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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54. [역경의 열매] 최철희 (1-15) 예순 넘어 얻은 사명 “준비된 시니어를 훈련시켜라”
2009년 10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내가 속해 있는 WEC국제선교회의 아시아지역 총회가 개최됐다. 몸과 마음이 많이 피곤했다. 기도 시간 중이었는데 갑자기 마음에서 한 음성이 들렸다. “나는 아직도 너를 훈련시키고 있다.”
깜짝 놀란 나는 기도했다. “훈련이라뇨? 아니 60이 넘은 나이에 무슨 훈련인가요? 그리고 선교 단체 본부장을 한 번 했으면 됐지 또 무슨 일이 있어서 훈련 중이라고 하십니까?”
어떤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주님은 그렇게 내게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을 어렴풋한 여운으로 남기셨다. 2년 후인 올 3월, WEC국제선교회 한국본부 본부장 이·취임식이 열리는 시간. 나는 그날 조금 앞선 시간에 시니어선교한국 제3회 선교대회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발대식에 참여했다. 단 하루 차이도 없이 나의 사역 활동이 옮겨진 날이었다. 주님의 계획은 마침표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마치 쉼표만 찍고 다음 일을 시작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오래전부터 시니어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 역시 50대 중반에 시니어 선교사로 일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 내게 말을 했다.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왜 그리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 말이다. 납득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사실 한국교회 안에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시니어 자원이 풍부하다. 이들은 80년대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들이며 교회 성장의 주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세대들이 은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좋은 자원들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선교에 쓰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였고 부담감이었다.
내가 속해 있는 WEC선교회에도 대여섯 가정의 한국인 시니어 선교사들이 있다. 어떤 이는 치과 의사와 은행원, 대기업 임원, 사업가로 일했지만 시니어 선교사가 된 이후 각자 선교지에서 기쁜 마음으로 활동 중이다.
국제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맞물려 선교지 상황은 나날이 변화되고 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평신도 전문인, 혹은 비즈니스를 통한 선교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한국본부에서 일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사회 각처에서 경험한 자신의 전문성과 지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 이 시니어 자원을 선교지에 이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등을 고민했다. 그때 나와 똑같은 견해를 가진 한 분을 만났다. 유엔대사를 지내신 이시영 장로님이다. 그와의 만남은 평소 가졌던 생각들을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데 큰 동기가 됐다. 이는 ㈔시니어선교한국과 동역하게 된 첫걸음이기도 했다.
얼마 전 시니어선교한국 안에 ‘이모작 선교 네트워크’라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시니어 선교사 지망생들을 상담하고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선교 단체와 선교지에 연결해주는 일을 맡고 있다. 요즘 준비된 시니어들이 사무실을 찾고 있다. 이들과 만나는 것이 즐겁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닫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생활과 선교사 경험이 이 일을 위한 훈련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님의 음성은 이렇게 구체화됐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최철희 (1) 예순 넘어 얻은 사명 "준비된 시니어를 훈련시켜라"
* [역경의 열매] 최철희 (2) 맏며느리 아내의 ‘홀로 믿음’이 시어머니에까지
* [역경의 열매] 최철희 (3) 12년 아내의 간절한 기도로 ‘장로’ 직분 올라
* [역경의 열매] 최철희 (4) 혹독했던 유학생활… 시련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 [역경의 열매] 최철희 (5) 주님이 선물한 300달러 짜리 ‘기도로 가는 차’
* [역경의 열매] 최철희 (6) 구소련 방문길에 성경 전달… 알고보니 KGB 요원
* [역경의 열매] 최철희 (7) 소련선교회 일 도우며 ‘선교의 꿈’도 무럭무럭
* [역경의 열매] 최철희 (8) 감비아서 온 선교사 “WEC 한국본부 설립합시다”
* [역경의 열매] 최철희 (9) 내 인생의 이정표를 확 바꾼 두번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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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최철희 (14) 성도 1명 없던 ‘천사마을’ 1년새 22명으로
* [역경의 열매] 최철희 (15·끝) 선교본부 사역 맡으며 ‘청지기의 삶’ 깨달아
◇약력=서울대 전기공학과, 뉴욕주립대 경영대학원(MBA). 한국산업은행, 삼성그룹 비서실 근무. ㈜한성기업 사장. 중앙아시아 선교사, WEC국제선교회 한국본부장. 현 시니어선교한국 이모작 선교네트워크 사역. 서울 대치동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최철희 (2) 맏며느리 아내의 ‘홀로 믿음’이 시어머니에까지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을 때 친가는 물론 외가나 처가 누구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다. 불교와 유교가 혼합된 한국의 전형적인 전통 가정에서 부모님의 기대에 큰 거슬림 없이 자라났다. 그런데 아내가 느닷없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겐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내에겐 특별한 동기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마음의 안정과 도덕적인 건전함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내의 교회 출석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아내가 웃음을 찾고 활기차게 다니는 모습이 오히려 좋아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집안의 중심이 되어 제사를 맡아야 할 장손, 맏며느리가 교회를 나가다니! 부모님의 진노는 대단했다. 나는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때여서 매일 회사 일로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예수 믿는 며느리는 용납할 수 없다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내는 금방 교회 발걸음을 끊을 줄 알았는데 웬걸,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새벽기도까지 다니며 더 열심을 냈다.
제사 때가 되면 어머니가 던져주는 마늘을 까면서 제사음식도 못 만지게 하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아내는 굽히는 기색 하나 없이 씩씩하게 교회를 다녔다. 두 사람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나는 고민했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평소 MBA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결정에 의아해 했다. 어떻게 이 일을 그들에게 다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새벽기도에서 돌아온 아내는 어느 날 물었다. “여보, 버펄로라는 곳에 혹시 원서 넣었나요?” “음, 학비가 동부에서 제일 싸서 한 번 넣어 봤지. 만약 된다면 우리 형편에 그곳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늦게 보내서 좀 힘들 것 같아.” “버펄로는 미네소타 주에 있나요?” “아니, 뉴욕 주에 있지. 그런데 왜 그래?”
