이 혼기가 다가오는데, 팔도강산에 뭇 사나이들이 다 원하여 다투어 보려고 몰려오기를 바라고 있다.
가장이 물려받은 재물이 없고, 직업이 접장이라 가세가 날로 기울어서, 궁여지책으로 집사람이 사장노릇을 하게 되었다. 포장마차 주인도 사장행세를 하는데 약국의 국장을 여사장이라 부른대도 존칭이랄 수 없다. 아내가 사장이면, 남편은 회장님이다. 약국 명칭을 회장이 짓고 길일을 택하여 문을 열었다. '다원약국', 동네방네 사람들이 다 원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문전성시를 이루기를 바랐다. 없이 사는 달동네분들, 큰 병나기 빌면 천벌 받을 죄이고, 그저 고뿔이 걸리거나 배탈이 나거나 넘어져서 팔공댕이 까질 만큼만 앓아서, 그때마다 우리 약국에 왔으면 하였다.
각설하고, 다원약국 여사장, 약장사를 하는데 실로 요란하것다. 다 원하여 약 먹으러 오는 손님은 별로 없고, 지나가던 온갖 잡새들이 방앗간 드나들 듯하는 것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잡상인들이 들락거리는데, 들러가고 쉬어 가고 물먹고 가고 실로 장관이었다. 약 파는 집에 되려 제 물건 더 흠뻑 놓고 가니, 파는 약 한 가지에 사는 물건은 열 가지라. 꿀장수 가짜꿀 놓고, 돗자리장수 봉씌우고 달아나고, 빈 보퉁이 잡아놓고 노자돈 빌려주기, 월부책으로 노적 만들기, 하 기가 막혀, 어떤 불한당은 여사장님 자리 비운 사이 약품을 쓸어가기도 하였다.
어디 이뿐이랴. 회장님이 퇴근길에 들러보면, 약국이 아니라 동네 부인네들의 사랑방이었다. 할머니·아주머니·색시 할것없이 앉거니 서거니, 애를 안고 있는 여인네, 업은 부인네, 뜨개질을 하는 여인도 있었다. 계모임인지 반상회를 하는지, 왔던 손님 기겁하여 번번이 도망쳐 나가버렸다. 이러기를 한두 번이 아니어서 마침내 회사의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아내의 잘못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이십 수 년 동안 쌓은 공이 크기 때문이다. 권력이 없고 재물이 없고 건강이 없는 가장을 헌신적으로 내조하였고 두 딸을 곱게 길렀다. 밍크목도리나 다이아 반지를 탐내지 아니하였다. 가상한 일은 수많은 복부인들을 제치고 아파트추첨을 따내서, 서울 강남하고도 압구정동, 한강물 창 밑에 남실거리는, 5천만 동포가 선망하는 네 식구의 보금자리를 장만하였다. 조그만 사업을 거덜냈다고 해서 벌을 내리다니, 차라리 큰상을 바쳐야 옳다. 인생무상이라, 비바람 찬서리에 내자의 머리에 하나 둘 흰털이 생기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만 간다. 반백이 된 안주인은 외할머니가 되겠다고 아침저녁으로 전화통 곁에서 살고 있다.
"우리 딸은 재수했는데…… 의사가 나왔다구요? 많이 해달랄 텐데…… 교수딸이라고 한번 보잔다구요?"
팔불출이 되어도 좋다. 나는 요로코롬 사는 아내를,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사랑한다.
② 딸 이야기
안사람이 첫딸을 낳고, 다음에도 언니와 같은 아이를 낳았다. 우리집은 두 딸을 두게 되었다. 딸만 둘이라는 말을 나는 쓰지 않는다. 누가 물어 오면 '딸 둘만 기르지요.'라고 대꾸한다.
어쩌다가 비행기 타고 제주섬에 가고, 미국 구경을 가게 되었다. 가끔 내 마음을 덧나게 하는 친구가 있다. 삼등 연락선을 타고 탐라섬에 갈 사람이다. 첫 아들을 본 그 친구는 다음에는 딸을 낳겠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제가 무슨 재주로 구색을 맞추겠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첫딸의 이름은 '보라'라고 하였다. 김보라! 눈부신 보라색 옥돌이 구른다. 어감이 곱고 뜻도 깊다. 이 여인을 보라! 순 한글로 호적에 올렸다.
