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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能), 분라쿠(文樂), 가부키(歌舞伎)의 생성과정과 산악의 영향
일본의 전통 예술 중 노(能)와 분라쿠(文樂: 조루리 淨瑠璃), 가부키(歌舞伎)는 산악(散樂)이라는 종합예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합예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라(奈良)시대에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온 산악은 우리의 남사당과 비슷한 유랑 예인집단이 보여주던 여러 가지 볼거리 중 하나로, 궁중에서 행해지던 우아한 예능과는 반대로, 곡예.예술.가무 등 여러 가지 서민을 위한 대중적 예능을 통 털어 이르는 말이었다.
이 산악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곡예를 중심으로 하는 예능과 대사극을 중심으로 하는 예능으로 분화되었는데, 이 중에서 대사극을 중심으로 하는 예능이 연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 노와 교겐(狂言)의 모태가 되었다. 노와 교겐은 연극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유현미를 강조하는 느림의 미학(노)과 빠르고 재치있는 해학을 추구하는 등(교겐) 서로 상반된 길을 가지만 노의 공연 중간 중간에 교겐이 공연되는 등 마당을 공유하면서 서로 보완적 기능도 수행한다.
가부키와 분라쿠 역시 산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연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대사극의 요소가, 인형을 다루는 기예나 가부키의 기예적 요소는 곡예적 요소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산악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초기 가부키는 노와 교겐에 연결되어 있었음을 가부키의 희곡명 ‘가부키교겐’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나, 후기 가부키는 조루리의 기법과 극본을 끌어 들여 서로 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 노와 교겐, 가부키와 분라쿠가 모두 산악에 뿌리를 두고 상호 교류하면서 발전해온 그 증거라 하겠다.
이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노와 분라쿠, 가부키의 발달사를 살펴봄으로써 일본 전통예술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으며, 오늘날 그 생명을 유지해가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노의 발달과정
1)노(能)의 생성 발달 과정
이미 살펴본 바 있듯이 종합예능인 산악 중 대사극을 중심으로 하는 예능의 연극적인 요소가 노와 교겐의 모태가 되었는데, 같은 모태를 갖고 있지만 노는 가면을 쓰고 서정적인 대사와 노래를 반주에 맞추어 幽玄하게 전개하는 양식을 추구한 반면, 교겐은 일상적인 언어로 가볍고 즐겁게 웃음과 풍자를 추구하는 연극 양식으로 서로 다른 장으로 발달해가면서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같은 뿌리를 갖는 노와 교겐이 다른 방향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노는 대사극이 신사의 연중행사로 열리던 제사의식을 결합한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일종의 가면극인 노의 원류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이나 흉내내기로 이뤄진 사루가쿠(猿樂)로, 헤이안시대 중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고전적인 사루가쿠에 산악의 연극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대사극을 중심으로 하는 예능을 좀 더 고상하게 생각하는 풍조에 따라 이러한 대사극이 가미된 것만을 사루가쿠(猿樂)라 부르기 시작했고, 다시 여기에 신사 공양을 위한 신비적 요소나 신앙적 요소를 첨가되어 더욱 세련되어 후일 노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노의 귀족예술화 배경
같은 노라도 신사에서 공연되는 노의 경우 공연이라 하지 않고 공양이라 불렸으며, 신전을 향한 무대배치로 노의 신성성이 유지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루가쿠에 신사공양을 위한 신비적 요소 등이 첨가된 것과 함께, 또 다른 측면에서 위정자들의 후원이 뒤따르면서 노는 점차 귀족적인 예술로 바뀐다.
노의 원류인 사루가쿠는 중세이전까지는 농민 예능에서 출발한 덴가쿠(田樂)와 각각 다른 형태로 행해졌으나 카마쿠라 시대 후기에 서민들의 지지를 받아 직업적인 예술단체인 座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덴가쿠적 요소도 흡수하였으나, 점차 농민예능과는 거리가 먼 예술로 바뀐다.