당시 내 누님이 미네소타 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내가 미네소타와 시카고 주변 학교에 원서를 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버펄로가 뉴욕 주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내가 왜 그곳을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기왕 입학허가를 기다린다면 끝까지 기다려 보자고 우겼다. 6월에는 비자 신청을 해야 했기에 5월 말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내는 금식까지 하고 있었다. 다른 몇 군데 학교에서는 입학허가가 왔지만 버펄로 뉴욕주립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마침내 5월 30일 입학허가서가 도착했다. 아내의 얼굴은 일순간 밝아졌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모양이다.
좋은 직장 그만두고 예수쟁이 마누라 데리고 유학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고 힘들었을까? 맏며느리의 신앙을 바꿔보려는 어머니의 끈질긴 시도를 뒤로하고 나는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 둘을 데리고 1981년 버펄로로 향했다. 유학을 마치고 2년 뒤 귀국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마저 교회에 다니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으셨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돌아오셨다.
“내가 절에 나가도 다 너희들 위해서였지 날 위해서였겠냐? 나도 너희들 따라 하나님 믿고 교회 나갈 거다. 그래서 지난번에 절에 가서 부처님께 죄송하다고 마지막 인사하고 왔다.”
어머니는 예수를 영접한 지 10년 만에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간암으로 투병하시면서도 자녀들을 위해 밤마다 기도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3) 12년 아내의 간절한 기도로 ‘장로’ 직분 올라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거의 마친 1981년 어느 날, 저녁 예배에 가려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도 교회에 한 번 가 볼까?” 아내의 눈이 똥그래졌다.
교회라고는 중학교 때 친구 정학성(현 서울대 교수)을 따라 딱 한 번 간 적이 있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어디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으셨다. “교회요.” “교회? 교회는 나가지 마라.” 단호한 아버지 말씀을 그 때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내더러 교회를 가자고 하다니! 그것도 아내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집안이 난리가 났는데 교회를 가 보자고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아내가 좋아서 다니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성령의 강권하심이 내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내가 그토록 열심히 다닌 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저녁 예배 시간.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 틈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설교를 마친 조용기 목사는 잠시 눈을 감으라 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실 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주위의 몇 사람이 의자를 삐거덕거리며 일어났지만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교회 구경 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잠시 후 다시 조 목사는 말했다.
“일어나지 않은 사람 가운데 12명 정도 더 일어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기회는 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일어나십시오.”
그래도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곁에 있던 아내가 내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나는 스프링 튕기듯 그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일어났는지 잘 몰랐지만 다시 앉기도 민망해 목사님이 하는 결단의 기도를 따라 하고 말았다.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단순히 순서에 따라 일어나야 하는 건 줄 알고 일어났다가 결신 기도를 따라 한 것이다.
“이건 사기야. 이런 식의 공갈에 내가 넘어가다니! 조 목사는 늘 그런 식으로 교인을 끌어 모으나?” “아니에요. 목사님이 두 번씩이나 그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건 처음이었어요.”
아내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아내에게 조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모두 가져오라고 해서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끝 부분만 들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결단시키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느덧 나도 모르게 말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즈음 부산에 있던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명이 급성 B형 간염으로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보름이 고비라고 했다. 아내가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똑같은 B형 간염에 걸린 자매가 치유 받았다는 간증이 실려 있었다. “다른 신문도 있소?” 아내가 가져온 신문 간증 코너를 모두 읽었다. 친구의 병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재와 은혜 속으로 빠져들었다. 금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남자 구역예배도 기다려졌다. 그날만큼은 어떤 일도 모두 미뤘다. 구역 모임에는 은행원, 사업가, 쌀집 아저씨, 빵집 아저씨, 부동산 아저씨도 있었다. 사회에서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엉뚱한 질문에 웃고 떠들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자원하여 세례를 받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내는 나를 위해 기도할 때 처음부터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신실한 장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단다. 아내의 기도 응답으로 나는 예수 믿고 12년 후 장로가 됐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4) 혹독했던 유학생활… 시련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유학생활을 하던 버펄로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는 곳이다. 캐나다와 인접한 국경 도시라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2차대전 때 지은 아파트라 벽이 얇고,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매서웠다.
마룻바닥 틈새로 지하실의 차가운 공기가 올라왔다. 한겨울엔 카펫 없이 버텨낼 수 없을 정도였다. 얼핏 가게에 써 붙인 카펫 가격을 계산해 보니 한 달 생활비를 훨씬 넘었다. 갑자기 결정한 유학이라 경제적 준비가 충분치 않아 어려움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모텔 하시는 분을 알게 되어 침대 대신 식구 수대로 중고 매트리스를 얻어놓았다. 그처럼 많은 돈을 들여 카펫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는 집 근처에서 큰 쓰레기 봉지와 함께 둘둘 말려 있는 노란색 카펫을 발견했다. 카펫이 워낙 커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조각 카펫을 마룻바닥에 모자이크하듯 깔았다. 또 중고품 세일에서 3달러를 주고 수동식 청소기도 샀다. 자루가 없어 몸통으로만 밀고 다니는 고물이었지만 아내는 돈 벌었다고 자랑했다.
난방비도 엄청 들어갔다. 생각 끝에 우리는 방 한 칸에서 지냈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와 방을 함께 쓴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좋아했다. 우리는 한 방에 매트리스 네 개를 나란히 깔고 창문은 물론 벽까지 비닐을 덧붙였다. 비싼 의료보험료 때문에 병원 가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 마침 고교 선배 의사가 세 분이나 있어 우리 가족을 보살펴 주셨다. 그들은 우리를 만난 이후 뒤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해 지금은 모두 장로님이 됐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끝없이 다가왔다. 생활비가 거의 바닥이 날 즈음 내 가까운 친구중 하나가 한국에서 뉴욕에 왔다가 짬을 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원양어업회사를 경영하는 친구였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눈에 짐작한 친구는 버펄로를 떠나면서 자기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내놓았다. 실은 그때 우리 통장에는 보름치 생활비밖에는 없었다. 훗날 나는 그의 회사에 입사하여 결국 사장까지 됐다.