나는 딸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백의 하나만큼도 남을 돕지 않았다. 어리석은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않았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도와주지 못하였다. 나로 말하건대, 한평생 훈민정음을 밑천 삼아 사는 국어 접장으로서, 딸들 이름이나 한글로 지어서 세종대왕에게 바쳤다.
딸의 이름이 썩 잘 된 듯하다. 애비의 허락도 없이 여기저기 보라 아파트가 들어섰다. 거리에는 보라패션 전문점이 생겼다. 어울리지 않는 보라슬레이트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게으른 부모가 애시당초 특허청에 딸 이름을 올려놓지 않은 일이 한이 되었다.
이보다 더 한스럽고 섭섭한 일은 또 있었다. 갓난애를 안고 아빠가 동네 고샅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였다. 보기도 아까운 우리 딸을 마음껏 보라고 말이다.
아무래도 모를 일이었다. 딸을 보고 누구하나 예쁘다는 사람이 없었다. 옆집 할머니 한 분이 한다는 소리가 복스럽게 생겼다고 하였다. 복스럽다는 말은, 칭찬할 구석이 없는 아이를 두고 있는 인사치레라는 사실을 오래 후에야 알았다.
스물다섯 해 전에 동네 할머니의 관상은 맞았다. 내 딸은 복스럽게 자랐다. 곱게 컸다. 치열한 입시경쟁에서도 심지를 잘 뽑아서 명문여고를 다니고, 한강가에 있는 대학도 나왔다. 우리집 공주는 직장에 나가거나, 유학가는 꿈을 꾸지 않았다. 양반집 규수라 하겠다.
졸업하자마자 따님의 지상목표는 오직 시집가는 일이었다. 제가 골라 놓지도 않고 엄마더러 사윗감을 대령하라고 보채었다. 이 여성을 보라고 했더니 뭇 사나이들이 보다가 눈이 부셔 다 달아났나보다.
장안의 여러 베테랑 매파에게 내놓았다. 보이기도 아까운 딸이 선보기로 나서는데, 아침에 보고 점심에 만나고 저녁에 맞선을 보자니, 이런 야단이 없구나. 만나본 총각이 무릇 기하이며, 만난 곳이 무릇 기하이며, 사나이 직업이 무릇 기하이뇨.
어디서 전화가 오면, 잠꾸러기 내 딸은 어느 녀석인지 분간할 줄 몰랐다. 복 받을 일이었다. 우리집 따님은 보는 신랑감마다 다 좋다고 하였다. 좋게 보면 착한 선녀요, 흠이라면 주체성이 없다.
장님 문고리 잡은 격으로 의사총각이 나타났다. 의사는 의사인데 "한"자가 앞에 붙어 한의사인데, 마치 우리 딸을 만나려고 세상에 나온 사나이 같았다. 보약을 들고 우리집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장인될 어른이 뇌물에 약하다는 소문을 들었나 보다. 애의 에미가 물었다.
"처음에 보라를 보고 어땠지요?"
"정신이 없었어요."
한약방 주인이 우리 딸을 제대로 본 듯하였다. 이 여인을 보라고 하였더니, 보는 임자 따로 있다. 보자마자 정신을 반은 놓은 모양이다. 이성을 잃은 듯하였다.
이성을 찾기 전에 예를 갖춰야 했다. 사주관상쟁이 찾을 틈이 없고 길일을 택할 겨를이 없다. 지난 겨울, 한강물 돌아가는 노량진 언덕 위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이름처럼 보라고 안 해도 손님들은 신랑 신부를 다투어 보고, 천하일색 천정 배필이라고 감탄하였다. 머리맡에 솟아 있는 63빌딩을 쳐다보는 하객은 하나도 없었다.
4. 다양한 제재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철학적 사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이 수필의 제재가 될 수 있다. 늘 접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발견을 할 때 좋은 수필은 태어날 수 있다. 같은 사물, 같은 자연, 같은 사람이라도 보는 이의 마음과 시각에 따라서 그 모습과 느낌은 아주 다양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지혜로운 이는 한 송이의 들꽃에서도 인생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다음은 법정 스님의 『서 있는 사람들』 중의 「제비꽃은 제비꽃답게」라는 수필의 일부분이다.