座는 마을 단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라자(村座)라고도 불렸는데 신사나 절에 참배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면서 서민들의 인기를 얻어 몇 개의 座가가 생겨났고, 나라시대에는 나라와 교토 일대에서 사루가쿠를 연희하는 유랑집단 넷이 형성되면서 이들을 야마토사루가쿠사좌(大和猿樂四座)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 4좌중에서 간아미(觀阿彌)가 이끄는 야마토(大和)의 유자키자(結埼座)였다. 그리고 유자키좌의 좌장인 간아미는 사루카루와 덴가쿠의 장점을 종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노가쿠(能樂)를 만들었다. 간아미는 음악을 창작하고 전승설화를 엮어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갖고 기존 레파토리를 고치거나 다듬고 연출을 발전시켰는데 그 결과 사루가쿠가 본격적인 노로 성립된 것이다.
당시 최고권력자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역시 노에 심취해 있었는데 1374년 쇼군은 교토시내의 이마쿠마노(今能野)의 신사에 노 무대를 꾸미고 간아미에게 공연을 하도록 했다. 이 무대에서 10세의 미소년인 간아미의 아들 제아미가 쇼군의 눈에 들었고 쇼군의 강력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
간아미의 아들 제아미(世阿彌)는 노를 흉내의 재미만이 아닌 幽玄미를 겸비한 무대예술로 완비시킴으로써 전란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노를 통해 속세의 걱정을 잊고 잠시나마 우아하고 운치있는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쇼군의 후원아래 제아미 부자는 재정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이때부터 노의 감상자는 주로 상류계층이 되었고 노도 귀족적인 취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를 계기로 노는 당시 상류사회의 이상적 교양이라 할 수 있는 불교의 선과 문학의 連歌 등을 접하면서 그 정신이 배어들게 되는데, 제아미는 [하나(花)]라는 심미이론을 노에 적용하게 된다. “하나”(꽃)란 글자 그대로 “꽃처럼 아름다운 것, 즉 가장 매력적인 연출 또는 배우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연기“를 비유하는 말이다. 배우, 작가, 연출가이며 동시에 노의 이론가였던 제아미는 ”하나 이론“을 정리한 [후시카덴(風姿花傳)], [사루가쿠단기(申樂談儀)] 등 20여편의 저술을 남겼고, 그의 노에 관한 독특한 예술론을 [노가쿠론[能樂論)]이라고 한다.
제아미 이후 유자키좌는 고급무사계층의 후원을 100년 가까이 받아왔으며, 무사계층과 지방귀족 계층의 비호아래 무대 예술인 노와 교겐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에도 막부를 열게 되고 사회도 안정을 되찾는다. 노 배우들도 새로운 활력이 넘치는 에도로 몰려들고 노의 무대도 교토에서 에도로 옮겨지는데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적극적인 후원에 나서면서 노를 쇼군가의 정식 의례용 음악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4좌 이외의 집단을 인정하던 전통을 깨고 새로운 유파가 생겨나기도 했다. 새로운 유파인 기타류(嘉多流)의 시조인 기타시치다유는 원래 노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나 어려서부터 노를 배워 쇼군이 감상하는 무대에 설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연출하는 노의 신선함에 반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후원자가 되면서 새로운 유파인 기타류를 허가 하게 되어 이때부터 [4좌1류]가 형성되어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3)노의 서민예술화 과정
에도 막부 이전인 1467년부터 시작된 오닌(應仁)의 난(1467~1477)이후 계속되는 전쟁으로 쇼군의 지위가 약화되면서 쇼군의 지원이 점차 약화되었다. 쇼군이나 지방귀족들의 후원이 끊기면서 노는 대중을 관객으로 하는 흥행업에 나서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상류층의 예술에서 서민대중의 예술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귀족들만이 즐기던 노를 일반 서민들이 감상할 수 있게 된 시기는 에도시대 초기였다.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병이 들었다는 소문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막부는 소문을 부인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에도 시내에 시민을 초청하여 노를 공연하면서 그 자리에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출석한 것이다.