현관 앞에 이따금 몰래 장을 봐다 주는 마음 따뜻한 분도 있었다. 그가 내 선배이며 내과의사인 장한교 선생의 부인 유 권사님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으나 일부러 묻지 않았다. 그분에게도 하나님께서 남몰래 주시는 기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유 권사님은 우리가 떠나올 때 아내에게 검정색 가죽 장갑을 선물해 주었다. 아내는 그 장갑을 무려 25년이나 애지중지 끼고 다녔다. 다른 물건은 잘 잃어버리는 아내도 그 장갑만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다.
25년 후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유 권사님에게 가죽 장갑을 보여드렸다. “이것, 권사님께서 주신 장갑이에요.” 그런데 권사님은 놀랍게도 똑같은 새 검정색 가죽 장갑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앞으로 또 25년, 유 권사님 사랑 기억하면서 잘 끼겠습니다.”
나는 공대를 나왔기 때문에 경영학 공부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내게 가난한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참으로 광야와 같은 곳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의존했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체험을 많이 했다. 행복과 소유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그때 삶을 통해 배웠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버펄로에서의 신앙 훈련과 가난 훈련은 훗날 내가 선교사로서 받아야 할 훈련을 미리 받은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5) 주님이 선물한 300달러 짜리 ‘기도로 가는 차’
미국에서 차 없이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유학 시절 중고차 한 대를 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어느 날 함께 공부하던 한 유학생이 꿈 얘기를 했다.
“형님, 어제 형님이 300달러짜리 차를 사는 꿈을 꾸었어요. 파란색 차였어요.” “300달러짜리? 야 그런 차가 어디 있겠노?”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다른 유학생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님, 차를 구하고 계시죠? 한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이 있는데 차를 판다고 합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350달러라고 했다. 그것도 파란색이란다.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차인가 봐요.” 아내가 끼어들면서 구입하자고 했다. 대신 300달러에 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우린 그 차를 사게 됐다. 집에 끌고 온 차는 생각보다 훨씬 더 고물이었다. 처음 본 순간 거대한 탱크 같다고 느꼈다. 13년 된 파란색 8기통 ‘플리모스’라는 차였다. 주행거리를 알리는 계기판은 몇 번이나 돌아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버펄로의 잦은 눈 때문에 뿌리는 염화칼슘으로 차 하부 쪽은 삭아서 너덜거렸다.
‘빠데 붙인다’는 말이 있다. 차 몸통의 구멍 난 부분을 다른 천이나 철판 조각으로 땜질을 하고 그 위에 덧칠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차는 한두 번 덧칠한 게 아니라 몇 번씩 덧바르고 칠한 것 같았다.
어느 날 청소하려고 운전석 아래 발판을 걷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두 개나 뻥 뚫려 있었고 땅바닥이 훤히 보였다. 차를 타고 가면 옆에 가던 차들은 행여나 부딪칠까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신호 대기를 위해 차를 멈추면 시동 꺼지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뒤에 오던 차가 빵빵거리면 뒷자리에 앉은 두 아들은 기도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듯 신기하게 다시 시동이 걸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 차를 ‘기도로 가는 차’라 불렀다. 그래도 유용했다. 어려운 유학생들을 위해 공항, 마켓, 교회, 학교로 많이 실어 날라 주었던 고마운 차였다.
학업을 마친 1983년 잠시 로스앤젤레스에 살 때다. 내 차를 물려받아 쓰고 있던 제주도 출신 유학생이 전화를 했다. “형님, 200달러를 보내겠습니다.” “웬 200달러?” 그의 말은 어느 날 다른 차가 와서 상가 앞에 세워둔 자기 차를 받았다는 것이다. 수리비로 400달러를 받았는데 수리할 가치도 없는 차니 절반은 우리에게 보내주겠다는 거였다.
“정말 고마운 차네. 돈까지 벌어 주고.” 나는 후배에게 200달러는 교회에 차량 헌금으로 드리라고 부탁했다.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 준 그 차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세상 어떤 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그 고물 차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버펄로에서 우리는 개척교회를 다녔다. 내가 은혜 받을 때 깨달은 복음은 수학 공식보다 더 확실하고 명료했다. 기도하면 즉시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었다.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났다. 누구에게든 이 확실한 하나님의 존재와 명료한 복음을 전해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가 됐다.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하든 결국에는 예수님 이야기로 돌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찌나 전도를 열심히 했던지 학교 도서관에 들어오면 슬그머니 달아나는 학생도 있었다.
당시 개척교회에 동참하면서 전도한 사람들 중에는 지금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도 계시고 장로님도 여러 분 계신다. 하나님은 그런 대어(?)들을 낚게 하셨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6) 구소련 방문길에 성경 전달… 알고보니 KGB 요원
유학을 마치고 내가 들어간 한성기업㈜은 수산식품 회사였다. 원양어업을 하는 회사라 해외 출장이 많았다. 1987년쯤 알래스카 근해에서 조업하던 우리 회사의 배 두 척이 미국 정부의 외국어선 축출 정책으로 철수하게 됐다.
