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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요한복음5장 : 병고침,아들의 권한,예수를 믿는 증언
1. 유대인의 명절이 어떤 절기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부림절(3월), 유월절(4월), 오순절(5월), 초막절(10월), 수전절(12월) 등이 유대명절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유월절(2:13,6:4,11:55), 초막절(7:2), 수전절(10:22) 등은 요한복음에 그 명칭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림절은 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지켰기 때문에 본절에 나타난 명절은 오순절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2. 느헤미야가 성전을 재건할때 이 양문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느헤미야3:1,3:32,12:39) 예루살렘 성문에는 세가지 동물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양문, 어문(느헤미야3:3,12:39,스바냐1:10), 말문(예레미야31:40)이 있습니다 베데스다는 예루살렘 성전 서북방향 모퉁이 지점에 위치한 연못으로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기전 부터 이곳은 영적 치유의 능력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행각이란 병자들을 머물게 하는 회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곳 베데스다의 영험한 능력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3~4. 4세기 이전의 사본에는 없는 구절이 괄호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대 필사자가 난해절 구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적으로 기록하여 삽입한 구절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이야기를 삽입하여 기록해 둠으로서 다른 방향의 오해적 접근을 막고 진리의 훼손을 피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5~9. 38년된 병자는 베데스다연못을 찾는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가장 증세가 심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병자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생애 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낫기만을 기다리며 보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병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는 그 연못에 들어갈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바로 앞에있는 물에 조차 들어갈수 없는 38년된 병자는 아마 행각에 머물며 그 긴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사람을 주목한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낫고자 하느냐고 믿음에 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때 이 병자는 예수를 향하여 "퀴리"(kuvrie), 즉,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라는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자신의 주인을 부르는 친근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번째 이적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는 예수님의 명령과 이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일어난 38년된 병자의 믿음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때 부터 토요일 해질때까지를 일컫는 기간으로 모세의 십계명중 제 4계명에 속하는 것입니다(출애굽기20:8~11)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상에 누인채로 운반하는 것은 허락하였으나 상만 운반하는 것은 노동의 죄로 여기며 금하는 아이러니를 범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고 그 안식일이 그들을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태복음12:8)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의 근본 목적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10~12. 유대인들은 병을 치유받은 사람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짐을 지지 말라는 말씀(느헤미야13:15,예레미야17:21)과 안식일 금법 39번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매우 확대하여 적용하되 하나하나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구체적으로 표현하거나 다른 조항이 없으므로 이것은 매우 불합리한 적용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여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에케이노스"(ejkei nov), 즉, "저 사람"은 강조적 지시사로서 긍정적 의미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치유받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처한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며 예수님께 책임을 전가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랍비의 법에는 안식일에 고의로 공적인 장소에서 개인의 집으로 물건을 이동하는 자는 돌에 맞아 죽이던지 참수형을 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3. "우카"(oujk)는 "아니다, 모른다"라는 의미로 여기에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강조점이 있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자신의 병이 누구에 의해서 치료 되었는지 아직까지 아는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돌발상황을 미리 예측하시고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습니다 "에크뉴오"(ejkneuvw)는 "피하다, 조용히 물러가다"라는 의미로서 유대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한 지혜로운 조치였습니다
14.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에서 치유 받은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케이론"(cei rovn)은 "악한, 나쁜"의 의미로 단순히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심한것"과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상호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사람의 질병이 죄로 기인한 것이라는 설명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치말라는 말씀은 그의 병이 죄로 인한 것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사람의 질병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가 있슴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와 병을 인과관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병은 죄로 부터 잉태되었다는 사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6. 치유받은 자는 예수께 감사하는 일에는 민첩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유대당국자에게 예수를 지목함으로서 곤경에 빠뜨리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매개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라는 의미는 그것이 가지는 고발적 의미든, 복음적 의미든 본인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는 이 사람의 태도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예수께서 박해를 받게되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지혜의 부족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핍박한다"는 의미의 헬라어 "디오코"는 "뒤쫓는다, 추적한다"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는 유대인의 괴롭힘이 예고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천지창조로 부터 지금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예수께서도 동일하게 일하고 계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말씀은 17~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자연신론"의 주장을 완전하게 굴복시켰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였으나 피조세계에 직접 관여한다는 주장에는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시편104:1~30)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선행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멈추는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8~19.