이후 막부의 허가를 얻어 사찰이나 불상건립, 수리비용을 모으기 위한 간진노(勸進能)를 공연했는데 광장에 울타리를 치고 입장권을 파는 방식의 야외극장 공연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이전에는 신사나 절의 경내에 설치하여 신을 관객으로 하던 공양방식에서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야외공연방식으로, 그리고 여기서 더욱 발전하여 일반관객을 위한 실내공연방식으로 전개되어간다. 이 노가쿠도(能樂堂)는 무대와 통로, 관객석 모두 실내에 설치되는데, 혼부타이(本舞臺)라고 불리는 무대중앙에는 정면에 큰 소나무가 배치되고 왼쪽에는 작은 소나무 세 그루가 배치되는 등 야외공연의 흔적이 남아있다. 연주악사가 위치하는 아토자(後座), 배경음악 담당악사가 위치하는 지우타이자(地謠座), 그리고 통로이자 무대일부인 하시가카리(橋掛り)가 설치된다.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노가 공연되면서 이전의 노에 비해 다소 흐름이 빨라지고 과장적 표현을 쓰는 노는 후일 가부키와도 맥이 닿게 된다.
무로마치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막부나 무사들의 후원아래 의식용 예능을 연희하면서 녹봉으로 살아왔으나 막부가 해체되면서 노에 대한 후원도 일시에 끊겼을 뿡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에 맞지 않는 구시대의 예능이라 하여 괜객마저 끊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전통문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노의 공연이 근근히 이어졌고 학문적 연구 분위기도 싹텄다. 전쟁기에 또 한 번 쇠퇴기를 맞기도 했으나 전후 일본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노는 훌륭한 공연예술이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독특한 문화라는 점이 인정되어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는 노가쿠(能樂)라고도 하는 일본 전통 가면무극의 한 장르로 야외 가무극이었으나 지금은 전용극장인 노가쿠도(能樂堂)를 가지고 있으며, 전문배우를 노가쿠시(能樂師)라고 하는 전문 극예술로 자리 잡고 있다. 가면을 쓰고 연기하며 느린 음악에 맞추어 幽玄하게 연기하기 때문에 답답할 정도로 느린 대사와 동작, 느린 박자의 음악이 답답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대 연극 감상과 다른 점은 이야기의 전개나 극의 진행보다는 노의 양식미라 할 수 있는 시공을 초월한 현실과 신.영혼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고뇌와 이상을 유장한 노래와 춤, 동작으로 전개하는 과정의 맛이라 하겠다.
3.분라쿠의 발달과정
1)조루리에서 닌교조루리로
에도시대부터 시작된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는 인형극과 음악이 결합된 세련된 인형극으로서 분라쿠(文樂)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조루리란 장편의 서사시를 말하는데, 원래는 우시와가마루(牛若丸)와 조루리히메(淨瑠璃姬)의 사랑을 그린 [조루리히메모노가타리(淨瑠璃姬物語)]를 구연하는 가락(節, 후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닌교조루리가 성립되기 전에는 조루리가 따로 행해졌다. 처음엔 맹인연주가인 자토(座頭)가 비파나 쥘부채로 박자를 맞추어 이야기를 구연하던 것인데, 조주리를 부르며 유랑하는 예능인들을 다유(太夫)라고 했다. 조루리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자 레파토리가 늘어났고 연희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다유가 부르는 조루리만 감상하던 방식에 조루리에 맞춰 진행되는 인형의 연기가 추가되고 중세 후기에 류쿠(琉球)에서 건너온 샤미센이라는 악기 반주가 더해지고 그 위에 인형의 조종술이 결합되어 근세초기에는 조루리, 사미센, 인형으로 이뤄진 닌교조루리가 성립된 것이다. 닌교조루리는 이전의 인형극이나 조루리와는 전혀 다른 형식이 되었다.
초기에는 각지에 다양한 유파의 가락이 있었는데, 전국 시대의 기운이 남아있던 에도에서는 용맹성을 강조하는 강하고 활발한 긴피라부시(金平節)가 환영을 받았고 전통문화의 중심지인 교토에서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타유부시(嘉太夫節)가 인기를 끌었으나 17세기 후반 오사카에서 다케모토 기타유(竹本義太夫)라는 다유의 명인이 나타나 극단 다케모토좌(竹本座)를 만들고 전속 작가로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을 맞아들여 1685년 [슛세카게키요(出世景淸)]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의 성공은 조루리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 작품 이전의 조루리를 古조루리, 이후를 新조루리로 부른다.