당시 그런 큰 배가 갈 수 있는 곳은 구소련 영해밖에 없었다. 소련연방이 아직 개방되기 전이라 조업 허가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절차가 필요했다. 나는 국가안전기획부의 허락을 받아 일본에서 비자를 받아 소련으로 들어갔다.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핀란드 출신 여선교사를 우연히 만났다.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한국서 온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듣고 반가워했다. 전도지 몇 장을 얻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정식 비자를 받고 이 땅에 들어오면서도 전도지 한 장 들고 오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
한국에 돌아온 후 소련선교회란 곳을 알게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해 러시아권 기자, 선수단에게 전할 많은 성경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러시아어 성경을 구해 다음 소련 출장 때부터 가지고 들어갔다.
당시 소련 입국 반입 금지 품목에는 성경도 포함돼 있었다. 무사히 세관을 통과했지만 성경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는 몰랐다. 돌아갈 날은 다가오는데 난감했다. 호텔에 두고 가면 누구의 짓인지 금방 들통날 것이고 다시 한국으로 가져가기엔 위험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곤 우리가 거래하던 현지 수산회사의 통역관 말리야바니밖에 없었다.
나는 말리야바니를 방으로 불러 부탁을 했다. “소련에는 아직 정교회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소. 내가 성경을 몇 권 가져왔는데 누구에게든 좀 전해 주시겠소?”
내 말을 듣던 그는 안색이 변했고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왜 이런 것을 가져왔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암담했다. 그때처럼 간절히 기도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럴 땐 정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하나님의 지시로 왔습니다. 여기 성경이 있습니까” 하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기도도 했다. ‘하나님, 내일 밤에는 아무도 몰래 호텔을 빠져나가 버스 정류장에 두고 오겠습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결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이튿날 말리야바니가 다시 찾아왔다. “당신 어제 그 책 아직 가지고 있소?” 그렇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 책을 가져갈 것이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책 가져오지 마시오.”
나는 속으로 ‘할렐루야’를 연발했다. 나머지 한 권은 한 고려인 여자에게 전했는데 회사에서 성경을 읽다가 상관에게 들켰다 한다. 그런데 그 상관이 다음에는 자기도 한 권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성경을 전하는데 불편이 없었다.
구소련이 개방되고 10년 후 다시 러시아 출장에 올랐을 때다. 당시 거래하던 수산회사 임원과 저녁식사를 했다. 말리야바니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일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식사하면서 농담 삼아 “예전에 외국인들과 회의할 때는 KGB가 한 사람씩 꼭 참석한다고 들었소. 그런데 그가 누구였소” 하자 임원은 “KGB는 말리야바니였다오” 했다.
기가 막혔다. 내가 소련 비밀경찰에게 성경을 전달했던 것이다. 어떤 선교사도 들어갈 수 없던 때 장사꾼은 가능했던 일이다. 하나님께서 평범한 장사꾼인 나를 선교에 끼워주신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7) 소련선교회 일 도우며 ‘선교의 꿈’도 무럭무럭
88올림픽 직후에는 러시아 발레단, 오케스트라, 아이스 쇼 등 소련인의 내한공연이 많았다. 주로 롯데호텔에 투숙했다. 나는 소련선교회 김영국 장로님, 외대 러시아어과 청년들과 함께 성경책을 전달하기 위해 호텔로 달려가곤 했다. 물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와 호텔 측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투숙객 방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아침 식사를 할 때 식당 앞에서 전도지와 성경책을 나누어주었다. 어떤 이들은 성경책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젊은이는 4권을 줄 수 있느냐고 했다. 러시아에 자기 형제가 4명 있다고 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가 전한 러시아 성경책이 모스크바 시장에서 미화 8달러에 팔린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살 것이니까 그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아내가 서울신대 신대원 목회학석사(M.Div.) 과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소련 개방 후 일손이 바빠진 소련선교회를 도와야겠다고 했다. 강남에서 신촌까지는 꽤 멀었지만 아내는 1주일에 두세 번씩 선교회 사무실에 나가 자원봉사를 했다. 처음에는 우표 붙이는 일, 청소 등을 했다.
얼마 후 소련선교회가 강남으로 이사한 다음부터는 아예 매일 출근하면서 재정, 회지 발간하는 일을 도맡았다. 1991년 4월 소련선교회는 처음으로 사할린, 하바롭스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도 사할린 동포 방문이 시작됐고, 지하교회 지도자들과 성도가 가끔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 우리도 집을 개방해 그들을 맞이하곤 했다.
소련선교회는 소련이 개방되기 훨씬 전인 1982년부터 김영국 장로님과 외대 러시아어과에 다니던 청년들에 의해 시작됐다. 철의 장막의 빗장이 풀리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 선교 단체를 통해 들어오는 소련 지하교회의 소식을 들으며 소련에 복음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했다. 김 장로님은 극동방송에서 러시아어로 복음을 전했다.
개방 직후 김 장로님은 모스크바에서 연해주까지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다니며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지를 돌아봤다. 난방이 끊긴 하바롭스크에서 추운 밤을 지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많은 성도의 기도로 기적적으로 소생하셨다. 그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일이 더 바빠졌지만 이후 하나님은 선교회를 이끌어갈 좋은 사역자들을 보내주셨다.
훗날 나와 아내가 중앙아시아로 선교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때 쌓은 애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두 마디 배워둔 러시아어를 선교지에서 들었을 때 몹시 반가웠다.
돌아보면 내가 선교사가 된 것은 특별한 부르심 때문이 아니었다. 직장생활과 신앙생활의 자연스러운 연장이었다. 선교사도 가지 못했던 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여행 가방에 러시아어 성경책을 넣어갈 수 있었던 것도 평범한 비즈니스맨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평신도 선교나 비즈니스 선교, 전문인 선교 등의 말이 나오고 있지만 선교에 대해 전혀 모르고 훈련받은 적이 없던 나에게 선교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선교는 선교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8) 감비아서 온 선교사 “WEC 한국본부 설립합시다”
1993년 겨울 나는 서울 대치동교회 교회당 신축 봉헌예배때 장로 임직을 받았다. 아내는 이듬해 권사 직분을 받았다. 직분을 받았음에도 우리 부부는 교회 밖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교회 일은 다소 소홀했다. 직분도 받았으니 교회에 더 많은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96년 2월 어느 주일, 아프리카에서 오신 선교사 한 분이 교회로 나를 찾아오셨다. 깡마르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었다. 그분은 서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10여년간 사역하다가 잠시 귀국했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부부와 유병국 선교사(WEC 국제선교회 한국본부 초대 본부장)와의 첫 만남이었다.