한평생 수학이 좋아서 그것만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수학자가 있다. 그는 숫자에서 미의식 같은 것을 느낄 정도로 그 길에는 통달한 사람이다. 연구실에서 풀리지 않던 문제가 산을 오르거나 바닷가를 산책하는 무심한 여가 동안 문득 풀리는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한 그는 가끔 동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네는 지겹지도 않아서 수학만을 그렇게 연구하는가? 자네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인류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럴 때마다 그 수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고 했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건 제비꽃으로선 알 바가 아니라네."
어떻게 들으면 오만 무례한 소리로도 들리지만, 그의 대답은 그만큼 자신과 신념에 넘쳐 있다. 그 꽃이 꽃답게만 핀다면 한두 송이를 피어 가지고도 봄의 온 들녘을 술렁거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제비꽃이 제비꽃답게 피지 못하고 개나리처럼 핀다거나 혹은 벚꽃처럼 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정말 보아줄 수 없는 꼴불견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제비꽃만의 이변이 아니라 봄의 비극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기 빛깔을 지니고 살기가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개인의 신념이나 개성이 둘레로부터 도전을 받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조준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도도히 흐르는 획일의 강물에 휩쓸려 끝없이 표류해야 할 운명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 한때는 무관의 제왕이노라고 제법 호기를 뽐내던 신문을 비롯하여 그 획일적인 속물이 되어달라고 몹시도 보쳐대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빛깔을 빼앗고 얼을 앗아간다. 사고의 힘과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마약 같은 힘을 가지고 그 안에서만 허위적거리게 한다. 따라서 맹목적이고도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 신념을 갖기란 어렵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서로 닮아간다. 주택단지의 집들처럼 그놈이 그놈 같기만 하다 동작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범속하게 동질화되어 간다. 이쯤 되면 고유명사는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일련번호나 보통명사로서 우리들의 호칭을 대신해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Ⅲ. 수필의 종류
수필은 형식상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자유로운 양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크게 포멀(fomal) 에세이와 인포멀(informal) 에세이, 곧 중수필과 경수필로 구분한다. 중수필에 속하는 것으로는 비평문이나 소논문, 서평, 수상 등이 있고 감상문, 일기, 서간문, 신변잡기 등이 경수필에 속한다. 전자는 주로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사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반면, 후자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사색적인 것이 특성이다.
1. 경수필
경수필은 미셀러니(miscellany)라고도 하며 대개 개인적인 성격의 글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선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경우가 많아서 다분히 정서적인 성향을 띠며 더욱 개인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이양하, 피천득, 윤오영 등의 수필이 이에 속한다. 다음은 정문권의 「변하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 20여 년」이라는 수필이다.
1980년대 초의 배재대학은 지금처럼 번잡하지도, 정돈되지도 않았지만 소담스런 풍경을 지닌 모습이었다. 캠퍼스의 형태는 조그마한 운동장(지금의 자주로) 하나와 건물 두 동(하워드관과 아관)에 지나지 않아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학교 주변은 온통 산과 밭으로 둘러 싸여 있어 밤이면 캠퍼스를 오고 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당시 정문은 지금의 후문이었는데, 여기에서 10여 분 걸어내려 가야만 버스를 탈 수 있었고, 회포를 풀 수 있는 주점들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그 길은 포장이 안 되어 있어서 비만 오면 질척한 수렁으로 변하곤 했다.
또한 전체 학생 수가 많지 않았던 탓에 어느 학과의 누구라고 하면 그 학생의 신상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당시 우리 학교에 재직하고 계시는 교수님은 스무 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다 보니 어느 학과의 어떤 교수님 하면 그분의 성격과 스타일, 수업방식, 집안사정에 대해서도 학생들이 알 수 있었다. 대학 캠퍼스다운 멋도 없이 소담스런 풍경들이었지만, 학교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던 듯하다.
이러한 풍경들 속에 묻혀 담담히 생활하던 우리들에게 이색적인 교수님의 출현은 우리의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기에 충분하였다. 헐렁한 듯하면서도 지적이었고, 테가 굵은 뿔테 안경과 멋들어진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 이러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흰 머리칼, 이렇게 보산(寶山) 선생님은 우리들 앞에 나타나셨다.