다케모토좌에 있던 도요타케 와카다유(豊竹若太夫)가 독립하여 오사카에 토요타케좌를 만들고 기노 가이온(紀海音)을 전속작가로 영입한 이후 양 좌의 경쟁으로 각본, 인형, 장치 등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조루리가 가부키를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케모토좌의 전속작가였던 지카마쓰는 시대물과 세속물을 썼는데, 특히 그의 세속물의 테마는 서민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일상을 다루면서 형식 또한 서민적이어서 인기를 끌었던 반면, 가이온은 의리에 중점을 두어 서정성은 부족했으나 변화무쌍한 사건 전개의 묘미를 느끼에 했다. 지까마쓰와 가이온 같은 핵심적 작가가 없었던 극단들은 다케다 이즈모를 중심으로 한 몇몇 작가들의 합작품으로 경쟁에 끼어들었고 자카마쓰와 가이온 사후에도 한동안 조루리의 전례없는 흥행이 계속되었다.
2)닌교조루리의 쇠퇴와 분라쿠로의 발전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면서 닌교조루리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18세기 중반에는 지나치게 시각적인 무대효과에만 치우쳤고 작가의 성실성도 결여되어 인간성을 중시하는 시각마져 사라져 간 결과 가부키에 인기를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인기를 잃은 조루리는 19세기초 조루리의 명인인 우에무라 분라쿠겐(植忖 文樂軒)에 의해 부흥되었다. 분라쿠겐이 오사카에 세운 인형극단을 세운 뒤 1872년 그의 문하생들은 인형극 전용극장을 개설하고 스승의 이름을 따 분라쿠좌라고 했다. 분라쿠좌는 군소극단의 난립을 평정함으로써 닌교 조루리를 분라쿠라고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분라쿠 무대에는 인형과 인형조종자, 대사와 극의 내용을 노래로 전달하는 다유, 샤미센으로 다유의 노래 반주와 배경 음악을 연주하는 샤미센 히키가 등장한다. 무대 중앙에는 배경과 대도구가 설치되어 인형조종자들이 연형을 조종하는 곳이다. 무대 오른 쪽에는 유카라는 회전무대가 있어 다유와 샤미센히키가 앉는다.
분라쿠의 장르는 시대물, 세속물, 무용극 등으로 분류된다. 시대물은 주로 신화시대를 비롯한 에도시대 이전까지의 배경으로 일어난 귀족과 무사들 사이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쇼군가를 소재로 하는 작품과 정치적 사건을 각본화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관객들은 당대의 무사들 사이의 사건을 극화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실제 인물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시대 배경을 그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나 무로마치 시대로 설정한 작품을 쓰게 된 것이다.
세속물은 17세기 후반에 발생되어 그 시대 서민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다른 극이다. 자칫 어린이 상대 극으로 전락하기 쉬운 인형극을 성인관객에 맞도록 만들어진 인형극이므로 정사사건이나 치정사건을 시사성있게 다룬다. 세속물의 또 다른 주제는 의리와 인정의 묘사였는데 인기 씨름꾼인 스모토리(相僕取り)나 협객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19세기초에는 서민중에서도 하층민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4. 가부키(歌舞伎)의 발달과정
1)오쿠니가부키에서 온나가부키로의 전개
가부키는 노래와 춤, 기예로 이뤄진 종합연극이며, 노, 분라쿠와 더불어 일본의 전통 무대예술이다. 가부키라는 말은 원래 가부쿠(傾く), 즉 “한쪽으로 기울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며 눈에 띄게 특이한 모습, 우스꽝스러움, 멋대로의 행동, 호색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든 정상적인 궤도로부터 벗어난 행동풍조는 16세기말 젊은이와 호사가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쳤고 생활이나 예술에도 반영되었다.