유 선교사는 웩(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이라는 선교단체를 통해 감비아로 파송됐다고 하면서 WEC를 소개했다.
유 선교사는 한국본부 설립을 위해 잠시 귀국한 것이었다. 그는 WEC 국제본부가 한국본부 설립을 위해 10년을 기도해왔고, 지금이 가장 적기로 여긴다고 했다. 나는 유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아이고, 또 꼼짝없이 잡혔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유 선교사와 헤어진 후 우리 부부는 서로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것 아닐까?” “여보,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한 새로운 일을 보여주셨는데 어떻게 여기서 ‘NO’ 할 수 있겠어요.” “음, 당신도 그래?”
나는 유 선교사에게 WEC 한국본부 설립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준비를 위해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치과의사였던 상도제일교회 김정태 장로다. 그는 선교라면 언제든 한걸음에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후에 그는 치과 클리닉을 접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두 번째 만난 사람은 사랑의교회 옥인영 장로다. 강남성모병원 정형외과 의사였던 옥 장로는 나와는 중·고등학교 동기 동창이다. 후에 그는 10년 이상 WEC 한국본부의 이사장을 맡아 봉사했다.
그 외 목사님들과 장로님, 집사 등 11명이 설립 준비차 모이게 되었다. 아무도 WEC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창립자 CT 스터드의 전기를 읽으며 WEC의 정신을 배웠다.
WEC은 100년 전 영국에서 시작된 국제선교단체로 2200여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4개의 실천원리를 가지고 활동한다. 믿음, 거룩, 희생, 교제이다. 창시자 CT 스터드는 중국, 인도에서 오랜 선교 사역을 하고 다시 53세에 아프리카 콩고를 향해 떠났다. 그때 그가 남긴 말은 WEC의 모토가 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WEC의 특징 중 하나라면 철저한 믿음 선교(Faith Mission)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셨다면 우리 삶과 사역을 위한 모든 필요를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WEC 소속 선교사들은 자신의 필요를 교회나 개인에게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한다. 이것은 100년 동안 전통으로 내려온 핵심가치이다. 인간적인 계획이나 프로젝트에 의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철저히 따르기 위해 힘쓴다. 주로 남들이 가지 않는 미전도 지역으로 가기 때문에 위험과 어려움이 더 크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WEC을 조심하십시오. WEC은 수렁과 같아서 한 번 발을 디디면 빠져버리고 맙니다.” 결국 나도 WEC에 빠져버렸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9) 내 인생의 이정표를 확 바꾼 두번의 사표
나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WEC선교회 이사의 한 사람으로 봉사했다. 영입심사, 이사회, 정기기도회 등 한 달에 서너 번씩 참여했다. 파송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었고 우리 집 일부를 선교관으로 사용해 안식년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내 나이 50이 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더해 주셨다. 나중 필요를 위해 장신대 평신도교육대학원 2년을 마쳤다. 아내도 “생선 몸뚱이는 우리가 다 먹고 꽁댕이만 하나님께 드릴거냐”며 결단을 재촉했다. 하지만 내 열정을 다 쏟은 회사, 그리고 나에게 맡겨진 사장 자리를 아무 때나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04년 한국에서 WEC선교회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나는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그때 국제부총재였던 트라우고트 부부와 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짓더니 “당신은 선교사가 되어 한국본부에서 일하면 참 좋겠습니다. 저희들이 당신을 위해 매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아직은 아닐거야. 몇 년은 더 기다려야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몇 달 후 회사에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고 나는 사장으로서 책임을 느껴 사직 의사를 밝혔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는 WEC 선교사에 지원했다. 영입심사 위원에서 영입심사를 받는 선교 지원자로 앉았다. 내 삶에 두 번째 획기적인 변화의 때였다.
첫 번째는 삼성 비서실에 사표를 던지고 나의 신앙생활과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날 때였고 지금은 20여년간 몸담고 일했던 한성기업에 사표를 내고 선교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나의 선택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주님의 인도하심과 전적인 주관하심에 내 삶을 맡길 때라고 생각했다.
나는 승용차도 회사에 반납했다. 비서도 없었다. 하루는 결혼식이 있어 외출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알았는데 돌아오는 길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기로 했다. 그런데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그때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와서 멈췄다. 됐구나 싶어 택시 안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그런데 안에서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하는 게 아닌가. 그는 나의 운전기사였다. “어, 자네가 웬일인가?” 나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물었다. “예, 개인택시 하나 사서 이렇게 굴리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보니까 사장님 같으신 분이 택시를 잡으려고 뛰어다니시는 것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자네에게 정말 미안하구먼. 나 때문에 자네까지 직장을 그만두게 해서. 그래, 한 달 벌이는 얼마나 되나? 살만은 한가?”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만 다른 걸 할 게 있어야죠. 일 없을 때는 책도 볼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나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된 그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그때는 주변 사람들도 헤아려 봐야 할 시간이었다. 내겐 귀한 친구 하나가 있다. 의사로 평생 군의관으로 봉사하고 국군의무사령관을 지내다 예편한 친구였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유난히 강하고 성격도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미국으로 선교훈련을 떠나기 전 그가 우리 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떠나는 우리를 보며 도전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굵다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돌이켜보면 그 장군의 눈물 때문에 혹독한 훈련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10) 경건·검약·노동의 참기쁨 가르쳐준 ‘캠프힐’
회사를 사임한 이후 우리 부부는 선교훈련원(MTI)에 들어가 3개월 훈련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캠프힐에서 9개월간 WEC 선교사 훈련을 받기 위해서였다. 캠프힐에서 70명의 선교사가 공동체 생활을 했다. 아침마다 드리는 경건의 시간은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 이어졌다. 별것 아닌 작은 일에도 함께 기뻐하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위로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 땅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구나’ 생각될 정도였다.