이때가 1981학년도 1학기를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첫 강의 시간, 뭔가 궁금증에 부풀어 있던 우리들을 선생님은 실망시키고 말았다. 교수님과 첫 대면에서 학생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우리들은 교수님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나 흰 머리칼에서 우러나오는 인생 이야기 등을 기대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대뜸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시고는 텍스트의 내용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나이 드신 교수님이라 어쩔 수 없나보다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들의 예상으로 그때 교수님의 연세를 대략 50대 중반으로 추측하였다.
이렇게 선생님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계절이 바뀌고 강의가 진행될수록 선생님의 숨겨진 진가는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말할작시면'으로 시작하여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구수한 입담과 농익은 강의는 우리들의 마음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수업 중간 중간에 '이 할아버지가'로 시작되는 인생 강의도 정말 재미있었다. 서울대 사대 시절의 김윤식 교수와의 학문적 교류(사대 동창인 김윤식 교수보다 학창시절에는 보산 선생님이 더 날렸단다.)와, 그 분의 인생역정을 들려주실 때는 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님이 말 한 마디하지도 못하고 애간장만 태웠다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교수님을 달리 보이게까지 하였다.
따스한 봄빛이 온 캠퍼스에 가득할 즈음이면, 교수님의 어깨에는 항상 달고 다니시던 까만 가방 외에 또 다른 가방 하나가 더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다음 아닌 교수님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카메라였다. 강의가 없을 때, 교수님께서는 카메라를 들고 캠퍼스 곳곳을 찾아다니시면서 셔터를 누르시곤 하셨다. 캠퍼스의 아름다운 모습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사와 지나가던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을 배경 좋은 곳에 세우고 사진을 찍곤 하셨다. 사진만을 찍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상된 사진을 고급스런 액자에 넣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그마한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교수님이 모델로 선정한 교수나 학생들이 거의 여자였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로 인하여 남자 교수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나를 비롯한 멋대가리 없는 남학생들은 볼멘소리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나는 교수님께 이 문제에 대해서 따지듯 여쭌 적이 있었다. 그때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자가 볼게 뭐 있어."라는 명답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미적 감각에 대한 선생님의 예리함을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교수님의 미적 감각은 넥타이에서 한층 빛을 발하였다. 매일 바뀌는 넥타이는 저마다 화려함을 잃지 않고 백발의 보산 선생님의 목을 장식하고 있었다. 선물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교수님의 선물 사랑(?)은 각별하다. 선물 넥타이를 매고 오시는 날이면 그날 수업시간은 넥타이 자랑으로 시작하셨다. "요것이 물 건너 온 것인데 말야…"(정말 '물 건너 온 것'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라는 말로 시작한 교수님의 말씀은 숨이 차 올라 기침을 한 번 하고서야 그칠 수 있었다.
교수님의 자랑이 밉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교수님의 표정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자랑하실 때의 교수님 얼굴에는, 큰 알사탕을 양손에 쥐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진득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속되는 수업에서 학생에게 캔커피라도 받는 날에는 교수님의 기분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것도 예쁜 여학생의 선물이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이다. 선물도 일종의 뇌물인지라 캔커피를 사다준 학생은 모든 학생들 앞에서 A+를 약속 받게 되는 영광을 얻는다. 그러나 실제로 캔커피 하나 때문에 A+를 받았다는 학생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면으로 보면 교수님은 뇌물의 용도를 잘 아신 분인 듯하다. 특혜를 바라지 않고 주는 애교 있는 뇌물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게 잠시나마 A+이라는 즐거움을 갖게 하니 말이다.
교수님은 축구광이시다. 특히 한·일전이나 월드컵 축구라도 하는 날에는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신다. 한국 사람이라면 일본과의 스포츠 경기에 열을 올리기 마련이지만, 교수님의 그것은 좀 유별난 데가 있으셨다. 외국에서 경기를 하게 되면 시차 때문에 새벽에 중계방송을 해도 교수님은 잠을 이겨내면서 보시는 모양이다. 교수님의 애국심을 훔쳐볼 수 있는 순간이다. 백발의 교수님께서 축구광이라는 사실은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교수님께서는 초등학교 시절에 축구선수로 활동하셨단다. 그것도 센터포드로서 골잡이의 역할을 충실히 하셨다고 술자리에서 간혹 말씀하신다. 지금의 교수님의 모습에서 축구선수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도사라도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경기가 있었던 다음 날이면 경기의 승패에 관계없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축구 얘기를 하신다.