가부키는 음악과 춤이 중심이 되는 일종의 무용극이다. 중세의 오랜 전란에 시달리다가 근세의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사람들이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화려한 춤과 노래로 엮어낸 무용극이다. 가부키의 시조는 이즈모(出雲)지방 출신 무녀 오쿠니(阿國)라고 한다. 3년 오쿠니는 신사인 이즈모대사(出雲大社)의 중수를 위한 순회모금 행사에서 염불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이 가부키의 모태가 된 오쿠니가부키(阿國歌舞伎)이다.
종교적 목적의 춤이었음에도 대 성공을 거두게 된 배경은 당시 불교의 규율 때문에 여자가 대중적인 무대에 서는 것이 금기시됐던 상황에서 미녀들의 가무가 인기를 끌었다는 점과 그 내용도 색달랐다는 점이다. 오쿠니는 노래와 춤뿐이 아니라 남장을 하고 남자들이 술집에 드나드는 장면, 작부들과 놀아나는 장면을 연기했다. 그 당시 이국적인 악기인 샤미센을 들고 서영 남자들이 입는 양복바지를 입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칼을 찬 채 등장하는 연기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오쿠니의 인기덕에 많은 여성중심 극단이 생겨났는데 이들의 공연을 이후의 남성들이 행하는 가부키와 비교하여 온나가부키(女方歌舞伎)라고 부른다. 이들 가부키를 공연하는 여성들이 유녀가 많았기 때문에 유녀가부키(遊女歌舞伎)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매춘을 겸하는 등 풍속사건을 일으킴에 따라 1629년 가부키금지령이 내려졌고 여성이 가부키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부키 금지로 인한 종사자들의 생계유지 문제가 대두되고 가부키 애호가들의 요청도 쇄도하여 남자 배우만 무대에 오르는 조건으로 가부키가 허용되었다. 이때부터 미소년들이 여성 배역으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와카슈가부키(若衆歌舞伎)라는 명칭이 붙게 되는데, 이들 미소년 역시 남색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온나가부키에서와 비슷한 문제가 제기되고 또 다시 1652년 가부키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1차 금지령이후와 유사한 이유 때문에 1653년 가부키는 다시 허용되는데, 이때 소년 차림의 금지, 인간사를 흉내내는 연기 등을 할 것 등의 조건이 부과되었다.
2)가부키의 발전과 쇠퇴과정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가부키는 더 장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다막극(多幕劇)의 창작, 하나미치(花道)라는 새로운 무대 양식의 창작 등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남자들만으로 공연하게 된 가부키의 특성상 여자배역을 맡는 배우의 역할을 하는 온나가타(女方)가 중요시되는 특별한 연출법이 발달하게 된다. 이후 17세기말 가부키의 발달기를 맞게 된다.
가미카타와 에도에 상설극장이 마련되고 가미카타에서는 사카다도주로(坂田藤十郞)에 의해 와사(和事)가 주로 올려졌다. 남녀간의 사랑과 같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며 여성취향의 연기와 연출이 성행했다. 반면 무사의 도시인 에도에서는 초대 이치가와단주로(市川團十郞)가 호쾌하고 거친 남성적 인물을 그렸다. 이렇게 양대 도시를 중심으로 和事와 아라고토(荒事)의 대조적인 가부키 전통을 세웠으나 18세기 중반까지는 조루리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이후 나미키쇼산(並木正三)이 조루리의 무대장치 기법을 도입하고 닌교조루리의 인기작품들을 가부키가 각색하여 레파토리도 확대해가면서 조루리와의 경쟁력을 확보해간반면, 18세기 후반 조루리가 쇠퇴하면서 가부키는 오히려 세를 회복해가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난숙기를 맞이하는데, 이시대는 변화를 강조하는 시대적 요청이 반영되었으나, 특히 퇴폐적 분위기가 지배하면서 쓰루야 난보쿠(鶴尾南北) 등의 잔인한 살인장면과 선정적 정사장면을 위주로 하는 통속적 세속물이 유행했다. 난보쿠 사후 총체적 쇠퇴기를 맞이했으나 가와타케 모쿠아미(河竹黙阿彌)에 의해 에도 가부키가 집대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도둑이 들끓는 사회상을 반영하여 당시 유명한 도둑인 하쿠엔(佰円)의 이름을 딴 마쓰바야시 하쿠엔(松林佰円)의 시라나미모노(白郞物)이 유행했다. 메이지 시대에후에는 서양의 연극기법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4. 노, 가부키, 분라쿠에 있어 교겐(狂言)의 역할
노와 가부키, 분라쿠(조루리)는 모두 연극적 요소를 공통점으로 갖는 전통 무희극이다. 노와 분라쿠, 가부키 모두 연극이라는 점 외에도 그 배우나 출연자가 본 얼굴이 아닌 가면이나 인형, 구마도리를 이용한 가식된 모습으로 연기를 한다. 노래와 춤, 음악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뮤지컬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탄생된 시기가 비슷하고 그 뿌리를 산악에 두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대물, 세속물이 생겨난 시대와 배경도 비슷하며 대표적인 작품은 서로 공유되는 경향이 있다.