우리는 침대 책상 소파 싱크대 등이 한 공간에 있는 작은 방을 사용했다. 하지만 캠프힐 선교사들은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다.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훌훌 떠날 사람처럼 그야말로 ‘심플 라이프’였다. 그곳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빵이나 우유, 채소, 캔 등을 1주일에 두세 차례 가져다 먹었다. 유통기한이 막 지난 식품은 팔 수 없지만 몸에는 해롭지 않다. 식품회사 사장을 지낸 나도 9개월 동안 날짜 지난 식품을 먹었다.
본관 지하실에는 퍼싱룸이란 곳이 있다. 그곳에는 기증된 헌옷들이 손질돼 있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으면 입을 수 있고, 또 필요 없으면 다시 손질해 갖다 놓았다. 우리도 그곳에서 철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가져다 입었다. 그곳에서는 좋은 옷이나 새옷은 입을 필요도 없지만 그런 것을 입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욕심만 조금 버리면 풍족하게 살 수 있음을 캠프힐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아파트 한 평이라도 더 크게 늘려 보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삶이 한 조각 휴지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공동체를 한국본부에서도 실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곳의 역사와 운영 체계, 리더십 특성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도서실에서 자료를 찾았고 각 부서를 다니며 선교사들과 대화를 했다. 나의 영어 지도 선생님이었던 린다 스미스는 “철희는 한국에서 온 스파이예요”라고 말할 정도로 그곳 공동체 생활을 조사하고 다녔다.
오전에는 주로 강의시간이었고 오후에는 노동을 했다. 아내는 부엌에서 식사 당번을 주로 했고, 나는 거의 중노동을 했다. 목공 페인트 미장 잔디깎기 흙나르기 등 육체노동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날까지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미국 훈련생들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일들을 척척 해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숙련공이고 나는 그저 보조 역할밖엔 할 수 없었다. 서양인 가정은 자녀에게 이런 일을 어려서부터 많이 시켜서 잘하는 것 같았다. 요즘 젊은 한국인은 망치 한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는 노동이 힘들어 3시간 정도 일하면 저녁식사도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 직원들이 내가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사장님, 도대체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어이없어할 것 같았다. 그래도 훈련기간 중 내게 가장 유익했던 시간을 말하라면 노동시간이었다고 할 것이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참 좋은 훈련시간이었다.
선교사 훈련은 지금까지의 사회생활에서 입었던 옷에 선교사라는 옷을 하나 덧입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경험과 지식, 사회적 지위, 생활습관, 가치관들을 모두 내려놓는 훈련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11) 주님이 원하는 일, 시키시는 일에만 집중하라
선교사 훈련 가운데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바로 거리 전도이다. 매주 수요일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강의에서 배운 대로 큰 백지에 복음을 전할 내용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런 뒤 커다란 합판에 그것을 붙여놓고 그림을 완성해 가면서 복음을 전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거리 전도 한 번 해보지 않았는데 미국 땅에서 영어로 복음을 전하다니!’ 그것도 이따금 마이크를 들고 하도록 시켰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은 미국 훈련생들이 전할 때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도 영어 발음이 제일 형편없는 내가 전할 때는 많이 모여 들었다. 동양인이 뭔가 영어로 소리치며 말하는 게 흥미로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훈련을 받자 얼굴도 좀 뻔뻔해지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 거리 전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3월의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돌아오는 길에 항상 들렀던 흑인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확성기를 사용해 아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하면 현관문을 열고 빼꼼히 얼굴을 내밀던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든다.
그날은 같은 훈련생인 미미 선교사가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차례였다. 미미는 준비해 간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바람에 합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담당 선교사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뒤에 가서 빨리 붙잡아 주라고 말했다. 나는 얼른 뛰어가 합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날따라 장갑을 갖고 오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차가운 바람에 손이 시려오고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바람에 흔들리는 합판을 놓을 수도 없었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만일 한국에 있다면 누가 이런 걸 시키겠노? 젊은 사람들을 두고 나이 많은 나를 시키다니.’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철희야, 그것이 앞으로 너의 일이고 너의 역할이다.” “예? 이것이 저의 일이며 역할이라니요?”
나는 순간적으로 불평했던 걸 회개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주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앞으로 나의 역할이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국 선교사님들을 뒤에서 합판을 들어주듯 힘을 다해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평범하게 들려주신 말씀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본부를 떠나오기 전날 우리 부부는 멘토였던 크로드 선교사 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중국에서 수십 년 동안 선교를 하고 후에 미국 본부에서 사역을 하는 인자하고 조용한 노 선교사다. 크로드 선교사는 떠나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메시지를 심어 주셨다.
“철희, 혜숙, 당신들은 선교지에 가면 너무 많은 일을 하려 하지 마시오. 우리가 하는 많은 일 중에는 주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귀는 너무 많은 일로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종종 주의 종들을 쓰러뜨리려 합니다. 주님이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파악해 꼭 주님이 원하시는 일 한 두 가지만 하십시오.”
그는 많은 일보다는 주님이 원하는 일, 주께서 시키시는 일에 집중할 것을 당부했다. 이 말씀은 선교지에 있을 때나 한국 본부장으로 사역할 때나 나의 모토가 됐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12) 고대하던 첫 파송지는 시련의 중앙亞 이슬람국
서울 대치동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우리가 향한 곳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이슬람 국가였다. 한국인과 흡사한 얼굴, 친절하고도 투박한 사람들, 집 근처 재래시장은 영락없는 60, 70년대 한국 모습이었다.