'고상한 것', '이상한 것'에 대한 관심은 교수님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래서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모두 고상한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마치 작은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이다.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오래된 책, 신석기 시대에나 사용했음직한 토기들, 고물상에서 수집해온 듯한 텔레비전 등 모두 고상한 것들이다. 교수님 연구실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는 착각을 일으켜 오히려 어울리지 않게 구석에 놓여 있는 컴퓨터가 구시대의 보물처럼 느껴진다. 학교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온갖 잡동사니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사모님과의 신경전도 대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교수님께서는 잡동사니를 집안으로 들일 때는 사모님께서 장기간 외출한 사이를 노리신단다. 지금도 사모님께서 보초병처럼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시지 않는 것이 교수님의 불만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고상한 것들을 좋아하시는 이유로 자비를 들여서까지 많은 교수님들의 방을 멋진 그림으로 장식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교내 환경정리까지 하셨을 것이다.
스스로 팔불출(八不出)이라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아내 자랑, 자식 자랑에 신바람이 나신다. 아내에 대한 자랑보다는 딸들에 대한 자랑이 대부분이어서 처음엔 정말 팔불출인 줄 알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교수님의 팔불출 선언은 단순한 처자(妻子) 자랑이 아니라 처자 사랑의 표현이었다. 말뿐만 아니라 글로도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표현하셨는데, 1992년에 손수 발간하신 해학수필집『익살』이라는 책 안에 수록된 「안사람 이야기」와 「딸 이야기」 내용에 그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우리 학교의 많은 부분들이 변화되었다. 나 역시 예전의 학생에서 지금은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가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선생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부분에서 교수님을 존경하지만 특히 쉽고 재미있게 진행하는 강의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맨 처음 교단에 섰을 때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를 향해 몰려 있는 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김진악 교수님의 재치 있는 화술과 유머러스한 강의는 내가 교단에 있는 날까지 연구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즘 국문학과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보면 20세기의 교수님에 대한 기억과 21세기의 교수님은 크게 다름이 없다. 사랑방 할아버지 같은 외모와 뿔테안경, 옷장에 가득 걸려 있을 듯한 바바리코트, 그리고 빛 바랜 검정 가죽가방들은 20여 년 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유일하게 변한 것은 사진 모델의 선정기준이다. 요즘은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남학생도 찍어준다니 말이다.
교수님과 같은 사도(師道)로서 보산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면서 어느덧 교수님과 닮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말처럼 이제 나도 내리사랑을 실천할 때가 되었다. 요즘 교수님께서는 "이제껏 세상을 살다보니 나보다 못난 사람 없더라.”라는 말씀도 하신다. 항상 겸손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교수님의 가르침이리라. 학생에 대한 애정과 수업에 대한 열정, 학교 구성원간의 화합 등에서 이러한 선생님의 철학을 언제나 깨달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찬바람이 교정을 휘몰아치던 얼마 전, 도서관 4층에 자리하고 있는 박물관에 오르시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교수님은 계단 중간에 서서 가만히 숨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 단숨에 계단을 오르기에는 힘이 부치시는 모양이다. 약간은 어눌한 자세, 굵은 뿔테 안경, 색 바랜 검은 가방, 백발, 세련된 바바리 코트, 변함이 없는 목소리 등의 모습은 처음 학교에 출강하실 때와 전혀 변함이 없는데 어느덧 세월은 흘러 정년 퇴임을 하시다니… 선생님은 떠나셔도 그분의 흔적은 배재 곳곳에 남아 앞으로 닥쳐오는 시간들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교수님의 모습은 항상 내 마음속에 백발을 휘날리는 노신사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2. 중수필
경수필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정서적인 내용을 주로 담아내는 반면, 중수필은 사회적, 객관적, 논리적 내용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자신의 상상적 체험이나 우러나온 감정이나 인상에 끌리지 않고 객관적이며 논리적인 형식을 갖추어 서술해야 한다. 이러한 수필은 지적인 경향을 띠게 되며, 베이컨과 같은 철학자들이 주로 쓴다. 우리 나라의 수필가 중에서도 김진섭, 김태길, 김형석, 안병욱 등의 수필이 여기에 속한다. 다음은 역사학자인 토인비가 쓴 「역사에 있어서 현대의 위치」라는 수필의 일부이다.