가부키의 초기 형태중 하나인 와카슈가부키의 내용은 중세로부터 전해오던 가면극 노와 희극인 교겐을 각색하여 연출했기 때문에 그 뿌리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산악이라는 같은 모태를 갖고 있지만 노는 가면을 쓰고 서정적인 대사와 노래를 반주에 맞추어 幽玄하게 전개하는 양식을 추구한 반면, 교겐은 일상적인 언어로 가볍고 즐겁게 웃음과 풍자를 추구하는 연극 양식으로 서로 다른 장으로 발달해가면서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가부키는 구마도리 화장을 통해 얼굴을 가린다거나 하는 면에서 노에 가깝지만, 그 내용이나 전개 방식은 서민극 위주의 교겐을 더 닮은 듯하다.
교겐은 노, 가부키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노와 가부키의 연결고리를 교겐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겐(狂言)은 글자 그대로 미친 사람의 말, 즉 허튼 소리라는 뜻으로 불교 용어인 광언기어(狂言綺語)의 준 말로 “거짓을 보태어 꾸며서 그럴 듯하게 하는 이야기”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상식의 궤도를 벗어난 이야기 또는 우스갯 소리라는 뜻을 내포하는 골계와 풍자를 특징으로 삼는 연극 장르를 말하기도 한다.노는 가면을 쓰고 음악과 춤과 대사로 엮는 뮤지컬이나 교겐은 순수한 대사극으로서 모두 같은 산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노와 교겐의 대본인 요코쿠(謠曲)를 문학적으로 보면 표현의 대부분이 고전적인 와카(和歌)나 유명한 시구 등을 본문 대사 속에 도입함으로써 우아함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가부키의 희곡을 의미하는 용어도 교겐이라고 한다. 가부키의 희곡은 원래 가부키교겐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는 교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연극의 종류인 교겐과 같은 말이다.
초기 가부키가 노나 교겐과 비슷했다면 후기 가부키의 경우는 조루리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조루리는 노나 교겐에 비해 더욱 종합예술적인 요소가 강했고 가부키 역시 후기로 가면서 종합예술적 요소를 추가시켜나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부키가 닌교조루리의 무대장치 기법을 도입하고 그 인기작품들을 각색하여 레파토리도 확대해가면서 조루리적 요소도 상당부분 공유해가면서 상호경쟁과 통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노, 조루리, 가부키 등 일본의 전통적 종합예술 중에서 노가 주로 상류 계층의 비호를 받으면서 발전해왔다면 가부키, 조루리는 서민적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해온 예능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은 노가 종교적 의식으로서 사용된 초기 역사를 갖고 있음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연극적 뿌리를 강하게 갖고 있는 일본의 종합전통예술들은 메이지 시대에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근대화를 추구하는 메이지 유신 자체가 일본적인 것을 고루한 것으로 생각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전통을 계승하고 배우려는 열의가 있었고 현대 서양 연극까지 흡수해 접목해가는 유연성이 오늘날 노, 분라쿠, 가부키 등 일본의 전통 종합예술들이 새롭게 세계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2006.4.16. 방송대 일본학과에 제출한 레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