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이사야64:8) 그러나 그것은 시문학적 표현과 왕과 신하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지칭한 것일 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칭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들의 눈에 신성모독으로 비춰졌고 스스로를 격상시켜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놓으려는 음모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심으로서 그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빌립보서2:6~7) 삼위의 어느 한 인격도 다른 두 위와 독립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삶을 사는 동안 아버지의 대행자가 되신 것입니다(이사야11:2,사도행전10:38)
20~21.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성자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필레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또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그 아들 독생성자를 내어 주셨습니다(아가페)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야이로의 딸(마가복음5:35~43), 나인성 과부의 아들(누가복음7:12~15), 죽은 나사로(요한복음11:39~44)를 살리는 기적에서 이미 증명되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생명을 주시는 자요(요한복음10:28) 생명 그 자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사역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요한복음14:6)
22. 심판의 권세는 죄인들에 의해 부당한 판결을 받아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죄와 공의를 함께 취하신 분으로 심판주로서 아무런 제한을 갖고 있지 않으신 분입니다(베드로전서2:23) 예수께서는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요한복음5:27)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신 목적중에 하나가 그를 통하여 사단을 징벌하고 심판하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첫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사단을 징벌하시고 그와 연합하여 죄지은 모든 인간들의 불의를 심판하는 권세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로마서5:14,고린도전서16:45)
23.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위임하신 이유였습니다 헬라어 "티마오"는 "영예롭게 하다"라는 의미로 예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으나 오히려 세상으로 부터 모욕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이사야53:3,누가복음22:63~65)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구원사역을 온전하게 성취하신 아들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인의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2:9~11)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한 심판의 권세까지 위임하심으로 공경성을 확인하였습니다
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자", 하나님을 믿는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말씀을 경청하는 자 입니다 즉,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자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로마서10:13~!7) "에케이"(ecei)는 "붙잡다, 소유"의 뜻으로 영생을 얻었고는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라는 해석이 더 맞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표현은 매우 시각적인 정의입니다 헬라어 "메타베베켄"은 현재완료시제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영생과 구원은 단회적인 것이나 그 결과는 지속적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한번 구원을 받은 자는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의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인류의 구원에 이르는 항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5. "진실로 진실로", 헬라어에는 "아멘 아멘"으로 기록되어 있을만큼 예수께서는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9,24절에 이어 세번째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죽은 자들"은 영적 불신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에베소서2:1~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자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복음의 시대(믿음의 시대,갈라디아서3:23)가 도래한 것입니다 죽은자들과 대비된 하나의 존재는 "듣는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 영접한 자로서 보내신 자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26. "자기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성부와 성자는 스스로 생명을 가진 생명의 원천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이것은 그리스도를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이해한 아리우스(Arius, AD.280)의 "성자피조설"을 연상케 하지만 본질은 원천적인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어적 표현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유화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일뿐 전후맥락은 자신 또한 생명의 근원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요한일서5:11~12)
27~29. "인자"(Son of Man)는 다니엘서에서 권세와 영광을 지닌 메시야로 사용된 이후(다니엘7:13~14) 그리스도의 고난(누가복음18:31~33)과 죽음(마태복음12:40), 부활(마태복음12:9~23), 영광스러운 재림(마태복음24:27~37)과 왕권(마태복음16:28) 등을 묘사할 때 예수 자신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나에게 부활과 심판의 권세가 있다는 말에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라는 것은 그것을 의심하거나 의혹에 눈으로 보지 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대인들에게 이같은 말씀으로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무덤속에 있는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재림하실때의 부활사건을 의미하고 있으며, 현재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능력과 판단에 제약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자로서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범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펨포"(pevmpw)는 "보내신, 파송하신"의 의미로 일시적인 심부름과 같은 한정적인 기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땅에 영원토록 계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일정기간의 위임을 받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31~32. 유대인들의 재판에는 2~3인의 증인이 필요하였습니다(신명기19:15,마태복음18:16) 이러한 유대인들의 풍습에 따라 예수께서는 권위있는 4가지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열왕기상21:12) 그 4가지는 세례요한(33절), 역사(36절), 성경(39절), 모세(46절)이었습니다 아들을 위한 하나님의 증거는 세례(마태복음3:17)와 변화산(마태복음17:5)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의 증거가 12장28절에서 천둥과 같은 하늘의 소리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사람들은 그 소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요한복음12:29)