여러 가지 특수 문명의 계속적인 확대로 인하여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의 전역은 이젠 하나의 큰 사회로 종합하게 되었고, 그 종합과정의 완성을 위한 운동은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의 근대적 확대인 것이다. 그러나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의 확대는 세계의 통합을 완료하여 가고 있다는 것뿐이지, 결코 그 이상의 것을 자아내는 동력은 되지 않았다. 둘째로 세계의 통합화는 궁극적으로 서구적인 구조 내에서 성취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계에서 현재 서구의 우세가 언제까지든지 영속하지 않을 것임은 확실하다.
하나가 되어 가는 세계에서 서구적인 문명 이외에 18개 문명―그 중 네 개 문명은 현존하고 있으며 14개 문명은 이미 사멸되었으나―은 다시 그 세력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통합되어 가는 하나의 세계는 여러 세대, 여러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인 이질적인 문화 사이의 균형 상태를 이룩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서구의 구성요소는 차차 정체될 것이고 그동안 서구사회는 근대적 확대를 통하여 제문화와 서로 접촉했는데―제문화 가운데는 사멸한 것과 현존한 것이 있다는데―그 본래의 가치에 머물러 있기가 일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최초로 해야 할 임무는 문명의 잔존 또는 사멸을 불문하고 이미 알고 있는 여러 문명의 역사 하나의 통일체로 제시하는 일일 것이다.
Ⅳ. 수필의 구성
수필은 무형식의 글이라 하여 구성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글은 특유의 구성 양식이 있게 마련이고 자기만의 구성법은 다른 이의 글과 구별하여 준다. 소재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는 글의 전체적인 내용을 구조화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 배열의 기술과 구조화 방식을 구성이라 할 수 있다. 한 편의 글을 이루는 요소들끼리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잘 짜여져야 좋은 글이 된다. 글이 이루어내는 완성도는 구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은 유기적인 조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여기서 유기성이란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성을 크게 전개식 구성과 종합적 구성으로 나눌 수 있다. 전개식 구성은 공간적 구성과 시간적 구성으로 나누고 종합적 구성은 단계식 구성, 포괄식 구성, 열거식 구성, 점층식 구성, 인과식 구성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된다. 또한 주제 문장의 위치에 따라서 나누기도 하는데, 주제가 앞에 있는 두괄식 구성, 주제가 끝에 있는 미괄식 구성, 주제가 앞과 뒤에 있는 양괄식 구성 등이 있다.
1. 전개식 구성
공간성을 가진 화제에 따라 글을 전개하는 공간적 구성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글을 전개하는 시간적 구성이 있다. 수필 중에서 특히 기행문은 공간적 구성의 좋은 예가 된다. 시간적 구성의 경우, 과거에서 현재로의 시간적 흐름을 택할 경우는 독자에게 쉽게 수용되지만,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의도적인 시간의 역행을 그리거나 시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서 긴장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2. 종합적 구성
1) 단계식 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3단 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모든 작품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데, 시작이란 그 앞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중간이란 그 앞에 반드시 무언가가 있고 그 뒤에도 무언가가 있어야 하며, 끝이란 그 앞에 반드시 무언가가 있고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시학』은 그리스 비극을 토대로 하여 문학의 모든 원리들을 밝히고 있지만 3단 구성은 단지 비극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수필을 포함한 모든 글에서 사용되는 기본적인 구성법이다.
■2) 포괄식 구성
글의 중심이 되는 주제나 결론이 글의 어느 부분에 있느냐에 따라 연역식, 귀납식, 수미상관식, 삼단논법식, 변증법적 구성 등으로 나눈다. 주제를 앞에서 강조한 후 자세한 내용을 부연하는 것을 연역식 구성이라 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을 서술하다가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제를 강조하는 것을 귀납식 구성이라 하며 이는 각각 두괄식 미괄식 구성법이라고도 한다.