이슬람에서는 특히 가족공동체, 신앙공동체를 떠나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개종을 한다면 가족이나 자신의 공동체를 배신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가족이나 이웃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우리가 방문했던 한 가정교회에서도 술에 취한 남편이 예수 믿는 아내를 칼로 찔러 병원에 옮겼으나 결국 주님의 품으로 간 적이 있다. 그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전도사는 전직 경찰이었는데, 택시 운전사였던 큰아들 역시 세 명의 괴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공격적인 자세가 여전히 존재했으나 외국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다. 선교사라는 것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해롭게 하지 않았다. 나이 든 사람들을 공경하기 때문에 특히 시니어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점이 많았다.
그곳에는 60세 이상의 시니어 사역자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실버그룹’이라 이름을 붙이고 15가정 이상 매달 모임을 갖는데, 나는 그 모임에서만큼은 가장 막내였다. 80세에 선교사로 오신 노부부도 있었다.
대중교통으로는 주로 승합차를 이용했다. 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합승 같은 작은 미니버스인데, 대부분 독일 등 유럽에서 수입된 중고차를 개조해 만들었다. 옛 소련연방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기궤도차도 이용했다. 의자마다 삐걱거리고 등받이가 흔들리는 승합차는 짐 싣듯 사람들을 싣고 달린다. 버스 정류장도 있었지만 손을 들면 아무 데서 태워주기도 하고 내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사람들이 꽉 들어찬 승합차에 올랐다. 더 들어갈 곳이 없어 운전석 부근에 서 있는데 갑자기 운전수가 내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또다시 팔까지 휘두르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버스 뒤편으로 썩 들어가라는 말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당해 본 일이라 정신이 멍멍해질 정도였다.
황급히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내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마치 꿈속 어느 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탄이 심령의 가장 밑바닥부터 흔들어대는 듯 혼란스러웠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고 한심했다. 그 이후 나는 30∼40분 거리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선교지에서 절실하게 느낀 것 한 가지는 나 자신이 얼마나 충분한 훈련이 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대부분 시니어 선교사들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훈련을 제대로 받으려 하지 않는다. 선교지에 가서도 언어도 잘 안 배우고 대충 생활에 필요한 말 정도만 익히려 한다. 그러나 세상 물이 많이 든 사람일수록 선교사 훈련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만큼 내려놓고 벗어버리고 던져버려야 할 것이 많다.
우리 부부는 WEC선교회 규칙에 따라 언어를 공부했다. 도시에서는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시골에서는 토착어를 많이 사용했다. 두 가지 언어가 다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러시아어를, 아내는 토착어를 배웠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13) 보이지 않는 손이 보내준 ‘중고 컴퓨터 150대’
미국 본부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중고 컴퓨터 매매업을 하는 집사님 한 분을 만났다. 그는 “선교지에서 혹시 컴퓨터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연락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때는 그저 고맙다고 하면서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선교지에 와보니 현지 교회들이 컴퓨터 몇 대만 있다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전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집사님이 떠올랐다.
“집사님, 전에 컴퓨터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아직 유효합니까?” 집사님으로부터 즉시 답변이 왔다. “예, 한 달 내에 데스크톱 적재한 컨테이너 한 대(컴퓨터 150대 선적)를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임 부담은 어렵다고 했다. 운임은 한화로 700여만원 정도 들었다. 막상 대답을 듣고 보니 걱정이 됐다. 운임도 문제지만 통관 절차도 쉽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 말로는 뇌물 없이 무관세로 통과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선교사가 뇌물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공연히 일을 벌였다가 난처한 일만 생길 것 같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힘들어도 해야 하는 게 선교사가 아니던가. 우리 부부는 하나님 뜻을 묻기로 했다. “하나님, 컴퓨터를 이곳에 보내주시는 것이 주님 뜻이라면 운송 경비를 책임져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뜻으로 알고 추진하겠습니다.”
보름이 지났을 때 그 집사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우리가 운임 때문에 망설이는 줄 알고 그 절반을 대시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절반은 내가 대어야 하겠구나’ 했다. 그런데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하나님의 뜻이면 전액을 다 해결해 주시지 절반만 해 주시겠어요?” 그 말도 옳았다.
나는 WEC선교회의 규칙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도 재정적 필요를 말하지도 요청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2주 후 또 하나의 이메일이 당도했다. 뉴저지에 있는 찬양교회(허봉기 목사 시무)가 그 집사님 말을 듣고 교회에서 운임 전액을 대겠다는 소식이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컴퓨터를 들여오는 일을 추진해야 했다.
컴퓨터를 받기 위한 모든 통관 절차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신실한 세관원을 만났는데 모든 절차를 솔선해 무관세로 통과하도록 힘써주었고 혹시 다른 부서에서 어려움을 겪을까 봐 그것까지도 참견해 주었다. 통관 수속비용 외에는 한 푼 뇌물 없이 컴퓨터를 들여올 수 있었다.
그 세관원이 너무 고마워 나중에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놀라운 제안을 했다. 수도 외곽 빈민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정부에서 쓰던 낡은 빌딩이 있다고 했다. 이를 장기 무상으로 빌려줄 테니 학습센터를 하나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컴퓨터와 영어, 한국어, 중국어 등을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제의였다. 그것은 정말 우리 팀이 원했던 일이기도 했다.