33~35.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산헤드린공회에서 파견한 사실을 주지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1:19) 그 때 요한이 말한 것은 진리, 즉, 메시야를 증거한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1:6~7)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함에 있어서 사람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고(마태복음21:26), 예수에 대한 그의 증거가 진실하였다는 측면에서(요한복음1:26~36) 그것을 증거로 채택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헬라어 "뤼크노스", 즉 "등불"은 저녁시간 방안을 비추는데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불은 해가뜨면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세례요한도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어둔 세상을 잠시 비추었던 등불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3장30절의 고백과 같이 자신의 사역이 마감되어 가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36~38.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자의 소리(요한복음1:23)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손으로 행하여지는 표적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셨습니다(요한복음2:11,3:2) 지금 이곳에 함께 있는 유대인들은 시내산의 이스라엘과(신명기5:22~23), 마태복음3장17절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일이 없고 그의 형상을 본일도 없습니다 이로서 유대인들에게는 그 말씀이 그들속에 거하지 않음으로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 또한 부인을 하는 것입니다
39.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2가지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첫째는 "선행"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최소한 한가지 이상의 선행을 행해야 했습니다(마태복음19:16) 둘째는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준수여부에 따라 생명과 사망, 복과 화를 취하게 된다고 신앙하였습니다(신명기30:15~20) 성경을 묵상하는 일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과라 할 것입니다(시편1:12) 성경속에 영생의 길이 있다는 그들의 믿음은 정의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적 행위만 지키면 영생할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한 것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더 세밀히 보았다면 충분히 만날 수 있었던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율법에 매여 바라보지 못함으로서 그들의 행위는 참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누가복음24:27)
40. 영생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한복음14:6)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무지한 사람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말하는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함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요한복음7:49)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는 유대학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씌워져 그들이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고린도후서3:15) 유대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은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인 동시에 아쉬움이었습니다
41. 병자를 고치신 일(요한복음5:2~15)과 같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좋은 사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를 더욱 핍박하였습니다(요한복음5:16~18) 예수는 자신의 영광을 회피하고 어려운 고난을 선택하였습니다(요한복음6:15)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중심은 인류의 구원에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의 고통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요한복음12:28,17:1~5)
42. "텐 아가펜 투 데우"(thin ajgavphn tou qeon),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떤 행위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요한일서4:12) 이들은 오직 율법주의에만 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씀하고 그 분을 신앙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43.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며 많은 기적을 행하신 권위와 권세를 가진 사실의 근거를 분명히 제시해 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의 권위와 권세를 사용하시므로 그 뜻을 성취하였습니다 그후 예수께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사실과 달리 아직 이루어져야 할 이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수행해야 할 당신의 종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와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대인이라는 이름속에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창세기29:35) 즉,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하나의 숙명적 관계였습니다(이사야43:21) 그런데 본연의 삶을 망각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삶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람의 헛됨(창세기25:27)과 헛된 영광을 위하여 서로 격동과 투기를 일삼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5:26)
45.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내세우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오히려 모세의 고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율법의 근본정신은 복음 옹호의 기반이고 모세의 교훈은 그리스도 교회의 모형이기 때문에 모세 율법의 내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그 율법은 예수가 아닌 유대인을 고발하는 말씀이 될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46~47.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도 무지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말하는 지점을 알지 못하고 무지함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람마"(gravmma), "기록된 문자"(로마서2:27,고린도후서3:6)도 믿지 않는데 "레마"(rjhma), "살아있는 말씀"을 어떻게 믿겠느냐 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더 믿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향한 강력한 질책성 말씀이었습니다