주제를 글의 맨 앞과 뒤에 강조하여 두는 것은 양괄식 구성 또는 수미상관식 구성이라고 한다. 대전제와 소전제, 결론의 순서로 전개하는 삼단논법 구성은 논리전개의 가장 보편적인 구성법이며, 서로 모순되거나 무관한 두 논점을 지양 통일시켜 결론을 맺는 변증법적 구성도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3) 열거식 구성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나란히 대등한 관계로 늘어놓는 구성을 말한다. 대개 단락별로 주제가 들어 있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4) 점층식 구성
내용을 점점 고조시키는 글쓰기의 방법이다. 글이란 생각을 점점 깊이 있게 진행시키거나 사람과의 관계나 사건에 대해서 변화해 가는 양상을 다루기 마련이므로 점층식 구성 또한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5) 인과식 구성
논리적 인과관계에 의해 주제를 전달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글은 문장과 문장, 혹은 단락과 단락의 연결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논리적으로 연결이 잘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과관계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포스터가 『소설의 이론』에서 매우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즉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가 바로 인과관계인데,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도 죽었다'는 스토리이고, '왕이 죽었다. 그래서 왕비도 죽었다'는 플롯이 된다.
Ⅴ. 수필의 표현 방법
문장의 기술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고 어느 한 문장을 그 중의 어느 하나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설명
사물이나 사실, 현상, 사고 등을 알기 쉽게 풀이한 문장으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정의, 비교, 대조, 분류, 예시, 인용 등이 있다. 다음은 민태원의 「청춘예찬」으로 이러한 방법들을 이용하고 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소리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동하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였으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스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이 나고, 가지에 싹이 돋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 천지는 얼마나 깃거우며 얼마나 아릿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스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스한 봄바람을 불어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노을이 돋고, 열락의 새가 운다.
2. 논증
자신의 견해나 생각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서술방식으로 논증의 요건과 과정으로는 명제와 논거, 추론이 요구된다. 이양하의 「나무」는 '나무는 덕을 지녔다'라는 명제를 내건 다음 그에 대한 논거를 제시하는 방법을 통해서 논증의 과정을 보여준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 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 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3. 묘사
묘사는 언어로써 사물을 그려보이는 문장이다. 묘사와 서사는 문학적인 글에서 특히 중요하다. 다음은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중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의 첫 부분으로 강물이 움직이는 모습과 강물 소리를 뛰어난 글 솜씨로 묘사하고 있다.
강물이 두 산 사이에서 흘러 나와, 바위를 스치며 서로 휩쓸려, 물결이 꿈틀거리며 솟구치다가 여울로 흐르니, 그 움직임과 소리는 놀란 듯하기도 하고,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구슬픈 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달리는 소처럼 빨리 흐르며 부딪치다가 거꾸로 말리며, 목이 쉰 말의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고, 고함을 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물결은 만리장성을 짓눌러 부술 것처럼 힘차게 흐른다. 엄청나게 많은 전차가 구르는 소리나 수많은 군사가 말 타고 달리는 소리나 수많은 대포가 터지는 소리나 수많은 북이 울리는 소리도, 퉁탕거리며 무너져 쓰러지는 이 강물 소리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모래 위로 큰 바위가 우뚝 솟더니, 강 언덕으로 엄청나게 큰 버드나무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강은 땅 귀신과 강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하고, 여기저기서 이무기들이 붙들고 할퀴려고 하는 듯하다.
4. 서사
서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의 경과를 서술하는 기술방식이다. 서정범의 「나비이야기」의 앞부분은 이러한 사건의 흐름을 서사의 기법으로 기술한다.
옛날에 한 나이 어린 아가씨가 흰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흰 가마는 신랑이 죽고 없을 때 타는 가마다. 약혼을 한 후 결혼식을 올리기 전, 신랑이 죽은 것이다. 과부살이를 하러 흰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다. 시집에 가서는 보지도 못한 남편의 무덤에 가서 밤낮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래야만 열녀가 된다. 아씨가 흐느껴 울고 있는 밤중에, 신기하게 무덤이 갈라지더니, 아씨가 무덤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친정에서 함께 따라온 하녀가 이 광경을 보고 달려가, 아씨의 저고리 섶을 잡고 늘어졌다. 옷섶이 세모꼴로 찢어지며, 아씨는 무덤 속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갈라진 무덤이 합쳐졌다. 아씨를 잃은 하녀의 손에는 세모꼴로 찢어진 저고리 섶만이 남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찢어진 저고리 섶이 흰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흔히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장르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은 아니다. 인생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고, 그러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글만이 읽는 이에게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또 진정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쉽게 쓸 수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수필이 귀한 것은 진솔한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