컴퓨터를 현지 교회와 신학교, 시골학교, 고아원 등에 골고루 나눠주면서 우리는 많은 간증을 들었다. 사람들이 컴퓨터를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임을 알았다. 이 일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했다. 나는 무얼 했는가 생각해 보니 그저 하나님 나라 택배꾼 노릇을 한 것밖에는 없었다. 정말 선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14) 성도 1명 없던 ‘천사마을’ 1년새 22명으로
우리가 선교지에 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이상 하나의 교회라도 세우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가장 보람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가는 현지 교회 중엔 고려인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가 있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여기서 자동차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현지인만 살고 있다”고 했다. ‘천사마을’이라고 이름 붙은 그곳에는 교회도, 사역자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는 마을인 것이다. “목사님, 그곳에 함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며칠 후 목사님과 전도사 일행과 함께 천사마을로 향했다. 우리는 한 소녀의 집을 먼저 가기로 했다. 부인은 해산한 직후였으나 당장 먹을 것이 없었다. 작은 마을회관 앞에 있는 가게에서 우선 필요한 것들을 사서 그 가정에 넣어 주고 말없이 돌아왔다.
그 일을 계기로 그 남편인 유리(가명)씨가 고맙다는 인사 차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딸들도 따라 나왔다. 그 후 나는 교회를 통해 그가 자립해 살 수 있도록 보리 씨앗과 송아지를 사서 키우도록 했다. 새끼를 낳으면 돌려주기로 했고 유리는 성실하게 그 약속을 지켰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복을 주셔서 농사도 잘됐다. 잡초만 자라던 밭에 채소들이 심어졌고, 송아지 울음, 닭 울음, 아기 울음소리가 한데 어울려 사람 사는 집같이 변해갔다. 얼굴에 버짐이 하얗게 덮였던 두 딸도 교회를 다니면서 더욱 밝아졌다. 그들의 친구도 호기심에 이끌려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났을 때 천사마을에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22명이 됐다.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승합차로 그들을 실어 날랐는데 승합차를 타기 위해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자리가 없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유리는 말을 타고 나오기도 했다.
“유리, 당신은 천사마을의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특별히 택하셨다는 것을 늘 생각하십시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습니다”고 대답했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우리가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유리와 성도들은 우리 부부를 위한 송별예배를 천사마을에서 드리겠다고 전해왔다. 예배실은 비닐하우스였다. 아니 사실은 밭에 나뒹구는 비닐을 주워다 이어 만든 것이었다. 마당에 말뚝을 세우고 비닐을 붙인 예배실, 그 어떤 예배당에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장소였다.
유리가 고백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터가 하나님의 예배당이 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되어 질 줄 믿습니다. 아멘.” 선교사가 앞서서 교회당을 지어주는 것보다 그들 스스로 마음과 힘을 모아 예배당을 세울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찬송은 감격적이었다. 천사마을의 복음화를 위한 가사를 러시아 복음성가 곡에 붙여 만든 것이었다. 오르간이나 피아노 반주도 없었다. 화음도 박자도 맞지 않은 성가대의 찬양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백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 그들은 찬양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거룩한 춤이었다.
유리는 그곳에 조각 비닐을 이어 붙였지만 언젠가 그곳이 교회 터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그들이 예배당을 지을 만한 재정적인 힘도, 믿음과 헌신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기를 우리는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최철희 (15·끝) 선교본부 사역 맡으며 ‘청지기의 삶’ 깨달아
2008년 WEC국제선교회 한국본부로 돌아오자 우리 부부는 본부장으로 선출됐다. 물론 선교사가 됐을 때부터 한국본부로의 부르심을 확신했지만 본부장 책임이 지워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도, 선교 경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14년 전 한국본부가 창립될 때부터 준비위원장으로, 또 이사로 섬겨왔지만 그것으로 이력을 내민다면 어림도 없는 막중한 책임의 자리였다.
이 일을 위해 그처럼 엉겁결에 회사 사장직을 내려놓게 하시고 뒤도 돌아볼 수 없도록 급행으로 나를 이끌어 오신 것인가. 오랫동안 조직생활에 익숙해 있었고, 또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항상 몇 년 후를 내다보고 일해 온 전문 기업가의 안목 같은 것이 한국본부에 필요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막상 본부장직을 수락한 후 이 일은 세상일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 회사생활에서도 기도하며 일했지만 전적으로 주님께서 회사를 운영하고 다스리신다는 개념이나 믿음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철저하게 주님이 대장님이고 회장님이셨다. 전적인 순종, 위임받은 청지기 자세가 아니면 처음부터 엇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책임감에 눌려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때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으로 위로하셨다. “짐은 내가 지고 있다. 너는 따라만 오면 돼. 발을 맞추고, 자, 어서!”
주님을 따라가면서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면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이었다. 사회적 지위, 나이, 경험, 지식은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됐다. 누구와 함께 간다는 것은 무엇보다 마음이 맞아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 그의 호흡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님과 발걸음을 맞출 때 나의 행보는 자유함과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본부장일은 회사보다 더 바빴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본부 사역을 위해 필요한 재정도 빈틈없이 채워주셨지만 사역에 필요한 사람들도 적시에 보내주셨다. 본부 사역을 한다는 것은 선교지에서 일하는 것 이상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아직 한국교회에서는 선교사라면 반드시 해외로 나가 활동하는 사람이라 인식하고 있지 국내에서 선교한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본부 사역자들은 30명 정도 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사례를 받고 일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이들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2년 자신의 삶을 드리기 위해 찾아오기도 하고, 선교지로 가는 것을 늦추고 본부를 돕기 위해 머무는 이들도 있다. 후원비가 삭감되는 것을 감수하고 본부의 부름에 달려온 선교사도 있다.
WEC선교회는 가장 어려운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단체다. 4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의 메일이 선교지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진다. 다른 나라에 있는 선교사 자녀학교에 아이들을 떨어뜨리고 오는 선교사, 자녀들과 함께 쓰레기 마을로 이주해가기로 했다는 소식, 내전으로 이웃 나라에 피신했다는 이야기, 뺑소니차로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사연, 추방의 아픔, 그리고 동역자의 예상치 못한 죽음 등.
선교사들의 헌신 앞에서 가끔 자문해 본다. 우리 사역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는 그들은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사역이 가치 있는 것도, 우리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그들이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충분히 가치 있는 분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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